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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文정부, 이젠 민노총과 싸워야…지지층 기득권 깨야 나라 산다"

중앙일보 2019.01.02 01:50 종합 1면 지면보기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각자도생(各自圖生ㆍ제각기 살 길을 찾음).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 특별 인터뷰
경기 변동, 산업대전환 위기 겹쳐
정부는 인재 투자, 규제 혁파하고
노조·기업은 뼈 깎는 구조개혁을
생존 위한 몸부림이 출구 찾을 것

최저임금·52시간제·부동산세
목표만 뚜렷, 파장은 계산 안 해

디지털·아날로그세대 고용 갈등
사회 안전망 깔아 미리 막아야

문 대통령, 이념·가치 추구보다
현재의 문제 고치는데 주력을

‘위기 극복의 야전사령관’으로 불리는 이헌재 전 부총리의 신년 화두는 엄혹했다.  
이 전 부총리는 중앙일보와의 특별 인터뷰에서 “한국 사회가 대전환의 고통을 겪게 될 것”이라며 “1997년 외환위기가 왔지만 바닥은 98년이었다. 이번 경우 작년에 진행된 위기가 올해 바닥이기를 바란다”고 밝혔다.    
 

이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보다 더 극심한 위기가 덮칠지 모른다고 경고하면서도 “새까만 검은 색에 붉은 빛이 잉태돼있듯 위기 속에서 희망이 생긴다”며 ‘위기와 희망의 역설’을 말했다.  
 
각자도생은 위기에 직면한 국민 개개인이 정부와 타인에 대한 의존을 버리고 온갖 제약을 뛰어넘어 살아나가려는 몸부림이다. 창조적 도전이 여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이 전 부총리는 “위기를 몸으로 느낀 국민들이 각자도생의 각오로 출구를 찾을 것이며, 살기 위해 몸부림치는 개인들이 결국 사회를 바꿀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정부는 이런 국민들을 위해 사회안전망을 촘촘히 만들고 교육권을 보장해 각자도생의 밑바닥을 깔아야 한다”며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굶어죽을 일은 없다. 어느 아이든 건전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는 확신을 줘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사회 전 부문의 규제 혁파와 인재에 대한 국가적 투자가 일어나야 일자리 위기를 타개할 수 있다고 주문했다. 그는 “오늘날 실리콘 밸리에 수많은 일자리가 생겨난 것은 금융, 통신 등의 규제를 풀어버려 다양한 금융상품이 쏟아지고 투자자가 나오는 등 연쇄적 효과가 일어났기 때문”이라며 “각종 규제를 풀어 서로 경쟁하게 해서 승자와 패자들이 뛰어다니게 해야 일자리가 만들어진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를 맞은)1997년이 유동성과 기업의 문제였다면 지금은 경기변동상의 위기, 구조적 위기, 3차 산업에서 4차 산업 시대로 넘어가는 혁명적 위기가 중첩돼있는 한국 사회 전체의 문제”라며 “문제를 적당히 타협하다간 고통이 5년이 갈지, 10년이 갈지 아무도 모른다. 정책 당국자와 국민의 자세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한국 경제가 국가부도 직전까지 내몰렸던 외환위기 때와 같은 뼈를 깍는 구조 개혁 없인 전환기적 위기 극복이 요원하다는 것이다.
 
그는 특히 “정부는 민주노총ㆍ전교조ㆍ전공노와 경실련ㆍ참여연대 같은 몇몇 시민단체가 ‘촛불’을 주도했다고 생각해 끌려다니고 있다”면서 ‘우군과의 싸움’을 강조했다. 
 
그는 “촛불의 주역은 변화를 추구하는 중산층이다. 정부는 누구에게도 부채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면서 “사회 전체에 기득권이 너무 강해져 전 국민이 기득권화됐다. 그걸 깰 수 있는 용기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이 전 부총리는 “노동 문제에서 기업 구조조정까지 고통의 강도가 강할수록 빨리 좋아질 것”이라며 “새해는 그 고통이 바닥을 치면서 새살이 돋아나기 시작하는 해가 되길 바란다. 가능성은 있다”고 말했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이 전 부총리는 현재진행형인 한국 경제 위기의 본질을  꿰뚫고 있는 우리 사회의 대표적 원로로 꼽힌다. 20년 전 금융감독위원장으로 외환위기 극복의 야전사령관을 지냈고,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이란 정치적 혼란기에 경제부총리로 강한 리더십을 발휘해 경제를 안정시켰다.
  
