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침실에 물 새는 산막…한순간에 심란함 사라진 이유

중앙일보 2018.12.30 09:00
[더,오래] 권대욱의 산막일기(19)
또 한 해가 간다. 산막엔 하얗게 눈이 왔다. 탈도 많고 허물도 많은 우리네 삶, 그 흔적들을 순백의 순결로 덮어준다. 그러니 서설(瑞雪)이요, 아름답다 말하겠다. 산막은 언제나 좋은 곳. 세상이 힘겹고 삶이 우리를 속일 때나, 기쁜 일 있어 나누고 싶을 때도 우리는 산막으로 간다.
 
눈 덮인 산막은 고즈넉하고 장작 난로가 타고 따뜻한 외로움이 있어 좋다. 달빛에 서러움 있고 별빛엔 그리움 있어 더욱 좋다. 궁극의 서러움은 희망일지니 오늘 밤 나는 이곳에서 밝아올 새해를 뜨겁게 맞으려 한다.
 
우리는 모두 눈 덮인 산막을 하나씩 가슴에 품고 산다. 산막은 있는 그대로 학교다. 애써 공부하려 하지 않고 애써 가르치려 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스승이요, 학생이라 참 많은 것을 가르친다.
 
눈이 내렸다. [사진 권대욱]

눈이 내렸다. [사진 권대욱]

 
한겨울 찬바람 쌩쌩 부는 겨울은 가지치기 좋은 계절이다. 잎새 다 떨군 앙상한 가지들은 군더더기 없는 진실. 나는 집 주변 관리되지 않은 잔가지들을 쳐내고 자르고 옮겨 화덕 옆에 모은다. 무어라 다 쓸모가 있겠거니와 사람이 자기 편의로 그러는 것이니 너무 허물치 말라.
 
원두막 높이 앉아 빈 들판을 바라보니 적막강산 찬바람 속에 겨울은 제자리. 찬바람 여린 햇살 속에서도 나는 봄을 본다. 도원(桃園)을 본다. 겨울은 그래서 좋다. 모두 비워진 후의 기다림. 더 비울 수 없는 극한. 오로지 희망만이 있는 순수. 이곳에 올 때마다 배움이 깊다.
 
산막에 2주 만에 돌아와 보니
2주 동안이나 못 왔고 그 주도 못 올 일정이라 어느 날 밤 혼자 갔다. 기백이도 보고 싶고 산막도 궁금하고 그래서 한밤에 오긴 왔는데, 산막 앞 눈길에 차가 미끄러져 논두렁 쪽으로 기울어 한 바퀴가 허공 제비를 하니 움직일 수가 없다.
 
포기하고 집에 들어왔더니 이건 또 무슨 일인가. 방은 냉골이고, 물은 얼었는지 나오지 않고, 아래층 쪽방(침실) 천정에서 물 뚝뚝 떨어지고, 서생원 한 분 영면해 계시고…. 참으로 심란, 정말 심란했다. 물이 안 나오니 씻을 수가 있나, 밥해 먹을 수가 있나, 화장실도 사용할 수 없다.
 
침실 천정에서 물이 샌다는 건 2층 어딘가 누수가 있다는 이야긴데, 누수 지점 확인하는 것도 만만치 않고 설사 확인한다 하더라도 이 엄동설한에 어찌 고친단 말인가. 물이 안 나온다는 건 얼었든지 아니면 모터 쪽 이상이 있든지 둘 중 하나일 텐데. 얼었다면 이곳 특성상 내년 3월 말은 돼야 녹을 테니 그때까지 물 못 쓰면 어쩐단 말인가. 생각이 생각을 낳고 심란이 심란을 낳다 보니 머리가 복잡하고 잠도 안 올 것 같았다.
 
그냥 돌아갈까 생각하니 차가 없고, 누수 원인도 밝히지 못하고 그냥 가면 그 불안 어찌할 것인가. 참 심란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에라 어쩔 수 없다. 날 밝을 때까지 기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니 기다려보자. 이렇게 마음먹는 순간 갑자기 마음이 차분해지고 편안해졌다.
 
피할 수 없으면 즐기라는 말이 실감 났고 마음을 내려놓으니 모든 부정적 마음이 긍정으로 확실히 바뀌었다. 차는 긴급출동 연락하면 될 것이고, 물 끊긴 원인은 내일 아침 찾아 고치면 될 것이고, 얼어붙어 어쩔 수 없다면 내년 봄까지 기다리면 될 것이다. 2층 물새는 원인도 찾으면 될 것이고 정석대로 고치면 된다.
 
독서당에서의 사색. [사진 권대욱]

독서당에서의 사색. [사진 권대욱]

 
난로 지피고 양동이 받혀놓고 낙수 소리 자장가 삼아 정말 잘 잤다. 아주 푹 자 버렸다. 그날도 큰 깨달음을 얻었다. 사람 사는데 많은 것 필요 없다는 것. 물 한 바가지로 정말 많은 것 할 수 있다는 것. 우린 너무 많은 것에 익숙해 고마움 모르고 살았다는 것. 처처에 가르침이요, 이 세상 모든 것이 스승이라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볼 수 있는 힘, 그것은 긍정이라는 것. 긍정하는 마음이 모든 것을 바꾼다는 것. 모든 것이 마음이라는 것.
 
