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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성 있으면 평생 현역…“할배 나이에도 오라는 곳 많아”

중앙일보 2018.12.20 00:03 종합 24면 지면보기
[김동호 논설위원이 간다]
네오사피엔스 NeoSapiens | 은퇴 없는 100세 시대의 평생현역
 
현역에서 퇴직한 유시왕씨는 곧 칠순을 바라보지만 지금도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한 그는 요즘 한국외국어대에서 학생들에게 영어 강의를 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현역에서 퇴직한 유시왕씨는 곧 칠순을 바라보지만 지금도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영어가 유창한 그는 요즘 한국외국어대에서 학생들에게 영어 강의를 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은퇴는 내가 정한다.” 직장인의 평균 퇴직연령이 53세라는데 무슨 소리인가. 그런데 실제로 이런 사람들이 있다. 전문성만 있으면 얼마든지 사회생활이 가능한 시대가 오면서다. 물론 현업에 계속 남아 있는 것은 불가능하다.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정년퇴직을 피해 갈 사람은 없다. 하지만 평생직장은 아니라도 자신의 전문성으로 얼마든지 ‘평생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다. 누구나 이런 특권을 누리는 건 아니다. 전제 조건은 특정 분야에서 쌓은 전문성과 경험이다. 배타적 지식일수록 그럴 가능성이 크다. 안방에서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을 수 있는 연결사회에서는 해외 진출까지 가능하다. 1차 베이비부머(1955~63년생)가 65세로 진입하는 2020년부터 이런 흐름은 더욱 가속될 가능성이 크다. 이들 바로 앞 연령대 꽃할배들이 그 모델들이다.
 

지난달 12일 서울 동대문구에 자리 잡은 한국외국어대학교 본관 225호. 기자 초년병 시절 담당했던 학교 모습은 온데간데없고 현대식 건물들이 캠퍼스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강의실 출입문으로 다가서자 유창한 영어 강의가 흘러나왔다. 이 대학 재학생을 대상으로 기업재무를 영어로 강의하고 있는 유시왕 교수의 목소리였다. 출입문에 달린 작은 유리창 너머로 강의실 안쪽을 들여보자 유 교수는 막힘없는 영어로 강의를 술술 풀어내고 있었다.
미리 양해를 구했지만 강의 분위기를 깨기 어려워 노크를 망설였다. 결국 유 교수가 강의실 밖에 있던 기자를 알아보고 나서야 문을 열고 들어갈 수 있었다. 칠판에는 유 교수가 직접 만든 기업재무(Corporate Finance) 강의안이 파워포인트로 띄워져 있었다. 강의를 오랫동안 방해할 수 없으니 10분만 참관하겠다고 학생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분위기를 살폈다. 강의는 마침 기자가 과거 대학원에서 영어 강의로 전공한 내용이었다. 유 교수는 원어민은 아니지만 막힘 없고 정확한 발음이어서 강의가 귀에 쏙쏙 들어왔다.
외교통상 사관학교를 목표로 소수정예를 뽑아 가르치는 한국어국어대 LT학부 강의실. 김동호 기자

외교통상 사관학교를 목표로 소수정예를 뽑아 가르치는 한국어국어대 LT학부 강의실. 김동호 기자

 유 교수는 이 대학에서 이 과목을 맡아 매주 월요일 3시간을 강의하고 있다. 학생은 9명에 불과했다. 그 이유를 물으니 흥미로운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외국어대가 학교 특성에 맞춰 입학부터 졸업까지 전 과정을 영어로 진행하는 학과를 만들어 소수 정예의 학생을 입학시키고 있다는 것이다. 2015년 신설된 이 학과의 명칭은 LT학부다. 언어와 통상(language & trade)이란 뜻이다. 외교통상 사관학교를 목표로 소수정예를 뽑아 4년 전액 장학금을 포함해 각종 장학금을 제공한다. 이 학교의 강점인 외국어에 통상을 결합해 최상위권 학생들을 유치해오기 위해서다.
 유 교수는 이런 수요에 따라 초빙교수로 발탁됐다. 올해 만 66세로 곧 칠순을 바라보는 그는 미국 명문 아이비리그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재무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졸업 후에는 근처 펜실베이니아주립대에서 3년간 강의했다. 이후 자녀들의 한글 교육을 위해 귀국해 국내 기업에 취업하면서 코스닥증권시장 전무ㆍ한화그룹금융부문 사장 등을 거치며 인생 전반을 보냈다.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배운 영어와 재무학이 그의 평생현역 핵심병기가 되고 있다. 김동호 기자