지난해 연말 그와 두 차례의 직접 인터뷰와 서면 보충 인터뷰를 통해 지금의 경제 상황에 대한 진단과 해법을 들었다.  
 
그는 "우리 경제에 위기는 없다"고 강조했던 2017년 4월이나, "경제의 만성병을 고쳐야 한다"고 강조했던 2017년 말에 비해 위기감이 한층 강했다. 
다음은 일문일답.  
 
“올해의 고통은 1998년 수준”
 
-새해를 어떻게 전망하나.  
“북한에서 ‘고난의 행군’이란 단어를 많이 쓰던데, ‘전환의 고통’을 겪어야 할 거다.”
 
-어느 정도로 경제가 우려되기에 이런 말을 하는 건가.
“외환위기 당시의 1998년과 비슷한 상황이 될 거다. 위기는 97년에 터졌지만 고통은 98년에 가장 심했다. 문제는 이 고통이 10년 갈 건지, 20년 갈 건지를 아무도 모른다는 거다. 52시간제 같은 문제를 적당히 타협하며 넘어가려다 보면 아마 고통이 굉장히 심해질 거다. 경제가 더 어려워질 거다.”

 
-새해 메시지로는 너무 암울하다.
“현학적이긴 하지만 밝을 현(炫)이라는 한자가 있다. 불 화(火)와 검을 현(玄)이 합친 글자다. 굉장히 어두운 시기는 동시에 희망을 품고 있다. 칠흑 같은 검은 색이 붉은 색을 품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올해가 오히려 기회가 될 수도 있다는 얘긴가.  

“기회까지 바라기는 무리다. 올해 고통이 바닥을 치길 바란다. 고통을 겪지 않으면 전환이 길어진다. 노사 문제에서부터 기업체 구조조정에 이르기까지 고통의 강도가 강할수록 전환이 빨라질 거라고 본다.”

 
-외환위기와 무엇이 다른가.
“그때는 유동성이나 기업의 문제라면 올해는 우리나라 사회 전체의 문제다. 국민들은 촛불을 통해 변화의 의지를 표시했다. 각계 각층이 촛불에 자기 염원을 담았다. 변화의 의지다. 그런데 지금 그 변화의 의지를 각자 해석한다. 그것이 그 다음으로 나가고 있느냐에 대한 절실한 반성이 있어야 한다.”
 
-많은 국민들이 불안해한다. 외환위기 때보다 더 앞이 안 보인다는 이야기도 많다.  

“불안한 마음은 어찌 보면 좋은 신호다. 우리 국민이 살아있다는 얘기다. 3만5000년 전을 한번 생각해 보자. 가족을 데리고 있는 원시인 가장이 불안했을까, 안 불안했을까. 사방이 적이고, 어느 곳에서 뭐가 튀어나올지 모른다. 늘 불안해하면서도 먹이를 찾아 밖으로 나간다. 지금 우리 국민들이 불안한 것도 같은 이유다. 익숙한 것들이 작동을 멈췄다. 변화는 오는데 방향은 알 수 없다. 불안한 와중에 다들 직감적으로 알고 있다. 먹이를 찾으려면 움직여야 한다는 걸.”
 
-결국 개인이 답을 찾을 거라고 보는 건가.  
“출구를 찾을 거다. 더는 정부를 믿고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다들 느끼고 있다. 지난해 경제 성장률 전망치가 2%대 중반으로 떨어진 것이 오히려 다행이다. 만약 2%대 후반으로 선방했다면 상황이 더 나빠졌을 거다. 정말 잃어버린 20년, 30년으로 전락할 수 있었을 거다.”
 
