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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가방 13개 임시정부 문서, 6·25 때 송두리째 사라져

중앙선데이 2019.01.05 00:02 617호 6면 지면보기
3·1운동, 임시정부 100년 ① 뿌리 부실한 역사 만들기
그라피티 팀 ‘레오다브 아트 크루’가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그라피티를 하고 있다. [뉴스1]

그라피티 팀 ‘레오다브 아트 크루’가 지난달 31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3·1운동 및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 그라피티를 하고 있다. [뉴스1]

1932년 4월 29일 윤봉길 의사의 상해 작탄 의거가 있던 당일 오후 1시 일본군이 프랑스 조계로 들어와 대한민국임시정부(이하 임정) 청사를 덮쳤다. 임정 요인들은 미리 자리를 피했지만 공식 문서까지 다 챙겨 나오지는 못했다. 일제는 그때까지의 임정 문서를 모두 강탈해 갔다. 그 피해를 교훈 삼아 이후 임정은 유사시 문서부터 챙겼다고 한다. 그러나 6·25전쟁의 참화는 또 다른 피해를 가져왔다.
 
1945년 8월 일제의 패망 소식을 들은 임정 요인들은 가죽가방 13개 분량의 문서를 가지고 우여곡절 끝에 귀국길에 올랐다. 임정 문서를 풀어놓을 곳이 없어 일단 김구의 거처인 경교장에 보관했다. 그러다 임정 총무과장을 지낸 조남직의 성북동 집에 옮겨 놓았는데 이것이 그만 6·25전쟁 중에 송두리째 사라져 버렸다고 한다. 그 문서들은 어디로 간 것일까.
 
한시준 단국대 교수는 임정 문서의 행방을 오랫동안 추적해 왔다. 6·25 때 사라진 임정 문서가 북한에 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다. 왜냐하면 유사한 사례가 있기 때문이다. 6·25전쟁 당시 연합군이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서울을 수복한 후 인민군이 북으로 퇴각할 때다. 미아리고개 부근에서 인민군 차량 26대가 미군 폭격을 받고 연합군 수중에 들어오게 되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그 트럭에 실린 게 조선시대 고문서들이었다. 창덕궁에 있던 고문서들을 북한이 실어가고 있었다. 전쟁이 끝나고 이 고문서를 서울대 안에 옮겨 놓게 되는데, 그것이 오늘날 서울대 규장각이 만들어진 계기였다. 규장각 문서를 북이 가져가려고 했듯이 임정 문서 또한 북으로 가져갔을 개연성이 높다고 생각해볼 수 있다.
 
임정 문서를 추적하던 한 교수는 뜻밖의 희망을 북한에 갔을 때 보게 된다. 2007년 독립운동사연구소장을 맡아 두 차례 북한을 방문했을 때다. 안면이 익은 북측 관계자에게 넌지시 임정 문서에 관해 물어보니 예상하지 못한 대답이 돌아왔다. “인민대학습당에 그런 자료가 많은 것 같은데 조사를 안 해봐서 무슨 자료가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고 했단다. ‘인민대학습당’이란 단어가 한 교수의 머리에 꽂혔다. 마대자루에 넣어두고 정리가 안 된 자료들이란 얘기도 들었다고 한다.
 
이렇게 보면 두 차례에 걸쳐 망실된 임정 문서들을 찾을 수 있는 희망이 보이는 듯하다. 1932년 일제가 강탈한 임정 문서, 그리고 6·25 때 북한군이 가져간 것으로 추정되는 임정 문서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을 기념하는 사업은 음악회도 좋고 특별 전시회도 좋다. 하지만 잊혀진 임정 문서를 되찾아 독립운동사의 뿌리를 튼튼히 하는 것보다 소중한 성과는 없을 것 같다.
 
