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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코노미스트] 도대체 융통성이 뭐길래 … 새치기·편법·보신주의로 변질

중앙일보 2018.12.08 00:02
목표지향주의 조직 문화의 부작용…원리·원칙·규칙 눈치껏 넘나들고 슬쩍 뭉개

 
사진:gettyimagesba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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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화제가 되고 있는 책 [골든 아워]는 재미 있다. 소설 같기도 하고 드라마 같기도 한 진짜 현실이어서 그렇기도 하지만 조직학 관점에서 많은 생각을 하게 한다. 그 누구도 인정해주지 않은 일을 혼자 맨땅에 헤딩하듯 시작해, 어엿한 부서로 성장시키고, 더 나아가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올리는 과정에 한국 조직이 처한 현실이 고스란히 들어있기 때문이다.
 
응급환자 중에서도 곧바로 큰 수술을 해야 하는 중증외상 분야의 의사이자 경기 남부권역 외상센터장이기도 한 저자 이국종은 이 책의 표지에 ‘기록’이라고 쓰고 있다. 그가 지난 15년 간 겪어온 기록이자, 지금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는 그와 그 주변의 사람들, 그러니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싸우다 쓰러져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이다. 기록은 철저하고 이야기는 처절하다.
 
이국종의 처절한 15년 기록
이국종 교수가 펴낸 [골든아워].

이국종 교수가 펴낸 [골든아워].

중증외상은 우리나라 국민이 사망하는 3대 원인 중의 하나인 국가적이고 사회적인 문제다. 선진국도 비슷해 국가적이고 제도적인 차원에서 이 분야를 운용한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그동안 먼 나라 이야기였다. 이 때문에 그와 그의 팀들은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을 하면서도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다 못해 싸우다 쓰러져 가는’ 상황을 겪어 왔고 지금도 겪고 있다. 얼핏 이해가 안 되는 이런 일이 왜 생긴 걸까?
 
모든 일은 하나에서 시작한다. 중증외상 외과라는 분야가 사회적으로는 가치 있을지 몰라도 수익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것이다. 최근 들어 국가의 지원으로 재정상태가 호전되었지만 지난 대부분의 시간 동안 적자였다. 대학병원도 수익을 우선하는 조직인데 적자투성이 부서가 어찌 반가울 수 있겠는가. 그는 맨땅에 헤딩할 수밖에 없었다. 환자들이 사회 고위층이었다면 일찌감치 달라졌겠지만 블루칼라들이기에 모두들 외면했고, 그 또한 눈 밖에 나야 했다.
 
그가 자신의 처지를 십분 ‘깨닫고’ 조직의 변두리에서 조용히 숨만 쉬고 살았다면 별 일 없었을 것이다. 환자들은 죽어 나가더라도 그의 말마따나 그런다고 국가가 망하는 것도 아니었고, 그도 그럭저럭 먹고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문제는 그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했다는 것이다. 그것도 최선을 다해 어떻게든 더 나은 상태를 만들어 보려고 발버둥쳤다. 미국과 영국에 연수를 갔을 때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의 미래를 봤다. 세계 표준의 시스템을 가진 외상센터, 그리고 그렇게 열심히 일한 후 저녁에 동료들과 맥주 한 잔. 그의 목표는 단순했다. 하지만 가는 길은 험난했다. 길이 없었기에 만들면서 가야 했다. 조직과의 불화는 예정된 수순이었고 그것은 예외 없이 고통스러운 불똥이 되어 그에게 떨어졌다. ‘고작 의사’이자 ‘말단 노동자’ 신세인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뭐가 있었겠는가. 이해할 수 없는 불합리를 감수할 수밖에. 국가도, 사회도 눈길을 주지 않았다.
 
대세를 거스르면 고통은 필연이다. 최선을 다 할수록 욕을 먹고, 누군가를 살릴수록 죽음에 가까이 다가서야 했다. 그래도 사회적으로 가치 있는 일이니 수긍해 줄 만도 한데 그런 일은 많지 않았다. 비웃고 냉대하고 무수한 뒷말로 발목을 잡아 무기력에 빠지게 했다. 그는 물론이고 그와 같이 일하는 사람들을 ‘무의미와 끝까지 싸우게’ 했다.
 
