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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의 카레 식당, 동업자 이중섭은…

중앙선데이 2018.12.15 00:07 614호 27면 지면보기
황인의 ‘예술가의 한끼’
부산 피난시절 삼총사였던 이중섭·박고석·한묵(왼쪽부터)의 1950년대 모습. [사진 현대화랑]

부산 피난시절 삼총사였던 이중섭·박고석·한묵(왼쪽부터)의 1950년대 모습. [사진 현대화랑]

박고석(1917~2002)은 평양의 기독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명은 요셉이다. 평양 숭실중학교에 다닐 때 자신의 이름을 고석(古石)으로 개명했다. 1935년 도쿄로 건너가 일본대학 미술과를 다녔다. 동기로는 대구 출신의 곽인식(1919~1988)이 있었다. 미술공부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이듬해 해방이 되었다. 그리고 한반도는 남북으로 갈렸다.

카레라이스 먹고 사라지는 이중섭
천막식당 운영에 전혀 도움 안 돼

광복동 밀다원서 이중섭 처음 만나
동천 아틀리에서 함께 밤새 그림
전쟁 후 두 사람 서울 정릉 이웃

노년에 커피 즐긴 샘터사옥 난다랑
밀다원으로 이름 바꿔 질긴 인연

 
숭실중 동기인 첼리스트 전봉초(1919~2002)와 함께 38선을 넘어 남하를 감행했다. 군인들의 검문에 걸려 두 사람은 구금됐다. 내일이 어찌 될지도 모르는 유치장 속에서 박고석은 전봉초에게 사교댄스 스텝을 가르쳤다. 슬로 슬로 퀵퀵. 어이없는 웃음이 나왔다. 박고석은 화단에서 대표적인 과묵한 사나이로 알려져 있다. 그는 과묵했지만 늘 유쾌했고 매사에 긍정적이었다.
 
서울에 정착한 박고석은 서울타임스 기자를 거쳐 배화여고에서 교사생활을 하다 6·25를 맞았다. 마침 약혼녀 김순자와 결혼식을 잡은 날이었다. 난리 통에 결혼식은 무산되었다. 부산으로 피난을 간 건 1·4 후퇴 무렵이었다. 부산공고 미술교사로 취직했다.
 
당시의 부산공고는 문현동에 있었다. 지금의 성동중학교 자리다. 범일동과 문현동 사이로 동천이 흐른다. 나중에는 똥천이란 악명을 얻었지만 그때는 물이 맑았다. 인근에 대선주조가 있어 술 익는 냄새가 흐뭇하게 이 일대를 덮었다.
 
 
38선 넘다 잡혀 갇혔을 때 사교댄스 시범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 1951, 캔버스에 유채, 39.351.4㎝ . [사진 현대화랑]

박고석의 ‘범일동 풍경’, 1951, 캔버스에 유채, 39.351.4㎝ . [사진 현대화랑]

부산공고의 서쪽 담벼락을 끼고 동천에 말뚝을 박아 아틀리에를 겸한 판잣집을 지었다. 10평도 채 안 되는 공간이었다. 부엌과 아틀리에 그리고 3명이 겨우 누울 수 있는 방이 하나 있었다. 화장실의 배설물은 동천으로 떨어져 곧바로 바다로 흘러갔다. 판잣집이라 했으나 목재는 고급이었다. 거기다 전체적으로 흰색 페인트칠을 하였다. 시절은 우중충했지만 이 아틀리에는 비현실적으로 찬연하고 고상한 아우라를 발산했다.
 
여기를 이중섭(1916~1956)이 무시로 드나들었다. 박고석과 이중섭은 도쿄에서 비슷한 시기를 보냈으나 서로의 이름만 알 뿐 일면식이 없었다. 1·4 후퇴 때 이중섭도 가족을 이끌고 원산을 떠나 부산으로 피난 왔다. 광복동의 밀다원 다방에서 둘은 처음 만났다. 문인, 화가들의 아지트 밀다원은 광복동 큰길에서 서울깍두기로 들어가는 골목길 오른쪽 초입에 있었다. 둘은 곧 의기투합의 친구가 되었다.
 