지난해 9월 문재인 대통령이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발표한 ‘평양 선언’에는 “3·1운동 100주년을 남북이 공동으로 기념한다”는 항목이 들어 있다. 과연 가능할까. 그런 의문도 들었지만, 성사된다면 남북한 역사 인식 차이를 줄이는 큰 발걸음이란 점에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남북이 공동 기념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임정 얘기는 평양 선언에서 빠졌다. 3·1운동 공동 기념행사 때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인민대학습당에 있는 임정 문서들을 우리에게 돌려주는 이벤트는 어떨까. 러시아 고르바초프가 냉전이 끝난 후 김영삼 대통령에게 6·25전쟁 관련 구 소련 문서를 전해준 것과 같은 효과를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3·1운동과 임정 100주년을 맞아 우리 근대사를 보는 시각이 좀 더 열릴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3·1운동의 중요한 가치 가운데 하나가 통합 정신이다.
 
3·1운동과 임정 수립은 어느 날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진 일이 아니다. 짧게는 3~4개월의 준비 기간을 거쳤고, 길게는 대한제국 시기까지 그 연원이 올라갈 수 있다. 그동안 3·1운동의 배경과 관련해선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제창이나 파리강화회의, 고종의 독살, 일제 식민지배의 폭압성 등에 주로 관심을 가져 왔다. 이런 주제들에 대해서도 더 깊은 연구를 해야겠지만 새로운 자료나 해석에 대해서도 열린 시각이 필요하다. 이념에 따른 진영논리를 휘두르면 역사의 진실은 보이지 않는다.
 
그런 사례 중의 하나가 천도교다. 1919년 3월 1일 만세운동이 일어나기 전날인 2월 28일 밤 천도교 지도자 손병희의 집으로 민족대표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거사 준비 상황을 최종 점검하기 위해서였다. 비밀리에 움직였기에 처음 인사하는 이들도 있었다. 왜 손병희의 집이었을까. 3·1운동은 천도교를 빼고 이야기할 수 없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동학을 이은 천도교는 당시 최대 규모의 민족종교였다. 1910년 일제의 강제 병합 이후 의병과 독립군이 대부분 만주로 망명한 상황에서 천도교만한 대중 조직을 가진 기구는 없었다. 3·1운동의 조직과 자금은 거의 다 천도교에서 나왔다. 가장 많은 희생을 당한 것도 천도교였다. 천도교의 희생이 3·1운동 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민족대표 33인 중 15명이 천도교였는데, 이 중 손병희를 포함한 10명의 민족대표가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직접 참여한 이들이었다.(장석흥, ‘3·1운동의 역사적 원류와 계승’)
 
1894년 우금치에서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스러져간 동학 교도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3·1운동 직후 상해로 망명한 박은식은 이듬해인 1920년 『한국독립운동지혈사』를 썼는데, 1894년 희생된 동학 교도가 30만 명에 이른다고 했다. 그 기억을 어떻게 잊을 수 있겠는가. 일제의 강압이 심해지는 가운데 동학이 이름을 바꾼 것이 천도교다. 박은식은 3·1운동 때 천도교가 나선 것은 동학농민전쟁에서 이루지 못한 혁명을 이루기 위한 것이라고 서술했다.
 
그럼에도 손병희는 3·1운동에서 1894년의 투쟁 방식을 되풀이하지 않았다. 25년 전과 다른 전술을 택했다. 비폭력 정치투쟁이다. 세계사에 빛나는 가장 세련된 민족해방운동이자 평화운동이 전개됐다. 21세기인 지금도 결코 쉽지 않은 시위 방식이다.
 
손병희는 거사 전날 당초 탑골공원에서 거행하려던 계획을 바꾼다. 탑골공원 북서쪽 인사동에 있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들이 모여 하기로 했다. 학생들과 일제 군경의 유혈충돌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손병희는 왜 그런 결정을 내렸을까. 이는 결코 비겁한 행위로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25년 전 동학 농민의 처절한 투쟁과 선명하게 대비되는 3·1운동의 비폭력 정신의 역사적 연원은 무엇일까. 이에 대해선 다음 회에 좀 더 알아볼 예정이다.
 
배영대 근현대사연구소장·철학박사 balance@joongang.co.kr
◆자문 전문가=이태진(서울대)·윤경로(한성대) 명예교수, 한시준(단국대)·황태연(동국대)·장석흥(국민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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