더 큰 문제는 그가 자신의 일에만 그렇게 발버둥치며 최선을 다 했을 뿐, 사교에 힘쓰거나 사내 정치라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에 눈을 돌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의 자조적인 표현처럼 그러고 싶지도 않았고 그럴 능력도 없었다. 그는 한마디로 융통성 없이 자기 일만 열심히 하는, 그를 곱지 않은 눈길로 보는 이들에게는 골칫덩이였다. ‘지금까지의 관행과 관습을 모조리 무시하고 제멋대로 날뛰는’ 골칫덩이. 그러니 힘에서 밀리고 짓눌림 당하는 것도 당연한 것이었다. 힘 빠지고 맥 빠지게 하는 일은 언제나 기다리지 않아도 밀물처럼 밀려왔다.
 
자신을 (외과의사라는) ‘칼잡이’라고 표현하는 그는 환자를 살리는 일에서는 ‘칼’ 깨나 썼다. 하지만 자신을 둘러싼 조직 내 역학관계나 대외관계에서는 그러지 못했다. 능력 있는 칼잡이가 아니었기에 조직의 모퉁이에 붙어 벼랑 끝 같은 삶을 견디고 버텨야 했다. ‘시스템은 부재했고, 근거 없는 소문은 끝없이 떠돌았으며, 부조리와 불합리가 난무하는 가운데 돈 냄새만 쫓는’ 세상은 그에게 ‘매일 고통 속에서 몸부림칠 만큼 지옥 같은’ 시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이 해야 할 일을 계속했다. 왜 그렇게까지 해야 했을까? 어떤 숭고한 이유가 있었던 걸까?
 
“직장생활이니까…”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 교수가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아주대병원 옥상 헬기장에서 헬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국종 아주대병원 권역외상센터 교수가 환자를 이송하기 위해 아주대병원 옥상 헬기장에서 헬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화의 희열]이라는 TV 프로에서 MC인 유희열이 이 질문을 던지자 그는 간단하게 답했다. “직장생활이니까.” 이 단순한 대답에 유희열은 말을 못하고 고개를 푹 떨궜다.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그는 그렇게 직장생활을 했고 자신의 일을 했다. 희망은 보이지 않았지만 칼을 들었으므로 끝까지 가보고자 했다.
 
그래서일까. 800쪽이 넘는 그의 경험을 따라가는 동안 불편한 마음을 내내 맴도는, 갈수록 선명해지는 의문 하나가 있었다. 도대체 융통성이라는 게 뭔데, 한 눈 팔지 않고 일 좀 하려는 사람의 발목을 그렇게도 잡아 고꾸라뜨릴까?
 
흔히 하는 말 그대로 그가 융통성이라는 수완을 발휘했더라면, 그는 편히 살 수 있었을 것이다. 물론 석해균 선장을 비롯한 많은 환자가 저 세상으로 갔겠지만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그는 융통성이 없었고, 덕분에 우리는 이제서야 중진국보다 못한 낙후된 분야를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 올려가고 있는 중증 외상센터를 갖게 됐다.
 
이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었던 건, 우리가 흔히 말하는 융통성이라는 게 그만의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다. 어느 조직에서나 일 좀 해보려는 이들은 이 융통성에 부딪쳐 나동그라지고, 뒷통수를 맞고, 발목을 잡혀 좌절한다. 국어사전은 융통성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그때그때의 사정과 형편을 보아 일을 처리하는 재주, 또는 일의 형편에 따라 적절하게 처리하는 재주’. 어떤 일을 기계적으로, 고지식하게 하지 않고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처리한다는 뜻이다. 당연히 우리는 이 단어를 상당히 긍정적으로 사용한다. 세상을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조직에서 만나는 융통성은 속뜻이 다르다.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눈치껏 적당히 넘어가고, 결과만 좋으면 과정이 좋지 않아도 좋은 것, 원래 그래서는 안 되는 것이지만 적당히 어겨도 괜찮은 행동을 융통성이라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새치기·편법·보신주의 같은 것이다. 생산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성과를 내기 위해 적절하게 처리하는 게 아니라 눈앞의 이익이나 발등에 떨어진 불을 끄기 위한 것이다. 원리와 원칙이라는 기준 하에서 유연하게 행동하는 게 아니라, 원칙도 기준도 철학도 없이 그때그때 상황에 따라 행동하는 적당한 편법, 서로 눈감아주면 아무 문제 없는 반칙을 융통성이라고 한다.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기에 상당히 권장되는 능력이다.
 
