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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류애 같은 공상적 사랑 말고 ‘너와 나’ 실천적 사랑을

중앙선데이 2018.12.15 00:20 614호 25면 지면보기
석영중의 맵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③ 두 가지 사랑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화가 나탈리야 모이세예바가 그린『카라마조프가의 형제』속 대심문관과 그리스도의 대화 장면

모스크바에서 활동하는 화가 나탈리야 모이세예바가 그린『카라마조프가의 형제』속 대심문관과 그리스도의 대화 장면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서 도스토옙스키가 전달하려는 메시지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아마도 “사랑을 실천하라”가 될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을 두 가지로 나누어 본다. ‘공상적 사랑’(love in dreams)은 이론적이고 추상적이고 관념적인 사랑이다. 그는 대표적인 예로 ‘인류애’를 손꼽는다. 인류를 사랑한다는 것은 무척 훌륭하고 멋있게 들리는 일이다. 그러나 순식간에 공허한 구호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아무도 사랑하지 않는 것’으로 귀착할 수도 있다. “나는 인류를 사랑한다. 하지만 나는 단 이틀도 같은 방에서 어떤 사람하고든 함께 지낼 수가 없다. 아무리 훌륭한 사람이라도 나는 하루만 지나면 그를 증오하게 된다.”

아들 이반의 서사시 ‘대심문관’엔
절대권력의 끔찍한 전체주의가 …
실천적 사랑은 인내와 희생 바탕
“아무도 사랑 못하는 고통이 지옥”

 
‘공상적 사랑’은 카라마조프가의 둘째 아들 이반의 창작 서사시 ‘대심문관’에서 최악의 형태로 실현된다. 때는 16세기, 매일 장작더미가 타오르던 종교재판 시대의 세비야다. 절대 권력을 쥔 대심문관이 100명의 이단을 화형시킨 다음날 그리스도가 지상에 강림한다. 수천의 군중이 그리스도를 뒤따르는 것을 본 대심문관은 그리스도를 체포하여 감옥에 가둔다.  
 
선악·양심의 자유, 그 자체가 무거운 짐
 
대심문관은 그리스도가 인류의 빈곤과 고통을 무시했다고 거세게 비난한다. 그리스도는 ‘돌을 빵으로 만들면 인간이 온순한 양떼처럼 너의 뒤를 따를 것이다’라는 악마의 유혹을 ‘사람은 빵만으로 살 수 없다’는 말로 물리쳤다. 그리스도는 “인간들로부터 자유를 빼앗고 싶지 않았기에” 빵으로 복종을 사라는 제안을 거절했다. 바로 거기에 그리스도의 ‘죄’가 있다는 것이다.
 
단순화시켜 말하자면, 여기서 ‘빵’은 먹을거리에서 부귀영화에 이르는 모든 물질적 조건을 의미한다. ‘자유’는 선택의 자유에서 절제, 성찰, 도덕, 윤리에 이르는 정신적인 모든 것을 의미한다. 대심문관의 시각에서 볼 때 인간은 “영원한 모순 속에서 허덕이는 무력하고 비천한 존재”이므로 선악의 자유, 양심의 자유는 끔찍한 짐이며 무서운 고통이다. 인간에게 필요한 것은 “그를 이끌어주고 그 대신 선택을 해줄 강력한 힘과 물질적인 안정”이다. 인류에게 자유를 주면 그들은 자유를 반납하면서 “우리들을 노예로 삼되 그 대신 빵을 주세요. 그러는 게 더 좋습니다”라고 말할 것이다. 설령 극소수의 위대한 인간이 자유를 위해 그리스도를 따른다 해도 대부분의 민중은 지상의 빵을 택할 것이다.
 
대심문관은 결국 인류의 ‘수학적인 행복’을 위해 빵의 분배가 가능한 왕국을 건설했다. “돌을 빵으로 만드는 기적”을 통해서가 아니다. 그런 기적은 어차피 불가능하다. 대심문관은 “그들이 손으로 벌어들인 빵을 거두었다가 다시 나눠주는 것 뿐이지만 우리한테서 빵을 받아든 그들은 영원히 복종할 것”이라고 확신한다. “짐승처럼 우리들에게 기어와 우리 발을 핥으며 눈에서 피눈물을 흘릴 것이오. 그러면 우리들은 그 짐승을 깔고 앉아 축배를 들것이니 그 잔에는 신비라고 적혀있게 될 것이오. 그러나 오직 그때에만 사람들을 위한 평온과 행복의 왕국이 도래할 것이오.”
 
그동안 수많은 연구자가 지적했듯이 대심문관은 현대의 전체주의를 예고한다. 절대 권력을 손에 쥔 소수가 나머지 인류를 배부른 양떼로 길들여 지배한다는 시나리오는 디스토피아 드라마의 단골 소재다.
 
