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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 사랑이 식었다고 생각하는 중년 여성들에게

중앙일보 2019.01.03 13:00
[더,오래] 윤경재의 나도 시인(25)
북한산에서 바라본 2019년 새해 첫 일출. 김상선 기자

북한산에서 바라본 2019년 새해 첫 일출. 김상선 기자



해돋이
 
굳이 절실한 사랑은 바라지 않습니다
그냥 이-해한다고 말해주세요
사랑은 무지개처럼 아련해도
색깔의 갈피가 너무 많지요
하지만 이-해는 하나면 족합니다
뒤척였던 그루잠에서 깨어
수천억 번 찾아왔으면서도
싫은 내색을 한번 안 한 해돋이는
어디서든 그의 바닥을 딛고 일어섭니다
마침 그때란 새로운 선물을
세상 구석진 마음들에게 비추며
불쑥 솟아오릅니다
이-해의 끝이 곧 시작이라고 가리키면서
 
[해설]
상담하다 보면 남녀 간에 인식 차이가 크다는 걸 느낀다. 사람은 누구나 남에게 인정받기를 원한다. 그런데 남자는 이성이 아주 작은 친절이나 관심이라도 보이면 혹시 그것이 사랑이 아닐까 하고 기대를 건다. 여자가 보이는 친절과 관심은 실제로는 사회생활을 편하고 유리하게 이끌기 위한 지혜에 지나지 않는데도 말이다.
 
여자는 나름대로 일정한 우리의 경계를 정해놓고 안과 밖을 뚜렷이 구별한다. 우리 안에 포함된 사람에게는 지속적이고 변함없는 사랑을 기대한다. 그러나 우리 밖에 속하는 사람에게는 설령 어떤 친절과 관심을 보여주더라도 그 감정을 사랑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상대 남자가 스스로 착각할 뿐이다.
 
사랑 독점하려는 여자 vs 나누려는 남자
여자는 사랑을 독점하고 싶은 욕구가 있고 남자는 사랑을 나누고 싶은 욕구가 큰 거다. 이렇게 사랑이란 동일한 단어도 남녀마다 사람마다 그 색깔이 다르게 여겨질 수 있다.
 
상담실을 찾은 중년의 여자 환자가 마음이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한다. 그럴 때는 대부분 가족 문제인 경우가 많다. 요즘엔 시부모와 갈등보다 부부 문제가 대부분이다. 두 아이를 대학에 보낼 때까지는 몰랐는데, 막상 두 아이가 원룸을 얻어 나가고 나니 사업으로 바쁘다고 밖으로만 도는 남편이 원망스러워졌다고 한다.
 
그러다가 요즘에는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러워졌다. 휴대폰 비번을 바꾸었으며 통화를 화장실에 들어가 하곤 한다. 심지어 와이셔츠나 양복에서 평소와 다른 향수 냄새가 나는 것 같다. 말도 예전보다 퉁명스러워졌다. 최근에는 침대에서도 등을 돌리고 자는데 왠지 내외하는 느낌이 들었다.
 
상담실을 찾은 중년 여성 환자는 마음이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요즘엔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다면서 침대에서도 등 돌리고 자는데 왠지 내외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사진 pxhere]

상담실을 찾은 중년 여성 환자는 마음이 울적하고 가슴이 답답하다고 호소했다. 요즘엔 남편의 사소한 행동 하나하나가 의심스럽다면서 침대에서도 등 돌리고 자는데 왠지 내외하는 느낌이 든다고 했다. [사진 pxhere]

 
사실 몇 년 전부터 불면증·안면홍조에 가슴에서 불이 나고 등에서 땀이 솟는 등 갱년기 증상이 있었으나, 호르몬제를 처방받아 먹고 조금 개선됐다. 하지만 무심한 남편은 자기가 폐경이 되었는지 관심조차 없는 거였다. 그렇다고 갱년기 증상이 왔다고 말하기도 창피했다. 여성으로서 매력이 떨어질까 두려웠던 거다. 아랫배가 자주 뻐근하고 방광염 증상도 자주 생겼던 차에 남편을 멀리했던 게 후회가 됐다.
 
여고 동창 모임에도 나가보았으나 사는 형편이 다르다 보니 별일 아닌 거로 삐지고, 카톡 대화방에서도 자주 분란이 일어 공연히 심기가 불편했다. 그래서 몇몇 친한 친구하고만 지냈다. 특히 남편 문제는 아무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아 속으로만 끙끙 앓았다.
 
가만히 사연을 듣고 보니 딱히 불륜에 대한 증거도 없이 의심만 하고 있었다. 그녀는 문제를 해결하는 게 아니라 자기의 의심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있을 뿐이었다. 아직은 결정적 증거가 없어 남편에게 솔직하게 털어놓으라고 추궁할 형편도 못 됐다. 공연히 생사람 잡는다고 화만 돋우기 십상이었다.
 
혹시 남편 사진이 있냐고 물어보니 보여준다. 아주 호남형에 사교적인 모습이었다. 사업수완도 좋아서 경제적으로 성공했다. 여자들에게 인기가 많아 보였다. 그녀는 어떤 심각한 문제에 직면해 깊이 고민하고 일을 손수 풀어본 체험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지금에 와서 자신에게 이런 문제가 닥치니 억울하고 또 어떻게 풀어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막상 누군가와 의논한다는 게 자존심 상하고 더 두려웠다.
 
