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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사업·봉사…모두 맥주 좋아해서 하게된 일?

중앙일보 2018.12.05 09:01
[더,오래]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11)
군대를 다녀온 남자라면 군 생활했던 방향으로는 오줌도 안 눈다는 우스갯소리의 의미를 알 것이다. 나 또한 전방에서 근무했던 기억을 떠올리면 그 방향으로 다시는 안 가겠다고, 특히 걷는 일은 웬만하면 피하겠다고 다짐한 적이 있다. 그러던 내가 옛 근무지를 자주 찾고, 특히 보병 출신인 내가 걷기를 즐기고 취미로 삼았으니 군대 갔다 온 남자들의 말이 모두 사실은 아닌 듯하다.
 
그 지겹던 걷기가 취미가 되고, 봉사활동이 되고 나아가 인생후반부 좋은 인연들을 맺게 하는 걸 보면 말이다. 취미가 봉사가 되고, 좋은 인연을 만나게 된 사연은 이렇다.
 
걷기 봉사 후 푸르메재단 백경학 이사의 저서 '유럽맥주여행'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는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 [사진 한익종]

걷기 봉사 후 푸르메재단 백경학 이사의 저서 '유럽맥주여행'을 들고 기념 사진을 찍는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 [사진 한익종]

 
집에서 사무실까지의 출퇴근을 통해 걸으면서 건강도 챙기고 버스비를 아껴 여행에서 쓸 요량으로 마시멜로 박스라는 걸 만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출퇴근 길에 있는 푸르메재단에 ‘백경학과 함께 하는 맥주 이야기’라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는 걸 보고 맥주 좋아하는 내가 그 토크쇼에 들른 것이 푸르메재단과 인연의 시작이다.
 
장애어린이들의 치료와 재활을 위한 푸르메재단에 마시멜로 박스에 모아 둔 여행경비를 성금으로 기부했다. 그러던 것이 걷기 1m당 1원씩 적립하는 ‘푸르메재단 한걸음의 사랑’이라는 걷기 봉사모임을 이끌며 오늘에 이르게 됐다.
 
취미인 걷기와 맥주 즐기기가 봉사활동으로 승화됐고, 내 인생후반부의 멘토 백경학 이사와 그 밖의 아름다운 이들과 인연을 맺게 된 것이다. 백 이사도 취미가 준 선물로 봉사재단을 설립했다.
 
가슴 아픈 사연을 안고 있지만 그 아픈 추억을 봉사와 기여라는 새로운 세계로 승화한 백 이사도 취미인 맥주 즐기기가 아니었으면 오늘의 푸르메재단을 설립하지 못했을 수도 있었겠다고 생각한다. 맥주 마니아인 백 이사는 기자 시절 가족과 함께 언론재단의 장학생으로 맥주의 본고장 독일로 맥주를 즐기기 위해(?) 유학을 떠났다.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즈음에 대형 교통사고로 아내를 잃을 뻔한 아픈 사연을 겪는다. 귀국 후 제대로 된 치료와 재활서비스를 받지 못하는 이 땅의 장애어린이들을 위해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 서울 명동에 옥토버페스트라는 맥주 공장 겸 펍을 차렸다. 그 후 회사지분과 아내에게 지급된 피해보상금으로 푸르메재단을 설립했다.
 
푸르메재단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의 걷기 봉사 후 기념 사진. 걷기라는 취미를 통해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사진 한익종]

푸르메재단 한걸음의 사랑 회원들의 걷기 봉사 후 기념 사진. 걷기라는 취미를 통해 봉사활동도 할 수 있다는 걸 잘 보여준다. [사진 한익종]

 
백 이사는 농담 삼아 말한다. 맥주가 아니었으면 독일유학도, 오늘의 푸르메재단도 없었을 것이라고. 나는 진심으로 말한다. 취미인 걷기와 맥주가 아니었으면 봉사도, 푸르메재단과 인연도, 백 이사를 포함한 좋은 사람들과 인연도 없었을 거라고.
 
결국 좋아하는 취미인 걷기와 맥주를 봉사라는 영역으로 확대했고 인생후반부 가장 중요한 인연을 맺게 했으니 내 봉사 예찬론은 이래저래 빛을 보는 셈이다. 혹자는 내 경우를 특별한 사례로 얘기하기도 한다.
 