대심문관의 왕국이 디스토피아인 이유는 무엇보다도 그것이 인간의 다양성을 무시하는 균등사회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불합리하고 변덕스럽고 예측 불가능한 존재라 한편으로는 동질성을 지향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본능적으로 균등을 거부한다. 인간은 빵을 원하지만 동시에 자유도 원한다. 인간은 수와 양으로 계산될 수 없다. 심리학적으로 불가능한 사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신격화된 권위가 필요하다. 그런 사회에서 인간의 ‘수학적 행복’은 수학적이라는 바로 그 점 때문에 행복이 아닌 악몽이 된다. 모두가 행복한 사회의 이상은 모두가 불행한 현실과 맞닿아 있다.
 
이반은 대심문관을 가리켜 “위대한 비애로 고뇌하며” “한평생 인류를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칭한다. 그러나 ‘어리석은 양떼’에 대한 그의 사랑은 개인의 존엄성에 대한 모독과 동의어다. 한나 아렌트는 대심문관의 원죄가 “고통받는 사람들을 탈인격화시키고 그들을 한결같이 하나의 집합체, 항상 불행한 사람들, 고통받는 대중 등으로 취급했다는 데 있다”고 단언했다. 공상적인 인류사랑에서 전체주의의 악몽이 시작되었다는 얘기다.
 
도스토옙스키는 공상적 사랑에 대한 대안으로 ‘실천적 사랑’(love in action)을 제시한다. 그것은 살아있는 한 인간을 이론이 아닌 행동으로 사랑하는 것을 의미한다. 사랑은 인간의 가장 깊은 내면에서 솟구쳐 나오는 자연스러운 욕구다. 그러나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노력과 학습이 필요하다. 소설에서 도스토옙스키의 사상을 대변하는 노수도사 조시마 장로는 말한다. “사랑은 얻기 힘든 것입니다. 구하려면 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고 오랜 세월에 걸쳐 많은 일을 해야 합니다. 사랑이라는 것은 우연한 어떤 순간이 아니라 어느 때에나 실천해야 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연히 하는 것이라면 누구든 할 수 있으며 악당들조차도 그렇게 할 수 있습니다.”
 
꾸준히, 보상에 대한 기대 없이, ‘인간의 도리로서’ 사랑을 주는 것은 참을성과 희생을 요하는 일이다. 그래서 조시마는 “실천적 사랑은 공상적 사랑에 비해 가혹하고 두려운 일”이라고 단언한다. 공상적 사랑은 사람들에게 칭찬받고 주목받기 위한 “무대 위의” 퍼포먼스 같은 것이지만 실천적 사랑은 “노동이자 인내이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완벽한 학문이기도 합니다.”
 
“공상적 사랑은 무대 위 퍼포먼스 같아”
 
실천적 사랑은 인간관계를 ‘나와 너’의 관계로 바라본다는 점에서 공상적 사랑과 구분된다. 타인에 대한 윤리적 책임은 ‘한 사람’에서 시작한다. 마틴 부버의 말처럼 “사람은 ‘너’와 접함으로써 ‘나’가 된다.” ‘너’ 속에 비춰진 나를 보면서, ‘나’ 속에 비춰진 너를 보면서 우리는 비로소 나와 너는 모두 똑같이 ‘사람다움’의 씨앗을 간직한, 그래서 똑같이 존엄한 존재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때의 ‘나’와 ‘너’는 균등한 존재가 아니라 평등한 존재다. 이때의 ‘우리’만이 배제와 증오, 혹은 이해관계로 인해 일시적으로, 우연하게 형성된 ‘집단’을 넘어서 진정한 공동체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
 
실천적 사랑이 세상의 모든 부조리에 대한 해결책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악에 대한 해독제도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실천적 사랑이 받쳐주지 않으면 제아무리 숭고한 목적이라 할지라도 악의 실현에 기여할 수 있다. 독실한 그리스도인이었던 도스토옙스키는 영혼 불멸을 믿었다. 그러나 그가 소설 속에서 묘사한 것은 거의 언제나 ‘지금 이곳’에 살고 있는 인간들의 천국과 지옥이었다. ‘지금 이곳’에 천국을 건설할 수는 없지만 지옥은 언제라도 가능하다. 실천적 사랑의 불가능이 곧 지옥이다.  “지옥이란 더 이상 아무도 사랑할 수 없는 고통입니다.”
 
석영중 고려대 노문과 교수
고려대 노어노문학과를 졸업하고 미국 오하이오 주립대 대학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00년에 러시아 정부로부터 푸시킨 메달을 수여받았으며, 제40회 백상번역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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