-경제가 나빠져서 오히려 다행이라니.
“사람들이 위기를 몸으로 느껴야 한다. 그래야 스스로 서겠다는 생각을 한다. 국가가 삶을 책임져주는 게 아니다. 국가가 주는 최저생계비로 살 수 있느냐, 스스로에게 물어야 한다. 국가 재정으로 어떻게 될 거라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 재정은 허구다. 돈이 나가기 시작하면 걷잡을 수가 없다. 복지 지출이 늘기 시작하면 지출을 위한 비용은 더 빠르게 증가한다. 그런 식으로는 문제 해결이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문제를 해결해야 하나.
“요즘 베트남에 파병가던 이들이 생각난다. 베트남에 가겠다고 자원해 줄을 서던 이들이 바로 각자도생을 택한 거다. 나라만 믿고 있다가 어떻게 우리 가족이 입에 풀칠하느냐는 심정이었을 거다. 그렇게 나간 이들이 뭘 들고 돌아왔나. 더플백 두개다. 거기 꽉 찬 면세품이 국제시장에서 풀렸다. 그걸 팔아 가족이 먹고 살았고, 국가는 공급이 늘었다. 물가가 안정된 거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고용 없는 성장… “정부, 우군과 싸워 기득권 걷어내야”
 

이 전 부총리는 외환위기 및 그 극복과 관련해 "만약 경제가 그때 안 부서졌다면 오늘날의 삼성·SK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온 사회가 그때 치른 것의 수십배 비용을 치뤘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이번에도 마찬가지로) 적당한 타협은 안된다. 문제를 모두 드러내놓아야 해결이 된다"고 말했다.  
 
-그 정도로 경제가 어렵지는 않다고 보는 이들도 있다. 대통령도 ‘거시 지표는 견고하다’고 표현했다.  
“고용이 전혀 창출되지 않고 있다. 거시 지표를  살피는 이유가 뭔가. 그 자체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게 고용ㆍ물가와 연동되니 의미가 있는 거다. 그런데 지금의 거시 지표는 고용과 전혀 연결이 되지 않는다. 과거 산업에 바탕을 둔 고용과 영세 사업, 술집, 음식점, 커피점, 편의점 등이 전부 정체에 빠져있다. 정부 정책 자체가 그걸 가속화하는 방향으로 가기 때문에 경제가 거의 질식 상태에 빠져있는 상황이다.”
 
-정부가 최근 내놓은 정책들에 비판이 끊임없이 나오는데.
“정책의 파장을 계산하는 이들이 없다. 최저임금제와 52시간제, 부동산세 정책이 모두 같은 모양새다. 부자를 옥죄겠다는 목표 하나만 분명하다. 정책은 단순하지 않다. 결과(consequence)와 파장(subsequence)을 정교하게 계산해야 한다. 사람에게 움직일 틈을 줘야 한다. 최저임금은 고용주가 움직일 틈을 주지 않고 얽어맸다. 부동산세는 건물주가 임대료를 올리는 것 외에 다른 수단이 없게끔 만들었다. 양도소득세 중과는 국민의 궁핍화 정책이다. 한 가장이 5억원 주고 산 집이 9억원이 됐다 치자. 그걸 팔고 이사를 가려면 이익의 반을 내놔야 한다. 그럼 기존에 살던 수준의 집을 살 수가 없다. 집값은 다같이 올랐으니까. 이렇게 파장을 계산 못한 정책들이 수두룩하게 나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이 최근 “산업 정책이 없다는 비판에 대해 뼈아픈 자성이 필요하다”고 말했는데.  
“구시대적이다. 답답함을 느낀다. 산업정책은 박정희 시대의 산물이다. 산업정책이란 게 무슨 산업을 육성할 건지 정부가 정한다는 것이다. 기준을 만들고 지원받을 기업을 선정해 자금을 배분한다. 정부가 기업보다 아는 것이 많을 때 산업정책을 펼칠 수 있다. 지금은 어떤 산업이 더 나아질지 누가 알 수 있는가. 우선은 산업의 경계 자체가 허물어졌다. 토스는 금융업인가 IT업인가. 배달의민족은 물류인가 IT인가. 개인이 좋은 기업을 키울 수 있도록 돕는 게 정부가 할 일의 전부다.”
 
-결국 아래로부터 문제를 풀어야 한다는 건가.
“그렇다. 주택 문제도 마찬가지다. 최근 정부가 3기 신도시를 발표했는데, 그 역시 구시대적이다. 이전의 대통령들이 해온 일을 답습한 거다. 신도시를 만든다고 지금의 주택 문제가 해결될까. 서울 도심은 계속 낡아가는데 사람들이 외곽으로 빠져나가면 어떻게 될까. 지금은 도시 재생에 관심을 가질 때다. 도시 재생을 내셔널 프로젝트로 삼고 이에 참여할 개인들을 지원하는 게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한다.”
 
