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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권력과 언론의 불협화음, 그리고 진실 추구

중앙일보 2018.12.27 00:23 종합 33면 지면보기
하재식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하재식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올해 인상 깊었던 보도사진을 꼽으라면 미국 뉴욕타임스(NYT) 10월 28일 자 1면에 실린 7세 예멘 소녀 아말 후세인을 1순위에 놓고 싶다. 영양실조로 갈비뼈가 앙상히 드러나고 기력을 잃은 채 처연히 한쪽 벽면을 바라보던 소녀는 보도가 나간  며칠 후 세상을 떠났다. NYT 기자 타일러 힉스가 찍은 아말의 마지막 모습은 전쟁의 참상 그 자체를 생생하게 보여줬다. 예멘 내전으로 1400만 명이 기아 상태에 빠졌고, 지금까지 8만5000명의 어린이가 아사했다. 어떤 이념과 이익이 어린이들의 죽음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아말의 사진이 보도된 뒤 비난의 화살은 예멘 정부 편을 들어 예멘 민간인을 무차별 공습한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로 향했다. 사우디에 무기를 팔며 이익을 챙긴 미국 역시 궁지에 몰렸다. 민주당 상원의원 딕 더빈은 “아말은 우리가 했던 외교정책 결정의 비참한 모습”이라고 탄식했다. 이 사진은 지난 10월 터키 주재 사우디영사관에서 살해당한 사우디 반체제 언론인 자말 카슈끄지 사건과 맞물리면서 국제사회 여론을 움직였다. 이후 유엔이 예멘 정부와 반군 간의 휴전을 촉구했고, 양측은 13일 구호물자 반입을 위해 예멘 항구도시 호데이다에서 군대를 철수하기로 합의했다.
 
사진기자 힉스는 언론계의 노벨상인 ‘퓰리처상’을 두 차례 받았다. 그는 최근 NYT 팟캐스트에서 “모든 사람이 아말 사진을 보도하는 데 동의했던 것은 아니었다”고 설명했다. 죽어가는 아이를 대상으로 사진을 찍은 그를 도덕적으로 비난하는 목소리도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를 움직인 건 진실이 가져올 인류의 ‘선한 움직임’에 대한 믿음이었다. 아말의 부모는 힉스 기자에게 예멘의 비극을 세상에 전해달라고 간절히 호소했다.
 
이와 관련해 지난 11월 NYT 독자란에 실린 미국 오레곤대 니콜 다멘과 폴 슬로빅 교수의 글은 의미심장하다. “속이 뒤틀릴 만큼 충격적인 사진을 실은 NYT를 지지한다. 저널리즘은 버려지고, 희생되고, 잊힌 이들의 목소리가 되고 그들의 증인이 돼야 한다.” 단언컨대 힉스 기자는 카메라로 예멘의 진실을 세상에 알렸다. 인류 역사에서 언론이 알린 진실은 많은 이들의 도덕적 각성을 끌어냈고, 덕분에 세상은 한 발짝씩 앞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시론 12/27

시론 12/27

우리는 진실과 거짓이 극도로 혼재한 세상을 살고 있다. 거짓 정보가 사실인 양 독자를 유혹하고, 조작된 정보가 소셜미디어를 파고든다. 최근 ‘가짜 뉴스’ 과목 수업 중 학생들과 중남미 이민자와 관련된 기사들을 분석하고 토론할 기회가 있었다. 적잖은 학생들이 많은 사진과 동영상들이 조작됐다는 사실을 확인하자 가짜 뉴스의 심각성에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그야말로 객관적 사실보다 감정과 믿음이 여론을 더 크게 움직이는 ‘탈진실(Post-Truth)’의 시대다. 진실이 정치적 주장의 값싼 부속품으로 치부되기 일쑤다.
 
이런 현실에 경종을 울리고 싶었을까. 시사 주간지 ‘타임’은 진실의 수호자로서 사실 보도를 위해 위험을 감수한 언론인들을 ‘2018년 올해의 인물’로 선정했다. 카슈끄지를 비롯해 필리핀·미얀마 등 여러 나라의 언론인들이 포함됐다. 올 한해 미국 실리콘밸리와 중국·터키 등 세계 곳곳에서 진실의 조작과 탄압이 단연 화두였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은 “언론이 가짜 정보를 마구 퍼뜨린다”며 미국의 대표 언론사들을 ‘국민의 적’으로 비판했다. 트럼프와 언론 간 불협화음과 팽팽한 긴장 관계는 진실 추구라는 언론의 일차적 사명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각인시켜 줬다.
 
가짜 뉴스 현상과 맞물려 각국에서 언론에 대한 신뢰도가 추락했다. 언론인 입장에선 억울한 측면도 있어 보인다. 보수와 진보 양측이, 자신을 변호하고자 언론을 적대시하고 진실을 가짜라고 강변했다. 진실이 드러나는 게 두려운 이들에겐 진실이 불편한 건 당연지사다.
 
언론인이라고 예외일 순 없다. 언론인 스스로 진실의 수호자가 되려면 권력자·광고주·취재원, 그리고 언론사 내부의 익숙한 관행에 ‘노(No)’라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동안 가짜 정보와 왜곡된 주장을 검증 없이 보도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았는가.
 
우리가 공기 덕분에 제대로 숨 쉴 수 있는 것처럼 우리의 민주주의도 진실한 정보가 뒷받침해줄 때 제대로 꽃 피울 수 있다. 거짓 정보가 판을 친다면 그 정보에 기반을 두고 우리가 내리는 결정들이 투표는 물론이고 엉터리가 될 것은 불문가지다.
 
다가오는 새해, 카슈끄지가 사우디의 불편한 진실을 세상에 알렸던 것처럼 한국의 언론인들이 공동체에 숨어 있는 진실을 알리고 고통받는 이들의 증인이 돼 주기를 소망한다.
 
하재식 미국 일리노이주립대 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
 
◆ 외부 필진 칼럼은 본지 편집 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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