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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U 극우·포퓰리스트 득세…유로화, 위험자산으로 전락

중앙선데이 2018.12.15 00:24 614호 14면 지면보기
유럽연합(EU) 회원국 정상들이 1995년 12월 15일 스페인 마드리드에 모여들었다. 16일까지 이틀 동안 열리는 단일통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그들은 이틀 동안 논의 끝에 두 가지에 합의했다. 첫 번째는 “가능한 빨리 재정적자를 국내총생산(GDP)의 3% 이내로 줄이다”는 것이었다. 두 번째는 단일화폐의 단위를 ‘유로(euro)’로 정했다. 유럽통합 전문가인 안병억 대구대 교수는 “유로화 지폐와 동전이 2002년 1월에 통용되기 시작했지만 유로화 자체는 1995년 마드리드 회의에서 탄생했다”고 말했다.
 

위기 맞은 23살 청년 유로
유로화는 중도 좌우파의 합작품
유로 반대세력이 힘 얻으며 휘청

유로 탄생 때 재정적자 3%룰 채택
재정지출 급증 땐 통화동맹 붕괴

이탈리아 재정 긴축이 당면 과제
EU, 내년 예산안 승인 놓고 고민

이제 유로화는 23세가 됐다. 런던정경대학(LSE) 존 라이언 교수(국제관계)는 최근 보고서에서 “유로화의 역사는 유럽의 이전 통화동맹과 견줘 결코 짧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가 든 예는 스칸디나비아통화동맹(SMU, 1875~1924년)과 오스트리아-헝가리 통화동맹(AHMU, 1892~1918년)이다. 두 동맹은 각각 49년과 26년 정도 이어졌다. 라틴유럽통화동맹(LMU, 1865~1927년)은 그나마 62년간 지속됐다.
 
 
유로화, 미 대기업 주식만큼 위험한 자산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그래픽=박춘환 기자 park.choonhwan@joongang.co.kr]

유로화가 청년이 됐지만 여전히 위태위태하다. 글로벌 외환시장에선 미국 대기업 주식만큼이나 위험한 자산으로 통한다. 영국의 EU 탈퇴(브렉시트) 안에 대한 의회 표결이 미뤄져, 글로벌 시장의 관심이 유로존의 리스크에 집중되고 있다. 바로 이탈리아 재정적자 문제다. 구체적으로 ‘2019년 재정적자 비율을 몇%까지 줄일 것인가’를 두고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정부와 EU 집행부가 올 6월 이후 맞서고 있다. 일단 이달 12일 주세페 콘테 이탈리아 총리와 장클로드 융커 EU 집행위원장이 벨기에 브뤼셀에서 회동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소식통의 말을 빌려 “콘테가 내년 재정적자 비율을 GDP의 2.04%까지 낮추는 안을 제시했다”고 전했다. 콘테의 제안은 진일보한 것이다.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정부는 2.4% 선을 고수했다. “2009년 재정위기 이후 긴축 때문에 어려워진 국민을 돌봐야 한다”는 이유에서다. 이탈리아에서 긴축은 기득권 세력(중도 좌우파)의 이데올로기로 통한다. 하지만 콘테의 2.04%는 EU 집행부가 원하는 1.9%엔 미치지 못한다. 게다가 전임 정부가 EU에 약속한 0.8%와 견주면 한참 밑이다(그래프). 톰슨로이터는 “EU가 며칠 동안 검토한 뒤에 콘테의 제안을 받아들일 것인지 아닌지를 결정한다”고 전했다.
 
EU가 콘테의 노력을 인정해 2.04% 적자안을 받아들일 만하다. 유로존 가이드라인 3%를 만족한다. 하지만 이탈리아의 공공 부채를 보면 EU가 양보할 수가 없다. 이탈리아 공공부채는 2조1000억 유로(약 2667조원) 이상이다. GDP기준 부채비율은 131%다. 그리스 다음으로 높다. 유로존 건전재정 기준인 60%와 견주면 두 배 이상이다. 이 부채비율을 맞추려면 이탈리아는 재정적자를 1.9%까지 낮춰야 한다는 게 EU 집행부의 생각이다. 게다가 “내년 예산안이 이탈리아 의회 심의를 거치는 과정에서 재정적자가 콘테의 2.04%를 넘어설 가능성이 크다는 게 EU 관료들의 예상”이라고 영국 가디언지는 전했다.
 
