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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란의 어쩌다 투자

“내 돈인데 사정해서 받아야 하나”…암호화폐 거래소 입금한 돈은 내 돈 아닌 거래소 돈

중앙일보 2019.01.04 20:51
암호화폐 거래소 후오비코리아에서도 현금(KRW)으로 암호화폐를 살 수 있게 됐다. 후오비코리아는 4일 오후 2시부터 테더(USDT)ㆍ비트코인(BTC)ㆍ이더리움(ETH)ㆍ이오스(EOS)ㆍ리플(XRP) 등 총 5종의 암호화폐 원화 거래를 시작한다고 발표했다.

 
원화 마켓 오픈을 기념해 이벤트도 진행한다. 1월 한 달간 원화 마켓 거래 수수료는 무료로, 암호화폐 간 거래 수수료는 종전 0.2%에서 0.05%로 낮춘다. 각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뿌리는 등 대대적인 홍보에 나섰다.

 
국내 대표 거래소인 업비트가 검찰에 의해 기소된 게 불과 몇 주 전이다. 업비트는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발급해 줄 은행을 찾지 못해 1년 가까이 신규 회원(원화 입출금이 가능한)을 받지 못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중국계’ 거래소가 원화 입출금을 지원한다니 의아했다.

 
출처: 비트코인매거진

출처: 비트코인매거진

국내 업체에 대한 역차별은 아니었다. 후오비코리아 역시 가상계좌를 발급해 줄 은행을 찾지 못했다. 법인계좌 밑에 개인계좌를 둔 이른바 ‘벌집계좌’로 투자금을 받는다. 중소형 거래소들이 암암리에 이용해 왔던 방식이다. 하지만, 후오비코리아 같은 메이저 업체가 벌집계좌를 활용해 원화 입금을 받겠다고 대놓고 광고해도 괜찮을까 싶다. 금융당국은 횡령 등을 우려해 벌집계좌를 못 쓰도록 은행을 압박해 왔기 때문이다.  
 
◇업비트ㆍ빗썸ㆍ코인원ㆍ코빗 빼면 모두 벌집계좌
지난해 1월 암호화폐 시장은 광기에 가까운 열기에 휩싸였다. 규제 울타리 밖에서 가격은 롤러코스터를 탔다. 정부 입장에서는 시장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다.

 
정공법은 관련한 규제를 만드는 것이다. 투자자는 보호하면서 시장은 죽이지 않는, 건전한 규제의 도입이다. 정부는 그러나, 규제 울타리 안으로 암호화폐를 집어넣는 것 자체가 시장에 잘못된 시그널을 보낼 수 있다고 우려했다. 자칫 규제 도입이 정부의 암호화폐 공인으로 받아들여져 시장의 열기에 기름을 부을 수 있다.

 
우회로를 택했다. 암호화폐 거래소가 아니라 기존 금융당국의 관할권 안에 있는 은행의 목줄을 죄기로 했다. 금융위원회는 지난해 1월부터 암호화폐 거래소가 실명확인 가상계좌 서비스를 이용하지 않는 등 위험성이 높다고 판단하면 은행이 거래를 거절ㆍ종료할 수 있도록 했다. 7월 개정안에는 은행이 ‘지체 없이’ 금융거래를 끝낼 수 있다는 조항을 담았다.

 
가상계좌란 실제 계좌에 딸려 있는 연결계좌를 말한다. 학원비, 아파트 관리비, 각종 지방세 납부 등에 활용되고 있다. 예를 들어, A학원이 수강생들로부터 학원비를 입금받는다고 해 보자. B은행에 A학원 명의의 계좌(실제 존재하는 계좌로 모(母)계좌라고 한다)를 개설한다. 수강생들에게는 본인의 이름으로 학원비를 해당 계좌로 입금하라고 알려준다.  
 