물론 이런 것들은 사람 사는 곳이라면 어디에나 있다. 하지만 우리는 좀 유난하다. 부작용이라 할 수 있는 요령을 능력으로 인정하는 측면이 강하다. 지양해야 할 것을 지향한다. 본말이 전도된, 이런 문화는 어디서 생긴 걸까?
 
장점의 뒷면은 단점이듯, 우리의 성공한 과거 탓이 크다. 우리는 그동안 선진국이라는, 앞서 가는 그들을 따라잡기 위해 전력질주를 해왔다. 선진 제품을 만들어내는 방법은 하나, 무조건 열심히 앞으로 달리는 것이었다. ‘안 되면 되게 하라’는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그들이 하던 대로 하면 따라잡을 수 없었기에 그들이 사용한 과정이 아닌, 다른 지름길을 찾아야 했다. 당연히 알려진 과정, 정해진 과정을 건너 뛰어 목표에 더 빨리 도달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내는 것이 능력이 되었다. 일을 잘하는 비결이 됐다. 목표를 더 빨리 달성하기만 하면 모든 것이 용인되고 용서됐다. 덕분에 세계적으로 드문 성공 신화를 이룩한 우리에게 이 방식은 일을 하는 일반적인 방법이 됐다. 문제는 이걸 조직 내 역학관계에 재빨리 적용한 이들이 능력을 인정받아 승승장구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된다’는 융통성으로 샛길을 지름길로 만들었다. 원리와 원칙, 규칙을 눈치껏 넘나들고 슬쩍 뭉개는 능력으로 경쟁 대열에서 앞서 갔다. 눈치는 필수가 됐고 ‘눈치껏’ ‘알아서’는 승진의 중요한 수단이 됐다.
 
좋은 게 좋다? 
‘좋은 게 좋다’며 서로 이익을 공유한 이런 이들이 보이지 않는 연합을 형성, 힘 있는 자리를 고루 차지하면 ‘사심 없이’ 열심히 일하는 실력 있는 이들은 융통성 없는 무능력자가 되어 옆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다. ·지치고 지겨울 뿐인’ 환경을 견디다 못해 하나 둘 떠나게 마련이다.
 
이국종의 경험에 따르면 이런 조직의 중간관리자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책임질 만한 결정적 지시를 하지 않는다. ‘하라’ ‘하지 마라’ 같은 결정을 내리는 대신 회의석상에서 격렬하게 몰아붙인다. 비난하고 비아냥거린다. 이런저런 소문을 생산한다. 상대방이 스스로 지쳐 나가 떨어지게 만드는 신묘한 능력을 갖추고 있다. 그래야 나중에 책임질 일이 없기 때문이다. 이런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능력이고, 치열한 승진 경쟁에서 살아남는 비결이다. 어떤 문제가 있는지 알아도 눈을 감고, 자기 입으로는 진실을 말하지 않는다. 당연히 전문가 역량 축적은 뒷전이다. 현장은 머리로만 알면 되니 사무실에 앉아 진급 사업에 열중한다.
 
이 정도만 해도 조직생활이 힘들어지는데, 현실은 그의 경험을 넘어설 때가 많다. 임기응변이 중요하니 정확한 업무 지침이나 원칙, 매뉴얼 같은 게 있을 수 없다. 상황에 따라 일이 달라져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니 해야 할 일을 올곧게 추진하기 어렵다. 아니 하지 않는다. 문제가 생기면 그때는 ‘어쩔 수 없었다’고 하고,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했지만…’이라고 한다.
 
