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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지옥'에 빠졌다며 즐거워하는 일본 번역가들

중앙일보 2019.01.03 07:00
[더,오래]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12)
『토지』 일본어판 8권 사진. [사진 양은심]

『토지』 일본어판 8권 사진. [사진 양은심]

 
박경리의 『토지』가 일본의 독자들에게 소개되고 있다. 마로니에북스에서 출판한 20권을 2016년부터 2022년까지 번역 출판하는 7개년 프로젝트. 박경리가 25년에 걸쳐 완성한 대하소설을 일본의 쿠온(CUON) 출판사 프로젝트팀이 완전 번역 출판에 도전하고 있다.
 
이전에도 『토지』 일본어판이 출판된 적은 있었다. 1980년대에 1부만 소개되었고, 2011년에는 청소년을 위한 다이제스트 판이 번역 출판되었다. 하지만 20권 완전 번역 출판은 첫 시도이며, 일본어판이 처음일지도 모른다. 지난 20년간 일본의 출판업계는 반으로 축소되었다고 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7년에 걸쳐 20권을 번역 출판한다는 것은 보통 열정으로는 해낼 수 없을 것이다. 그야말로 긴 장정이다.
 
지난해 12월 19일. 한국문학을 소개하는 책방 ‘책거리’에서는 쿠온출판사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모인 송년회가 있었다. 편집자, 교정자, 디자이너, 번역자, 인쇄소 등 관계자의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이었다. 자연스럽게 그들의 진력에 감사하게 되는 것은 나는 한국인이고 이곳은 일본이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藤井久子) 씨는 7년이나 걸리는 일을 완주할 때까지 체력이 따라줄까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만에 하나에 대비하여 '편집 방침 노트'를 만들어 번역자 및 관계자들과 공유하고 있다. 후지이 씨는 한일 문학 심포지엄 행사로 원주를 방문하기도 했었는데, 박경리 작가가 심포지엄 장에 인사차 들러 주었다고 회상하며 『토지』 일본어판을 편집하게 된 것에 대해 강한 인연을 느꼈다고 한다.
 
책거리 송년회. 쿠온출판사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양은심]

책거리 송년회. 쿠온출판사의 책을 만드는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사진 양은심]

 
『토지』 일본어판은 2016년 1·2권을 시작으로 2017년 3·4·5권, 2018년 6·7·8권이 출판되었다. 5부 20권 중 이제 2부까지 끝난 셈이다. 앞으로 12권, 아직도 갈 길이 멀다. 9권부터는 3인 체제로 번역에 들어갔다. 3명의 번역자를 소개한다.
 
먼저 요시카와 나기(吉川凪) 씨. 시미즈 치사코(清水知佐子) 씨. 9권부터 참가하는 요시하라 이쿠코(吉原育子) 씨. 요시카와 나기 씨는 김영하의 『살인자의 기억법』을 번역하여 2018년 번역대상을 받았다.
 
시미즈 치사코 씨는 『토지』 번역을 위해 만주기행을 하고, 한국문학 번역원의 초청으로 한 달 동안 서울에 머물며 한국을 체험하는 등 정열을 쏟고 있다. 9권부터 참가하게 된 요시하라 이쿠코 씨는 참가하자마자 '토지 지옥'에 빠졌다고 고충을 털어놓으면서도 빨리 다음 이야기를 읽고 싶어지는 작품이라고 감상을 말한다.
 
‘토지 지옥’이란 『토지』 일본어판 관계자들이 서로 고충을 털어놓으며 위로하는 말이다. 한국인인 나도 각 지방의 사투리가 어려웠는데 일본인이라면 얼마나 더 힘들지 알고도 남음이 있다. 하지만 그 말을 하는 관계자들의 얼굴에는 미소가 번지고 있었다.
 
일본어판 표지 이야기도 빠질 수 없다. 디자인을 담당한 가츠라가와 준(桂川潤) 씨는 중요문화재로 등록된 교토 만푸쿠지(萬福寺)의 철안판일절경(鉄眼版一切経) 판목(책판)에서 ‘土地’라는 글자를 가져왔다. 수년 전 기적처럼 판목의 일부를 샀는데 이번에 쓰게 되었다고 열심히 설명해 주었다. 신기한 인연을 느끼는 것은 나만일까?
 
쿠온출판사의 김승복 대표는 일본에서 출판사를 하게 되면 그 어떤 작품보다도 『토지』 일본어판을 출판하고 싶었다고 한다. 그는 먼저 2000년대 이후에 쓰인 작품을 번역 출판하며 일본 내에 한국문학이 받아들여질 분위기부터 만들어가기 시작했다. 2011년부터 7년 동안 ‘K-BOOK 진흥회’를 만들어 『일본어로 읽고 싶은 한국 책, 50선』이라는 책자에서 한국 서적을 소개하고 있다.
 
출판사 대표와 번역자 3명, 편집자의 모습. 왼쪽부터 김승복 대표와 번역자 시미즈 치사코 씨, 요시카와 나기 씨, 요시하라 이쿠코 씨, 그리고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씨. [사진 양은심]

출판사 대표와 번역자 3명, 편집자의 모습. 왼쪽부터 김승복 대표와 번역자 시미즈 치사코 씨, 요시카와 나기 씨, 요시하라 이쿠코 씨, 그리고 편집자 후지이 히사코씨. [사진 양은심]

 
이 책자는 출판사 편집자들에게 한국 서적을 소개하는 것이다. 하지만 자금 부족으로 내년부터는 종이 책으로는 못 내고 웹 사이트 공개에 한하기로 했다고 한다. 그리고 2017년부터는 『책 CHECK』이라는 독서 안내 책자를 만들고 있다. 이 책자는 일본 전국의 서점과 공공시설, 행사장 등에 배치되어 일본인들에게 한국문학의 존재를 알리는 데 기여하고 있다.
 
2018년 6월 30일. 도쿄에 있는 한국문화원에서 『토지』 일본어판 출판기념회가 있었다. 20권 중 6권까지 번역 출판한 시점이었다. 김승복 대표는 말한다. 출판 도중에 출판기념회를 연 것은 마지막까지 완주하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며 다짐이라고.
 
토지문화재단 이사장인 김영주 씨도 한국에서 날아왔다. 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와 중국어에서도 번역 출판이 진행 중이며, 러시아의 10개의 대학에는 『토지』를 연구하는 강좌가 개설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2018년 6월 20일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국립대학교에 박경리 동상이 세워졌다.
 
한국인과 일본인이 힘을 합해 진행하고 있는 ‘『토지』 일본어판 출판 7개년 프로젝트’ 일본에서 한국어와 한국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은 물론, 한국의 일어과와 일어일문학과가 있는 대학에도 필요한 책이 아닐까 싶다. 쿠온출판사에 예약 주문하면 출판되는 대로 받아볼 수 있다. 2022년이 기다려진다. 우선은 2019년 9권 10권 11권. 출판 관계자들의 건강과 건투를 빈다.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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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은심 양은심 한일자막번역가·작가 필진

[양은심의 도쿄에서 맨땅에 헤딩] 일본인과 결혼해 도쿄에 살림을 꾸린지 약 25년. 일본으로의 이주는 성공적이라고 자부한다. 한일자막 번역가이자 작가이며, 한 가정의 엄마이자 아내다. ‘한일 양국의 풀뿌리 외교관’이라는 기분으로 하루하루를 살아가고 있다. 한국보다도 더 비빌 언덕이 없는 일본에서 그 사회에 젖어 들고, 내 터전으로 만들어가는 이야기를 연재한다.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과 같은 이야기가 독자의 삶에 힌트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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