화가들이 많이 가는 다방으로는 창선동 치안센터와 사해방 사이의 골목 안 휘가로도 있었다. 당시는 청년시인이었지만 나중에 미술평론가가 되는 평양의 후배 이일(1932~1997)과 박고석이 만난 건 이 다방이었다. 박고석은 1952년 휘가로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박고석의 대표작인 ‘범일동 풍경’(1951)이 출품되었다.
 
피난지에서도 청춘은 빛났다. 그들이 자주 출몰하는 곳은 아무래도 광복동이었다. 부산관광호텔에서 광복동으로 내려가는 좁은 길, 지금은 일본서적 전문의 동서도서 한 집만 남아 있지만 그때는 많은 일본서점이 줄지어 있었다. 일본에서 막 창간된 미술수첩, 예술신조 등의 월간지가 이 골목까지 전해졌다. 여긴 전쟁 중인데 전혀 다른 세계가 책 속에서 펼쳐졌다. 화가들은 해외정보에 대한 허기와 전쟁의 불안감을 책으로 달랬다.
 
 
이중섭 은박지 그림 땔감으로 사용돼
 
커피를 지독히도 즐겼던 박고석 화백. [중앙포토]

커피를 지독히도 즐겼던 박고석 화백. [중앙포토]

이중섭은 일본인 부인과 아들 둘을 일본으로 보낸 후라 매우 외로웠다. 동천 아틀리에의 좁은 방에서 박고석과 이중섭은 술을 마시기도 하고 밤새도록 그림을 그리기도 했다. 이중섭은 인근의 미군부대 쓰레기장에서 수거한 담뱃갑 은박지에다 그림을 그렸다. 늦은 밤이면 박고석의 부인이 두 사람을 위해 수제비를 끓였다. 땔감이 귀했다. 여기저기를 다니며 마른나무 부스러기를 찾아 모았지만 늘 부족했다. 군것질과 술안주로 먹고 버린 땅콩껍질을 모아 화력을 보탰다. 땅콩껍질을 둘둘 만 은박지는 훌륭한 불쏘시개가 되었다. 이중섭의 숱한 은지화(銀紙畵)들이 수제비를 위한 불쏘시개로 활활 타들어 갔다. 영도에서 거두어 온 해초가 더해지면 제법 그럴듯한 수제비 요리가 완성되었다. 수제비 한 그릇에 얼마나 많은 이중섭의 은지화가 불태워졌을까? 그땐 몰랐지만 세상에서 가장 호사스럽고 값비싼 수제비였다.
 
전쟁은 어제까지의 샌님들을 갑자기 장사의 길로 들어서게 했다. 생활력이 강한 박고석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박고석은 국제시장에서 시계를 팔았다. 시계장사라고 했으나 중고시계 몇 개를 ‘헌 석유궤짝 위 비둘기장 같은 예쁜 유리장에 넣어선’(신동아 1970년 6월호) 하루 종일 앉아 손님이 오기를 기다리는 게 전부였다. 과묵한 박고석에게 호객의 목청이 따로 있을 리가 없었다.
 
생활인 박고석이 카레라이스 장사에 뛰어들었다. 범일동에서 문현동 고개를 넘으면 광안리가 지척이다. 당시의 광안리 해변에는 사람이 거의 살지 않았다. 박고석은 구조물을 만들고 세우는 데에 남다른 재능이 있었다. 여름 한 철을 노려 천막으로 겨우 햇볕을 막은 노상식당이 뚝딱 세워졌다.
 
일본의 메이지 정부는 카레라이스를 군대의 병식(兵食)으로 채택했다. 러일전쟁을 계기로 특히 해군에서 카레라이스가 많이 보급되었다. 하나 요리과정이 간단하지가 않았다. 가루로 된 오리엔탈 브랜드의 즉석카레가 나온 건 한참 뒤인 1945년이다. 이때부터 카레라이스가 일반 가정에도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박고석도 일제 즉석카레를 썼을 것이다. 카레가 귀했던 만큼 카레라이스는 당시의 부산에서는 이국적인 음식이었다. 박고석은 어디서 구했는지 이 귀물을 구했다.
 