대부분 알려준 대로 하지만, 몇몇은 아니다. 부모 명의의 계좌에서 돈이 빠져나가다 보니 입금자명에 부모의 이름이 그대로 찍힌다. 어떤 수강생의 부모인지 일일이 찾아내야 한다. 혹여, 학원에 이름이 같은 수강생이 있을지도 모른다. 누가 학원비를 냈는지 안 냈는지가 불분명하다.
  
가상계좌 서비스 흐름. 출처: KEB하나은행

가상계좌 서비스 흐름. 출처: KEB하나은행

수강생이 50명, 100명쯤일 땐 일일이 처리할 만하다. 수강생 규모가 1000명, 1만 명 단위로 커지면 얘기가 다르다. 관리가 어렵다. 이때 은행이 제공하는 가상계좌 서비스를 이용하면 편리하다.
 
A학원은 B은행에 요청해 수강생 숫자만큼 모계좌에 딸린 연결계좌(가상계좌)를 만들 수 있다. 이때 연결계좌 번호는 모두 다르고, 계좌명은 보통 기관이나 기업 이름에 납부자 이름이 붙어있는 경우가 많다. 수강생이 가상계좌로 학원비를 입금하면 이 돈은 A학원 소유의 모계좌로 들어간다.  
 
가상계좌는 말이 ‘계좌’이지 실은 개인을 식별하기 위한 일종의 코드에 불과하다. 계좌가 아니기 때문에 돈을 저장하고 보관하는 기능 자체가 없다. 그런데도 자기 이름이 적혀 있다 보니 가상계좌가 자기(수강생)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아니다. 가상계좌를 만든 주체는 학원이다. 소유권은 온전히 학원에 있다.

 
은행은 가상계좌 서비스를 제공하고 수수료 수입을 올린다. 보통 계좌 1개당 발급 시 100원, 입금 시 300원 정도가 업계 평균이라고 한다.

 
누가 돈을 냈는지를 쉽게 구별하기 위해 도입된 가상계좌 서비스가 이전에는 문제될 게 없었다. 그런데 암호화폐 거래소가 가상계좌 서비스를 이용하면서 문제가 됐다. 암호화폐를 사기 위해 거래소에 돈을 입금하는 순간, 그 돈은 고객 본인이 아니라 거래소 소유가 된다.

 
분명 내 돈인데도 내 마음대로 빼 쓸 수 없다. 자신의 계좌에서 출금하는 게 아니라 거래소에 출금을 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 고객에게는 ‘출금권’이 아니라 출금 ‘청구권’만 있다. 암호화폐 거래 자체는 증권 거래를 닮았지만, 증권사에 개설된 계좌가 고객 소유인 것과 달리 암호화폐 거래소 (가상)계좌는 거래소 소유다.

 
거래소가 입금받은 고객의 투자금을 마음대로 써도 이를 막을 수 있는 방법이 없다. 금융당국이 찾아낸 해법은 관할권 안에 있는 은행에 의무를 전가하는 방식이다. 고객 자산과 거래소 고유자산을 분리 보관하고 있는지를 은행이 감시한다. 실명확인을 위해서 고객은 거래소의 모계좌가 개설된 은행과 같은 은행의 계좌가 있어야 한다.  
 
◇가상계좌 안 내줬더니 더 위험한 벌집계좌만 극성
문제는 금융당국이 명시적으로 막은 적은 없지만 은행이 나서질 못한다는 점이다. 은행업은 규제산업이다. 일이 잘못될 경우 괜히 당국에 찍혀 불이익을 받을 수 있다. 금융당국의 암호화폐 거래소에 대한 기본 스탠스는 ‘질서있는 퇴장’이다. 수수료 몇 푼 벌자고 암호화폐 거래소가 영업할 수 있도록 가상계좌를 발급해 줄 이유가 없다.  
 
현재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발급받은 거래소는 빗썸ㆍ업비트ㆍ코인원ㆍ코빗 등 4곳에 불과하다. 금융당국의 규제가 나오기 전에 이미 발급받은 곳이다. 후발 주자들 가운데선 단 한 곳도 실명확인 가상계좌를 발급받지 못했다.