-어느 정부나 규제를 없애겠다고 하지만, 규제가 눈에 띄게 없어진 적이 없다.
“규제는 기득권을 지키겠다는 몸부림이다. 사회 전체에 기득권이 너무 강해지고 있다. 전 국민이 기득권화됐다. 정부가 표로 얻은 기득권이나 노동자가 투쟁을 해서 얻은 기득권이나 마찬가지 기득권이다. 온 사회가 기득권에 매달리면 변화가 없다.”
 
-왜 기득권이 점점 강해지고 있다고 생각하나.
“정부가 우군과 싸우지 못해서다. 역대 성공한 정권은 우군과 싸움을 벌여 이겨냈다. 김대중(DJ) 대통령은 최소한 아주 격렬하게 대화할 준비가 되어있었고, 그걸 극복해나갈 각오까지 되어 있었다. 지금은 정부가 몇몇 기득권 무리를 우군을 넘어 동지로 인식하고 있다. 싸움을 못하고 끌려다니고 있다. 촛불을 누가 일으켰는가. 이 답에 따라 정부의 설 길이 달라진다. 그걸 민주노총·전교조·전공노와 경실련·참여연대 같은 시민단체가 주도했다고 생각하면 정부가 끌려다니게 되는 거다. 나는 촛불의 주역은 중산층이라고 생각한다. 정부는 누구에게도 부채 의식을 가질 필요가 없다는 얘기다.”
 
-시민단체나 민노총 등과 맞서야 한다는 건가.
“이들과 정면으로 싸우고 넘어가야 창조적 비즈니스 환경을 만들 수 있다. 이들의 기득권을 털지 않으면 나라가 한 걸음도 앞으로 못 나간다. 1981년 미국에서 공항 관제사들이 임금을 올려달라고 파업한 적이 있다. 레이건 대통령이 그 사태를 어떻게 대처했나. 48시간 복귀 명령에 따르지 않은 1만1000여명을 파면했다. 그 정도 용기가 있어야 사회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거다. 기득권이라는 게 엄청난 게 아니다. 예순살 택시 운전사가 쥐고 있는 개인 택시 면허증, 그게 기득권이다. 그걸 놓으라고 하는 게 가혹해보이지만, 그걸 넘어서지 못하면 사회가 앞으로 나가질 못한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어떻게 그 기득권을 놓게 할 수 있을까.
“사회 안전망이 기득권보다 더 안락하게 여겨지면 기득권을 놓게 돼 있다. 정부가 줘야 할 메시지는 세 가지다. 대한민국에서 태어나면 굶어죽을 일은 없다. 크건 작건 방 한 칸은 마련해준다. 그리고 어느 아이든 건전한 성인으로 자랄 수 있다. 사회안전망과 주거·교육권을 확실히 보장하면 사람들이 기득권에 매달리지 않을 거다."
 
“나라가 일자리 못 늘린다, 개인을 키워라”
 
-일자리와 관련한 해법이 있을까.
”국가가 일자리를 주는 시대는 지났다. 규제와 기득권을 풀어버리면 각자도생을 하는 사람들이 뛸 것이다. 전환을 오히려 앞당겨야 한다. 다들 4차 산업혁명 때문에 일자리가 사라진다고 한다. 사라지는 일자리만 쳐다봐서 그렇다. 그 다음 일자리의 가능성을 보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 은행의 디지털 전환이 더 진행된다고 치자. 은행 창구에 앉아있는 인력은 줄겠지만, 뒤에서 시스템을 개발하고 컨설팅을 하는 사람은 늘어난다. 사라지는 일자리만 보고 이런 전환을 막으면 어떻게 될까. 아무리 막아도 은행 창구는 언젠가는 없어진다. 국내에선 시스템 개발 역량이 크지 않아 그 일은 해외에 넘어가게 된다.”
 
-사라지는 일자리만큼 새로 일자리가 생길 수 있을까.
“새로운 일자리가 더 많이 생길 수도 있다. 디지털 사회로 얼마나 적극적으로 옮겨타느냐에 달려있다. 제레미 리프킨도 말했지만, 스마트 시티를 구축하고 인공지능과 로봇을 중심으로 사회 시스템을 바꾸려면 향후 수십 년 동안 일자리가 늘어난다. 문제는 업종 및 세대 간 갈등이 심해질 거란 점이다. 택시 운전사와 공유 차량 운전자, 디지털 세대와 아날로그 세대 사이에서 직업의 기회가 달라진다. 그런 고통이 세대 간 싸움으로 번질 거다. 마치 미국 중서부 지방의 60대들이 트럼프 대통령을 당선시킨 것처럼. 이 때문에 사회 안전망을 깔아두는 것이 중요해진다.”
 