엉뚱하게도 이중섭이 카레라이스 천막식당 동업을 선언했다. 말이 동업자지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는 정처 없이 떠도는 사람이었다. 며칠 동안 자취를 감추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카레라이스 서너 그릇을 먹고는 어디론가 사라지곤 했다. 덩치가 큰 데다 먹성이 좋았다. 천막식당을 지키고 돌보는 일은 오로지 박고석의 몫이었다. 영업에 방해만 될 뿐인 이중섭을 거두어 주는 일도 그의 몫이었다.
 
박고석은 산의 화가로 알려져 있다. 길을 걷는 것보다 산을 오르는 게 더 편하다고 할 정도로 산과 친했다. 전문적인 암벽등반가이기도 했다. 산의 화가 박고석이지만 바다 그림도 제법 남겼다. 여수항구, 통영, (인천) 대성목재, (부산) 남천동에서 등이 대표적이다. 박고석이 부산에서 생활한 기간은 2년을 조금 넘겼다. 그러나 그는 바다와 급속히 친해졌고 평생 부산 바다와 부산에서 친구들과 함께 보낸 젊음을 그리워했다. 부산에서 먹었던 싱싱한 보리새우의 맛을 그리워했다.
 
박고석이 서울로 돌아가자 부산공고 미술교사로 일본대학 후배인 김경(1922~1965)이 부임했다. 그는 박고석의 동천 아틀리에도 물려받았다. 해동중학교 교사인 목판화가 정규(1923~1971)와 경남여중 미술교사인 하인두(1930~1989)가 이 아틀리에를 드나들었다. 박고석이 동천에 세운 자그마한 아틀리에는 전후의 한국현대미술이 꽃피는 큰 울림의 공간이 되었다.
 
유엔한국재건단(UNKRA)의 구호물자와 재건물자들이 부산공고에 우선 공급되었다. 그 덕에 김경 등은 고급수채화지인 와트만지나 포스터칼라를 예사로 썼다. 캔버스천과 다량의 최신기자재가 들어왔다. 박고석도 그 혜택을 보지 않았을까 추측해볼 수가 있다. 1955년에 부산공고에 입학하자마자 미술교사 김경을 따라 동천의 아틀리에를 시도 때도 없이 드나든 조각가 김청정의 증언이다.
 
전쟁이 끝나고 박고석은 서울로 올라와 1955년 정릉에 자리를 잡았다. 부산 피난 시절, 박고석과 삼총사를 이루었던 독신의 이중섭, 한묵(1914~2016)이 이웃으로 가세했다. 북한산 청수장에서 내려오는 물줄기를 따라 김병기, 김대현, 최정희, 박경리, 금수현 등 수많은 문인, 예술가들이 정릉에 집터를 잡았다. 이중섭이 죽자 화장된 유골은 3등분 되었다. 일부는 일본의 그의 부인에게로 또 일부는 미아리의 묘소로 갔다. 그리고 나머지는 박고석이 보관하다가 정릉에 수목장으로 뿌려졌다.
 
 
박고석 부인은 건축가 김수근의 누나
 
박고석의 부인 김순자는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했다. 건축가 김수근(1931~1986)의 누나다. 김수근은 1983년 명륜동 박고석의 집을 설계했다. 명륜동 집에서는 역시 김수근이 설계한 동숭동 샘터사옥이 가까웠다. 박고석은 지독히도 커피를 사랑했다. 큰 주전자에 가득한 원두커피를 하루 종일 마시는 스타일이었다. 그림이 팔리면 쌀이나 연탄은 뒷전이고 우선 커피부터 샀다. 노년의 박고석은 샘터사옥의 난다랑에서 커피를 즐겨 마셨다. 난다랑은 나중에 밀다원이 되었다. 박고석과 이중섭이 처음 만난 곳도 부산의 밀다원이 아니었던가. 질긴 인연의 두 사람이었다.
 
황인 미술평론가
미술평론가로 활동하고 있으며 전시기획과 공학과 미술을 융합하는 학제 간 연구를 병행하고 있다. 1980년대 후반 현대화랑에서 일하면서 지금은 거의 작고한 대표적 화가들을 많이 만났다. 문학·무용·음악 등 다른 장르의 문화인들과도 교유를 확장해 나갔다. 골목기행과 홍대 앞 게릴라 문화를 즐기며 가성비가 높은 중저가 음식을 좋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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