오랜 내 친구로부터 은인 대접을 받는 계기가 있었다. 한걸음의 사랑 제2주년 기념 정호승 시인과 함께 하는 작은 시 여행이라는 걷기 행사를 며칠 앞둔 어느 날, 친구로부터 급한 전화를 받았다. 꼭 참석하게 해 달라고. 시를 좋아하고 특히 정호승 시인의 시를 매일 필사하며 감상하는 그로서는 정호승 시인을 만나는 자리가 평생의 로망이었다. 그 친구 또한 취미와 봉사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었다.
 
엄홍길 대장을 그리던 여러 사람이 걷기 봉사를 통해 그와 마주해 행복해하는 것 또한 취미가 봉사가 되고, 봉사를 통해 좋은 인연을 맺는다는 내 지론을 확인한 사례이다.
 
좋아하는 일이 봉사가 되고 봉사가 좋아하는 일이 되어야
벽화 소모임 자원봉사자들이 부산 소녀상 지키기 벽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우리는 봉사와 기부의 범위를 너무 작게 잡는지도 모른다. 봉사를 취미로 여기고, 취미를 봉사로 만드는 것은 취미생활이 봉사가 되게 한다. 봉사를 취미생활로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송봉근 기자

벽화 소모임 자원봉사자들이 부산 소녀상 지키기 벽화 그리기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모습. 우리는 봉사와 기부의 범위를 너무 작게 잡는지도 모른다. 봉사를 취미로 여기고, 취미를 봉사로 만드는 것은 취미생활이 봉사가 되게 한다. 봉사를 취미생활로 해 보는 것은 어떨까? 송봉근 기자

 
봉사를 꺼리거나 그건 나와는 다른 사람이 하는 일이라고 보는 이유는 무얼까? 그건 봉사를 어려운 일, 즐길 수 없는 일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봉사를 취미로 여기고 취미를 봉사로 만들면 어떨까? 즐거워서 하는 일이니 오래 할 거고, 하면 즐거우니 질과 양에서 남다르지 않을까.
 
우리는 어쩌면 봉사와 기부의 범위를 너무 작게 잡는지도 모른다. 자신이 좋아하는, 즐기는 일 중에 봉사와 연계할 수 있는 범위를 한 번 생각해보자. 이 세상에 봉사할 수 없는 일이란 없고, 봉사와 기부를 할 수 있는 사람이 따로 정해지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우스갯소리로 남에게 맛있는 무얼 사주는 게 행복하다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에게 봉사와 관련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간접 봉사도 훌륭한 봉사이니 맛있는 거 사 들고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하는 소방서, 파출소, 미화 요원들을 찾아가 보라고.
 
비약인지는 모르지만 비슷한 사례도 있다. 모태신앙으로 기독교 신자인 나는 전국의 사찰을 찾으면 으레 불전함에 돈을 넣는다. 한번은 기독교 신자인 어떤 사람이 나에게 핀잔을 준다. 내 대답은? 내가 종교적인 측면에서 헌금하는 게 아니라고. 좋은 경관, 문화유산을 즐기게 하기 위해서 노력해준 데 대한 고마움의 표시라고.
 
봉사의 영역과 구분을 너무 일에 국한하지 말자. 봉사도 즐길 거리라고 생각해 보자. 그런 생각은 봉사를 취미로 여기게 하며, 취미생활이 봉사가 되게 한다. 그리고 그런 봉사는 좋은 인연을 맺게 한다.
 
봉사를 통해 만난 인연이 실망을 주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아름다운 생각과 아름다운 행동을 하는 사람이 남에게 폐를 끼치겠는가? 인생후반부를 준비하는 이들에게 강조하는 바가 있다. 내 자존감을 높이고 좋은 인연과 함께 인생후반부를 즐겁게 살고 싶다면 봉사를 여가로 만들어보라. 봉사를 취미생활로 해보라.
 
한익종 푸르메재단기획위원 immagic5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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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익종 한익종 푸르메재단기획위원 필진

[한익종의 함께, 더 오래] 봉사는 자기애의 발현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자만이 남에게 봉사할 수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사회적 연대가 줄면서 자존감이 떨어지는데 봉사는 나를 필요로 하는 대상을 찾아, 내 존재를 확인하게 해준다. 내 존재를 확인하고 나를 사랑할 수 있는 것이 봉사다. “봉사하라, 봉사하라! 오래 가려면 함께 하자”고 외치는 필자의 봉사 경험을 통해 봉사가 어렵고 거창한 것이라는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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