우리의 생각은 기분과 정서에 영향을 받는다. 부정적인 기분에 빠져 있을 때는 부정적 생각과 기억만 줄줄이 떠오른다. 특히 갱년기와 같이 신체의 변화가 심할 때는 정서적으로도 영향을 받는다. 그 수렁에서 빠져나오려면 누군가의 도움이 절실히 필요하다. 또 몸의 기운이 부족하면 더 심한 심리적 구렁텅이로 빠져들기 쉽다.
 
사람들은 이런 상태에 빠지면 자신의 감정을 근거로 주변 현상이나 사실을 판단하려 든다. 이런 걸 ‘정서적 추론’이라고 한다. 정확한 정보와 합리적 근거에 매달리기보다 자신의 감정에 호소해 자기 자신과 이웃, 미래에 관해 판단을 내린다.
 
나는 의사로서 그녀에게 남편과 담판을 져보라거나 뒷조사를 해보라는 충고를 해서는 안 된다고 본다. 자칫 문제를 확대하거나 있지도 않은 사건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오래 상담하다 보니 혹시 남편이 실수했더라도 여유를 갖고 지켜보는 게 더 좋은 결과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일단 자신이 스스로 어떤 감정에서 자유로워질 때까지 어떤 결정을 내리지 않는 편이 더 좋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두 가지 충고는 ‘흥분하면 진다’는 거와 ‘의심은 의심을 낳는다’는 거다. 인간의 뇌에는 편도체라는 위험 경고장치가 있다. 생명에 위해가 되는 자극이 들어오면 신경과 근육을 흥분시켜 싸울 것인지 도망칠 것인지 즉각적으로 판단을 내려 행동하게 한다. 아니면 죽은 척하게 한다. 이때 고차원의 이성적 판단을 하는 대뇌피질은 사고가 정지된다.
 
그녀는 지금 편도체가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다. 이때는 그냥 판단을 유보하는게 효과적이다. [사진 pixabay]

그녀는 지금 편도체가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다. 이때는 그냥 판단을 유보하는게 효과적이다. [사진 pixabay]

 
그녀는 지금 편도체가 지속적인 스트레스를 받는 상태다. 이때는 그냥 판단을 유보하는 게 효과적이다. 편도체에 반복적으로 각인된 기억은 없애려고 하면 할수록 더 생각이 나는 특징이 있다. 그러니 지우려고 애쓰지 않는 게 정답이다. 또 갱년기가 되어 여성호르몬 분비가 저하되면 ‘자기 통제력’이 약해진다. 전두엽의 이성적 판단력이 약해져 불안감이 불쑥불쑥 솟아난다.
 
여자는 사랑에 모든 걸 거는 경향이 있다. 또 자기가 준 만큼 되돌려 받으려는 욕구도 크다. 사랑도 변할 수 있다는 걸 잘 받아들이지 못한다. 그리고 그런 상황을 상처로만 여긴다. 
 
자신의 사랑이 자녀에게 향했을 때 남편에게 소홀했던 기억을 까맣게 잊었다가 남편만 남으니 새삼 사랑의 교환성이 두드러져 보인 것이다. 자신의 공허함을 남편에게서 보상받으려고 매달린 것이다. 그리고 삶에 완벽하지 못했던 어떤 죄의식을 타인에게 투사한 것이다. 자기는 허물이 없는 사람인데 남편이 변했고 죄를 지은 것만 같다는 의심이 든 것이다.
 
시간이 흐르듯 사랑도 흐른다
사람은 누구도 완전할 수 없다. 약간의 잘못은 곧잘 저지른다. 또 사랑이 삶의 전부는 아니다. 사랑은 삶의 일부분일 뿐이다. 시간이 흐르듯 사랑도 흐른다. 인간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역할이 바뀐다. 
 
딸이었다가, 여인이었다가, 부인이었다가, 며느리도 되고, 엄마도 된다. 그리고 시어머니도 된다. 그럴 때마다 자기 역에 맞는 마음가짐과 표정을 지어야 한다. 그런 건 변한 게 아니다. 바로 그때의 삶을 사는 것이다. 자신을 제대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그때 알맞은 자기 역할을 멋지게 해낼 수 있는 거다.
 
상담은 환자에게 이런 말을 곧이곧대로 할 수 없다는 데 어려움이 있다. 시간이 걸려도 스스로 깨달아 건강해지기를 바랄 뿐이다. 나는 이런 글을 통해 비슷한 처지에 빠진 분에게 하소연하고 싶다. 자신이 벗어날 수 없는 막다른 골목에 갇힌 것 같아도 잠시 여유를 가지면 바닥을 치고 올라설 기회는 반드시 온다.
 
윤경재 한의원 원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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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경재 윤경재 윤경재 한의원 원장 필진

[윤경재의 나도 시인] 시를 시인의 전유물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시쓰기를 어려워들 합니다. 그러나 시인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닙니다. 작품이든 아니든 시를 쓰면 모두 시인입니다. 누구나 그저 그런 일상을 살다가 문득 자신의 삶을 돌아보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그것이 오래 기억에 남는 특별한 체험이라면 감정을 입혀 쓰는 것이 바로 시입니다. 시인으로 등단한 한의사가 연재하는 시를 보며 시인이 되는 길을 가보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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