 
가상계좌 발급은 안 해주고 벌집계좌는 안 된다고 막았는데, 지난해 10월 사달이 났다. 법원이 암호화폐 거래소인 코인이즈가 거래 중단을 막아달라며 NH농협은행을 상대로 낸 ‘법인계좌의 입금정지 금지 가처분’ 신청을 받아들였다.  
 
NH농협은행은 지난해 8월 코인이즈에 거래 중단을 통보했다. 코인이즈가 실명확인 가상계좌가 아닌 법인계좌(벌집계좌)를 통해 고객 투자금을 받았기 때문이다. 돈줄이 막힌 코인이즈는 반발해 법원에 가처분 신청을 냈다. 행정지도에 불과한 자금세탁방지 ‘가이드라인’으로 영업을 막았다고 주장했다.

 
법원은 코인이즈 손을 들어줬다. ^가이드라인상 은행의 입금정지는 의무가 아닌 재량 사항인 점, ^은행이 코인이즈의 실명확인 가상계좌 서비스 이용 요청을 거절한 점, ^은행이 다른 암호화폐 거래소(빗썸 등)에 실명확인 서비스를 제공하는 점 등을 판단 근거로 들었다.

 
이 판결을 계기로 그간 음지에서 벌집계좌를 운영하던 중소형 거래소들이 양지로 나왔다. 후오비코리아 같은 메이저 업체도 벌집계좌를 쓰기 시작했다. 자신을 현직 개발자라고 소개한 ‘밍쓰(kk0704)’의 블로그(https://kk0704.blog.me/221399871604)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기준으로 원화 입금이 가능한 거래소는 60곳이 넘는다. 4곳을 빼고는 모두 벌집계좌로 돈을 받고 있다.

 
벌집계좌로 들어간 돈은 법적으로 고객의 돈이 아니라 거래소 돈이다. 은행의 관리ㆍ감독도 받지 않는다. 고객이 거래소 계좌에 있는 돈을 출금하고 싶어도 거래소가 안 해주면 방법이 없다. 무슨 기준인지 하루 출금액을 제한하기도 한다. 암호화폐 커뮤니티에는 “내 돈인데 사무실 찾아가 사정해서 받아왔다”는 등의 하소연이 넘쳐난다. 거래소가 하루아침에 고객이 입금한 돈을 들고 사라져도 이상할 게 없다. 
 
출처: 크립토코인스파이

출처: 크립토코인스파이

게다가 이들 거래소 대부분은 채굴형 거래소다. 자체 토큰을 발행해 시장의 성장에 따른 과실을 고객과 나누겠다는 명분을 앞세워 국내에서는 금지된, 사실상의 ICO로 수십억 원을 조달한다. 토큰을 발행해 투자금을 모으는 게 아니라 바로 거래소에 상장시키는 방식(IEO)을 동원한다. 고급 승용차를 경품으로 걸고 거래소 토큰의 매매를 부추긴다. 거래소 토큰이 해당 거래소에서만 유통되다 보니 가격 조작은 수시로 벌어진다. 법의 감시망을 벗어난, 사실상 온라인 도박장과 다름없다.
 
불법이 판을 치는데도 금융당국은 지난해 10월 법원 판결 이후로는 손을 놓고 있다. 금융감독원 관계자는 “투자자 보호가 우려되는 상황은 맞지만 암호화폐 거래소가 금융기관이 아니다 보니 우리가 손 쓸 방법이 없다”며 “은행이 아니라 거래소에 자금세탁방지 의무를 부과하는 법이 제정돼야 우리가 나설 수 있다”고 말했다. 제윤경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발의한 ‘특정 금융거래정보의 보고 및 이용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지난해 7월 상정돼 국회에 계류 중이다.

 
고란 기자 neor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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