높은 분들은 어떨까? 시급하게 해결해야 하지만 골치 아픈 문제는 모르는 것인지, 모르는 척하는 것인지 모를 행동을 한다. 사실 알고 싶어 하지 않는다. 현장의 나쁜 상황을 보고 받는 것 자체를 꺼린다. 알면 결정을 내려야 하는데 그러면 책임을 져야 하지 않은가. 몰라야 나중에 문제가 됐을 때 “몰랐다”고 할 수 있다. 눈치 빠른 부하들이 이걸 모를 리 없다. 보고가 올라가지 않게끔 조치한다. 분명히 있는 일인데 없는 일처럼 상황을 조성한다. 이런 조직에서는 누구나 아는 공식이 존재한다. ‘책임은 네가 지고 공은 내가 갖는다’. 뭔가가 잘못되면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책임은 실무자의 것이 된다. 성공하면? 당연히 윗분의 공이다.
 
이런 한국식 융통성 전문가들에게는 두 가지가 없다. 책임감과 부끄러움이 없거나 절대 부족하다. 전문성(능력)이 없으니 책임감이 없고, 철학과 윤리가 없으니 부끄러움이 없다. 대신 잘 아는 게 있다. 자신들의 능력인 융통성이 다른 조직에서는 잘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안다. 그래서 어떻게든 지금 있는 곳에 붙어 있으려 한다. 악착같이 매달린다. 실력 있는 사람들이 허망하게 한숨 지으며 떠나도 이들은 떠나지 않는다. 끝까지 붙어 있는다. 또 하나, 이들은 사람을 전문성이 아니라 인간성으로 판단한다. 물론 이들이 좋아하는 인간성은 말 잘 듣고 순응하는, 자신들에게 편한 성향이다.
 
이런 일이 횡행하는 조직은 책임감, 부끄러움과 더불어 한 가지가 더 없다. ‘해결’이 없다. 무엇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되는 일이 없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다. 일이 생기면 개인을 희생시켜 굴러간다. 누군가를 희생양 삼아 위기를 넘긴다. 이국종은 자신의 경험을 이렇게 말한다. “책임과 지난함은 ‘다음’ 사람의 몫으로 남겨진다. 문제를 확산시킨 책임자들은 대부분 다른 부서로 전출 갔거나 일부는 이미 퇴직했으므로, 정작 조직이 쑥대밭이 됐을 때는 책임소재마저 아득해져 따져 물을 수조차 없다. 그러므로 문제가 있어도 지금 자리한 이들 중 일부는 앞날을 걱정하지 않고 제 잇속을 챙기거나 마땅히 해야 할 일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한국식 융통성에는 책임감·부끄러움 없어 
일 좀 하려는 사람은 이런 현실에 생각을 멈춘다. 생각해봤자 답답하고 손해만 보니 그럴 수 밖에 없다. 다행히 이국종과 그의 팀은 아직까지 살아있다. 더디지만 성장하고 있다. ‘냉혹한 현실에서 업의 본질을 지키며 살아가고자, 각자가 선 자리를 어떻게든 개선해보려 발버둥 치다 깨져나가는 바보 같은 사람들’ 덕분이다. 무엇보다 뚜렷한 목표를 가진 사람은 헤맬지언정 정처 없이 떠돌거나 쉽게 떠내려가지 않는다는 걸 그와 그의 팀이 보여주고 있다. 험한 파도가 유능한 뱃사공을 기르는 것처럼 그들도 위기를 동력 삼아 강해져 가고 있는 것 같다. 지금은 핍박 받는 미운 오리 새끼이지만, 결국 백조가 되지 않을까 싶다.
 
우리 주변의 많은 조직도 비슷하다. 이런 이들의 숨은 분투 덕분에 그나마 조직이 굴러간다. 원래 융통성은 좋은 것이다. 요즘처럼 변화가 빠른 불확실성 시대에 필수적인 생존의 조건이다. 생명의 역사 36억년 동안 일관성 있게 나타나는 생존의 조건은 예상치 못한 변화에 얼마나 잘 대처하고 적응하는가 하는 능력이었다. 진화가 알아낸 불확실성 타개책이었다. 건강한 융통성이야말로 건강한 조직이 되는 지름길이다. 일하는 사람을 도와주지는 못할 망정 가로막거나 방해하지는 말아야 한다.
 
※ 필자는 인간자연생명력연구소 소장이다. 조직과 리더의 지속가능한 성장을 위한 콘텐트를 연구하고 있다. 저서로 [사장으로 산다는 것] [사장의 길] [사자도 굶어 죽는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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