-청년을 위한 일자리 대책은 필요하지 않을까.
“지금 국가가 특정 분야에 일자리를 늘려 청년들을 보내는 게 그들의 앞길에 과연 도움이 될까. 5년 뒤에 그 산업이 어찌 될지 누가 알겠는가. 지금 일자리를 준다는 게 오히려 그 사람을 망쳐놓을 수도 있다. 개인에 대해 투자하자고 하는 게 그래서다. 정책은 밑바탕을 깔아주고, 각자도생하며 움직여나가는 사람들이 길을 찾도록 해야 한다. 실리콘밸리에 그 많은 일자리가 생길 거라고 20년,  30년 전에 생각한 사람이 있을까? 산업정책을 썼기 때문에 실리콘밸리가 조성된 게 아니다. 규제를 풀고 개인이 마음껏 실험할 수 있도록 키워주는 게 최선의 일자리 대책이다.”
 
-개인을 어떻게 키워야 한다는 건가.
“사람에 투자하는 건 생각보다 돈이 많이 들어가지 않는다. 단순히 1년에 1만명을 뽑아 각 1억원을 투자한다고 해보자. 그래 봤자 1조원이다. 5년 동안 매년 2만명을 뽑아 밀어준다고 해도 10조원이다. 이걸로 정책 실험을 했으면 좋겠다. 우리 기업이 연구개발(R&D)하느라고 실험을 많이 하는데, 정부는 실험을 안 한다. 100명, 200명을 뽑아놓고 정책 실험을 벌이는 거다. 국가적 문제를 풀기 위한 프로젝트를 벌여놓고, 이런 인재들에게 문제 해결을 맡기는 거다.”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이헌재 전 경제부총리가 서울 필운동 사무실에서 인터뷰하고 있다. [사진 여시재]

 
-국가 프로젝트라면.
“케네디가 1961년에 '인간을 달에 보내겠다'면서 시작한 아폴로 프로젝트(Apollo Project)가 대표적이다. 원래는 소련의 우주선 기술을 견제하려고 시작한 프로젝트이지만, 이 프로젝트 덕분에 인터넷을 비롯해 엄청난 기술 진보가 일어났다. 오바마 정부가 뇌의 지도를 그리겠다고 시작한 ‘브레인 이니셔티브’도 좋은 예다. 이를 통해 바이오테크놀로지가 엄청난 도약을 이뤘다. 우리나라도 그런 노력이 필요하다. 시기적으로는 도시 재생사업 같은 게 좋은 프로젝트가 될 거라 생각한다.”
 
-도시 재생을 국가 프로젝트로 삼자는 건가.
“미래 도시 프로젝트를 시작하는 거다. 지금 우리의 도시가 대부분 낡았다. 산업화 시대의 도시라 미래에 맞지 않는다. 이를 어떻게 고칠 것이냐를 두고 개인들의 실험을 장려해보는 거다. 각 분야에서 실험을 하게끔 지원해주면 민간 시장과 반응해 연쇄 실험이 일어날 거다. 이렇게 미래 도시와 관련한 노하우를 쌓으면 이를 수출할 수도 있다. 중국은 도시화되지 않은 땅이 엄청나게 넓다. 이런 곳에 미래형 도시를 설계해줄 수 있는 거다.”
 
-개인을 키우자는 주장에 DJ 정부 시절의 ‘신지식인’ 프로젝트가 떠오른다.  
“아래로부터의 변화를 강조했다는 점에서 좋은 프로젝트였다. 당시 몇몇 스캔들이 터지면서 프로젝트 전체가 힘을 잃었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 실리콘밸리에서 투자받는 창업가 중 28%는 결국 사기꾼으로 밝혀진다는 통계가 있다. 일부에게서 문제가 밝혀진다 해도 개인을 키우겠다는 기조를 유지해야 한다. 사기는 원래 두 번, 세번 거듭해서 못친다. 사회만 건강하면 사기꾼은 저절로 걸러진다.”
 