펜실베이니아대 와튼스쿨에서 배운 영어와 재무학이 그의 평생현역 핵심병기가 되고 있다. 김동호 기자

 이같이 영어로 무장돼 있고 전문성이 있으면 사실상 평생 현역으로 살아갈 수 있다. 오히려 해외에서 오라는 곳이 더 많다. 이상빈 상하이자오퉁(上海交通)대 교수는 한양대에서 지난해 2월 65세로 정년퇴임한 뒤 중국으로 건너간 경우다. 처음엔 지린(吉林)대에서 재무학을 가르쳤는데 상하이자오퉁대가 이 교수에게 특급대우를 제시하며 스카우트했다. 상하이자오퉁대는 금융ㆍ재무에 강한 대학으로 베이징대ㆍ칭화대ㆍ런민대 등에 못지않은 인기 대학이다.
 그의 ‘핵심 병기’ 역시 영어와 전문성이다. 미국 뉴욕대에서 재무학을 전공한 이 교수는 영문판 재무학 서적을 여러 권 출판해 해외에도 이름이 알려져 있다. 처음부터 중국에 갈 생각은 없었지만 막상 퇴직하자 노후 시간을 보낼 일이 필요해졌고, 중국에서 강의 수요가 많다는 것을 알게 되면서 선물ㆍ옵션ㆍ위험관리 등을 가르치고 있다. 중국은 경제가 성장하면서 금융ㆍ재무 분야 전문가의 수요가 크게 늘어나고 있다. 미국 중심의 경제 체제가 위력을 떨치면서 영어 강의가 가능하면서 전문성도 있는 사람은 날개 돋친 듯 팔려나갈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 교수는 사실 현역에 있을 때 못지않은 인생 전성기를 누리고 있다. 오라는 곳이 너무 많아서다. 결국 그는 내년부터 상하이뉴욕대로 옮겨간다. 이 교수는 어차피 중국에서 가르칠 바에는 중국을 두루 둘러볼 수 있다는 생각에 상하이뉴욕대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종강을 하면 학생들이 꽃다발을 선물하는 깜짝 파티가 뒤따를 정도다.  
이상빈 상하이자오퉁대 초빙교수는 중국에서 오라는 곳이 많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이상빈 교수]

이상빈 상하이자오퉁대 초빙교수는 중국에서 오라는 곳이 많다. 학생들의 반응도 좋다. [이상빈 교수]

 지난해까지 한국경제학회 회장을 지낸 구정모 강원대 교수도 정년을 마치고 비행기를 탔다. 그가 간 곳은 대만이다. 올 상반기 65세로 정년퇴임하자마자 CTBC 비즈니스스쿨의 초청을 받아 지난 9월부터 석좌교수로 일하기 위해서다. 대만 남쪽 도시 타이난에 있는 이 대학은 대만 굴지의 금융그룹인 CTBC가 세운 신설 사립대학이다. 여기서 구 교수는 이번 학기에 맡은 강의가 3개에 달한다. 현역 때와 다를 바 없이 왕성하게 가르치고 있다. 무엇보다 즐거운 것은 짬짬이 여행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구 교수는 페이스북을 통해 자신의 여행 소식도 자주 올린다.    
 “할배 나이에도 오라는 곳이 많다”고 즐거운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나오는 배경에 인터넷의 등장을 빼놓을 수 없다. 고려대 경제학과에서 학생을 가르치고 있는 김동원 초빙교수는 시중은행 부행장에 이어 금융감독원 부원장보 등을 거치면서 현업에서 물러난 지 5년이 넘었다. 올해 예순다섯 살이 되면서 동년배들 가운데 일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하지만 그는 현업에 있을 때보다 더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그 발판은 인터넷이다. 그는 “퇴직해도 인터넷을 통해 새로운 정보를 무한대로 얻을 수 있어 그것이 나의 경쟁력”이라며 “인터넷이 없었으면 내 사회생활도 벌써 끝났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현업에서 나왔으니 누구와 경쟁할 이유도 없어지면서 욕심이 없어지니 세상이 훨씬 더 잘 보인다”며 “경험과 통찰만 있으면 얼마든지 능력을 발휘할 수 있는 사회가 됐다”고 했다.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 컨설팅을 하고 있는 오용수씨는 책도 펴냈다. 김동호 기자

자신의 전문성을 살려 지방자치단체에서 관광 컨설팅을 하고 있는 오용수씨는 책도 펴냈다. 김동호 기자

 전문성만 있다면 길은 얼마든지 있다. 꼭 미국에서 유학한 사람들만의 얘기가 아니다. 오용수 대구광역시 산하 대구관광뷰로 대표이사(64)는 관광에 대한 전문성을 살려 나가 7년 전 퇴직했지만 지금도 일하고 있다. 평생직장은 아니지만 평생현역으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그는 이를 토대로 책(『대구사랑, 대구여행』)도 펴냈다. 그는 퇴직하자마자 한국관광공사 도쿄지사장 경험을 살려 경기도 산하 경기관광공사에 곧바로 취업됐다. 그의 역할이 알려지자 지방자치단체 관광 컨설팅 전문가로 떠올랐다. 지방에서도 관광이 곧 지역 발전의 지름길이라는 점에 눈을 뜨고 관광 진흥에 필요한 전문가를 찾아 나서면서다. 이들의 공통점은 돈보다는 사회적 활동이다. 고등교육을 받은 세대로서 전문성을 그대로 살려 나가는 것이다. 100세 시대의 네오 사피엔스가 걸어가야 할 길이다.
 
▶‘네오사피엔스 NeoSapiens’ 계속 읽기

①100세 시대의 네오사피엔스는 계속 일하고 싶다
 
②꼰대 아닌 지식정보형 중장년은 도서관으로 간다
 
③지하철의 달콤한 인생환승…퇴직자들 돌아온다
 
④청년 돕는 퇴직자의 블루오션 '제4섹터'가 뜬다

⑤직장에선 일만 하고 여가는 커뮤니티에서 즐긴
 
⑥끼리끼리 강의 듣고 치맥…요즘 586세대 ‘작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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