EU 집행위는 왜 재정적자 비율에 강경할까. 영국의 화폐이론가인 제프리 잉험 케임브리지대 교수는 최근 중앙SUNDAY와 이메일 인터뷰에서 “현대 종이돈 시스템은 한 국가에서 가장 믿을 만한 존재인 정부가 찍어낸 증서(은행권)를 바탕으로 한다”며 “은행권은 조세(세수)의 효율성과 지출(세출)의 절제로 이뤄지는 재정건전성에 달려 있다”고 말했다. 그런데 유로존뿐 아니라 유럽의 역대 통화동맹 회원국의 조세 제도와 효율성이 제각각이었다. 어느 나라는 세금을 잘 거둬들이는 반면 어느 나라는 세금 탈루가 심하다. 역사와 문화 등이 제각각이어서 단일 조세제도를 만드는 게 사실상 불가능하다. 이런 상황에서 재정지출이 단기간에 가파르게 증가하면 통화동맹 자체가 붕괴한다. 실제 유로화 이전 유럽의 통화동맹이 1914년 1차 대전을 계기로 사실상 작동 불능상태에 빠졌다. 이런 역사적 경험 탓에 유로화 설계자들은 정부의 세입 대신 일률적인 통제가 가능한 세출(재정지출)에 족쇄를 채웠다. ‘재정적자 3%룰’이 채택된 이유다.
 
잉험 교수는 “영국 중앙은행이 17세기 의회파(휘그)가 만든 조직으로 불리듯이, 유로화와 유럽중앙은행(ECB)은 중도 좌우파의 시스템이라고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중도파 정부들은 1980년 이후 중시된 감세와 민영화 논리에 맞춰 유로화의 밑바탕인‘재정적자 3% 룰’에 합의했다.
 
그런데 2009년 재정위기 이후 포퓰리스트와 극우 정당 등 반 유로세력이 힘을 얻고 있다. 유로존 내에서 재정적자 3% 룰을 지킬 세력이 약해지고 있는 셈이다. 프랑스에선 사회당의 직간접적인 지원을 받아 에마뉘엘 마크롱이 극우 정당 후보를 겨우 물리치고 지난해 집권했다. 이탈리아에선 올해 포퓰리스트가 집권했다. 최근 마크롱은 저소득층과 농민이 주축인 ‘노란조끼 시위대’의 저항에 시달렸다. 끝내 최저임금 인상을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프랑스엔 공공 부문 일자리가 많은 편이다. 경기 둔화 시기에 최저임금 인상은 재정적자 증가로 이어지기 십상이다.
 
 
부채대국 이탈리아, 재정적자 리스크 커져
 
EU 집행부는 선택의 기로에 서 있다. 이탈리아 포퓰리스트 정부의 내년 예산안을 인정할지를 조만간 결정해야 한다. 독일 쪽은 강경하다. 약속대로 공공부문 부채비율 60%가 달성될 때까지 긴축하도록 해야 한다는 쪽이다. 이를 맞추지 못하면 2013년 체결된 신재정협약대로 이탈리아에 벌금을 물려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아직까지 신재정협약 위반을 이유로 벌금을 맞은 회원국은 없었다.
 
벌금은 GDP의 0.1% 정도다. 이탈리아는 20억 달러 정도 내야 한다. 액수는 많지 않은 편이다. 하지만 이 지경에 이르면 시장에서 이탈리아 국채 값이 추락할 가능성이 크다. 이탈리아 내부에선 반유로 정서가 더욱 강화될 수 있다. 안병억 교수는 “EU가 신재정협약을 근거로 이탈리아에 벌금을 물리면, 포퓰리스트 연립정부 내 강경파의 목소리가 커질 수밖에 없다”고 내다봤다. 청년 유로화가 시장과 정치 영역에서 나란히 또 한 차례 위기를 맞을 수 있다는 얘기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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