"대기업은 어차피 깨진다" 
 
-대기업의 활력이 예전 같지 않다. 최근의 산업과 기술 변화를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지난 2004년 이헌재 경제부총리(왼쪽)와 조윤제 경제보좌관(현 주미 한국대사)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과제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지난 2004년 이헌재 경제부총리(왼쪽)와 조윤제 경제보좌관(현 주미 한국대사)이 청와대에서 열린 국정과제회의에 앞서 대화하고 있다. [중앙포토]

“대기업이 혁신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경영 승계 과정에서 많은 기업이 관료화됐다. 혁신이라는 단어 자체가 위에서 아래로 변화를 주도한다는 뜻을 품고 있다. 한계가 있다. 개인이 변화를 일으켜야 한다. 나는 그걸 창신(創新)이라고 부른다.”
 
-대기업 중심주의를 깨야 한다는 건가.
“혁명을 하자는 게 아니다. 기존 질서를 깨고 대안을 만들자는 게 혁명이다. 대기업 체제는 어차피 깨진다. 적응성의 한계 때문이다. 일부러 부수려고 사회적 비용을 들일 필요가 없다. 새로운 힘이 튀어오르면 기존의 것이 자연히 무너진다. 봄이 되면 겨울이 물러가는 것과 같다.”
 
-그 새로운 힘이라는 건 뭔가. 스타트업인가.  
“우리나라도 유니콘(자산 가치 1조원 이상의 스타트업)들이 탄생하고 있다.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보려고 몸부림을 치고 있다. 그런데 기득권 체제가 너무 강하다. 땅을 너무 단단하게 다져놓으니 악을 쓰고 뚫고 나오려는 이들이 솟아나오지 못하고 있다. 기왕에 심겨진 나무들에만 꽃이 피는 형국이다.”
 
-외환위기 당시엔 구조조정을 통해 대기업 부실을 정리하고 경쟁력을 강화했다. 지금 경쟁력을 잃어가는 대기업들도 구조조정이 필요한 게 아닌가.
“그 당시엔 이미 시장이 다 부서져있었다. 어쩔 수 없이 실시한 외과 수술이 구조조정이었다. 지금은 국가가 나서 인위적 구조조정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일단 국가가 기업을 수술해 경쟁력을 강화한다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산업 구조가 엄청난 속도로 변하지 않나. 우리가 가진 경쟁력 중 어떤 것이 미래에 강화돼야 할지, 실리콘밸리·중국과 비교해 어느 부분이 더 강점이 있는지를 정부가 알지 못한다. 수술이 다급한 일부 기업은 구조조정을 도와줘야겠지. 나머지는 시장에 맡기면 된다. 살아남지 못하면 죽고, 살아남으면 발전할 거다.”
 
-집권세력에서 재벌 2, 3세가 최고경영자(CEO)에서 이사회 의장으로 물러나야 한다는 얘기가 나오는데. 
“CEO와 이사회 의장이 뭐가 다른가. 법적으로도 법인을 대표하는 것이 이사회인데, 실질적으로 그 기업의 최종 의사결정을 내린다는 점에서 큰 차이가 없는 자리 아닌가. 아무 직함이 없어도 기업을 실질적으로 지배하는 것이 그들이다. 공정거래위원회는 투명성을 따지면 된다. 준법 감시를 철저히 하고 투명성을 높여서 총수가 부당한 이득을 못 가져가게 감시하면 되는 거다. 그럼 각자가 능력에 따라 경영을 할 거고, 경영이 도저히 안되면 물러나게 될 거다.”
 
-한국 경제가 지금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까. 
“우리 국민은 저력이 있다. 지난 100년 간 해방과 전쟁을 겪고, 경제를 일으켰다. 두려워 말고 견뎌야 한다. 피난민들이 세운 판자촌을 생각해봐라. 산꼭대기 빈 땅에 판자로 집 한칸을 지었다. 거기에 시멘트 벽돌을 덧대고 슬레이트 지붕을 올려가며 살림을 일으켰다. 이런 정신으로 전환기를 이겨낸다면, 다시 활발한 움직임이 생길 거다. 우리나라는 모두가 일류가 되려고 몸부림치는 사회다. 그게 각자도생의 핵심이다. 일류가 되려고 하는 게 뭐가 나쁜가. 다같이 삼류가 되자고 끌어내리지만 않으면 된다."

 
만난 사람=이상렬 경제 에디터, 정리=임미진 기자(폴인 팀장) isa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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