모두 바쁘다 하고 바빠서 여유 없다 하니 그런 줄은 알겠지만, 한가함은 바쁜 중에 오고 바쁨 속의 한가함을 볼 수 있어야 비로소 한가함의 진수를 보는 것이리라. 무엇 때문에 우린 그리 바쁜가. 학생은 시험 봐 좋은 성적 내려 바쁘고, 사업가는 돈 버느라 바쁘고, 관리는 영전하기 위해 바쁘고, 부모는 자식 때문에 바쁘고, 자식은 앞날 때문에 바쁘다.
 
우리는 왜 이리도 바쁜가. 쓸데없는 일로 바쁘지는 않은가. 남이 해야 할 일 대신하느라 바쁘지는 않은가. 남이 원하는 모습 되기 위해 바쁜 것은 아닌가. 한 번쯤 진지하게 생각해 볼 일이다.
 
손님 치른 후 뒷정리를 마치고 원두막 높이 앉아 ‘산 기운 지는 해 더욱 아름답고 나는 새집 찾으니, 이 참다운 삶의 의미 말하려야 이미 말을 잊는다’는 도연명(陶淵明) 시의 한 구절을 읽노라면, 삶이 이럴진대 나 또한 참 쓸데없는 일로 바쁘다 하며 살았다 싶어진다.
 
마음이 돌아갈 곳 있다는 건 축복
이제 겉치장뿐인 바쁨은 뒤로하고 돌아보며 살 때도 되었건만 무슨 미련 그리 많아 떨치지 못하는가. 속세를 벗어나 산림에 은거하라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바쁜 와중에도 마음이 돌아갈 곳을 찾으라 말하는 것이니. 마음 돌아갈 곳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큰 축복임을 다시 느낀다.
 
고요함 속에서 사물의 움직임을 보고 한가로움 속에서 바쁨을 보아야 비로소 티끌 속세를 벗어난 정취를 느낄 수 있다. 바쁜 가운데에 한가함을 얻어내고 시끄러움 속에서도 고요함을 능히 취할 수 있어야 이것이 곧 안신입명의 공부이다. 오늘 산막의 석양과 새소리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한다.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 그것은 참으로 큰 축복임을 다시 느낀다.
 
밑불이 충실하면 커다란 통나무도 활활 탄다. 조직도 같다. 열정의 밑불이 살아 있을 때 통나무와 같은 화두조차도 활활 태울 수 있다. 그러니 나 같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이겠나. 그 밑불이 꺼지지 않을까 늘 깨어 있어야 하고, 혹이라도 염려되면 보아라, 나 같은 사람도 이렇게 타고 있지 않은가.
 
산막의 별 헤는 밤. [사진 권대욱]

산막의 별 헤는 밤. [사진 권대욱]

 
한 겨울밤 부서지는 달빛을 본 적이 있는가. 바람에 스치는 별을 본 적이 있는가. 산막에는 달빛 선연하고 숨은 별은 바람에 스친다. 흰 서리 내린 듯 하얗게 빛나는 산하. 나는 떨치고 나와 차라리 모든 인위의 불을 끄고 선연한 달빛을 벗 삼는다. 독서당이라 꼭 책을 읽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어스름 달빛 어린 산하를 바라보며 저 달은 어디서 왔는가, 나는 누구인가. 그 근본을 생각함도 못지않을 것이다. 무슨 대답이 있겠는가. 그저 성심으로 사는 것 외엔.
 
나의 꿈은 끝나지 않았다. 그 꿈 끝나는 날, 그날이 내 죽는 날이라 생각하며 오늘도 나는 꿈꾼다. 바이칼에 가고 싶은 꿈, 바다에 살고 싶은 꿈, 방송인이 되고 싶은 꿈, 회사를 키우는 꿈….
 
이런 꿈들이야 꾸고 이룰 수 있어 좋겠다만 이루지 못할까 두려워 꾸지조차 못하는 꿈이 하나 있으니 세상으로부터 자유롭고, 나로부터 자유롭고, 그 무엇으로부터도 자유로운 대자유의 꿈, 무애의 꿈이 바로 그것이다. 이루지 못한다. 꿈조차 꾸지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래도 두렵다. 이루지 못할 꿈. 그러니 무슨 답이 있겠는가. 그저 성심으로 사는 것 외에.
 
산막은 스승이다. 오늘도 많은 것을 말없이 가르친다.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theore_creato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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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대욱 권대욱 ㈜휴넷 회장·청춘합장단 단장 필진

[권대욱의 산막일기] 45년 차 직장인이자 32년 차 사장이니 직업이 사장인 셈이다. 일밖에 모르던 치열한 워커홀릭의 시간을 보내다 '이건 아니지' 싶어 일과 삶의 조화도 추구해 봤지만 결국 일과 삶은 그렇게 확실히 구분되는 것도 아니고 애써 구분할 필요도 없음을 깨달았다. 삶 속에 일이 있고 일속에 삶이 있는 무경계의 삶을 지향하며 쓰고 말하고 노래하는 삶을 살고 있다. 강원도 문막 산골에 산막을 지어 전원생활의 꿈을 이뤄가고 있다. 60이 넘어서야 깨닫게 된 귀중한 삶과 행복의 교훈을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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