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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진보 어른 백낙청의 회고

중앙일보 2018.12.04 00:28 종합 27면 지면보기
신용호 정치국제에디터

신용호 정치국제에디터

“정권의 탄압이나 출판사 등록취소 같은 창비의 수난과 구별되는, 백낙청 개인이 힘겹고 위태롭게 느낀 순간이 따로 있을 거 같습니다”(한영인 문학평론가)
 

탄압보다 힘든 건 직원 월급 주는 것
이념과 장사를 결합하는 고민 필요

“내가 진짜 힘들었던 거는 탄압받고 그런 게 아니고 (창비 초기) 구멍가게 하던 시절에 돈이 안돌아서 직원 월급 간신히 주고 어음 막고 그런 일이었습니다. 그게 참 힘들었어요.”(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
 
이 대화는 『창비와 사람들-창비 50년사』(2016년)에 나오는 대목이다. 66년 계간 『창작과비평』이 첫선을 보인 후 50주년이 되던 해 이를 기념하기 위해 펴낸 책이다.
 
지인과 대화 중 우연히 이 글을 접했다. 이 시대의 대표적인 진보이론가이자 지성인 그에게서 듣는 말로는 의외였다. 70~80년대 엄혹했던 시절 계간지 창비는 실천적 지성의 이론적 토대로 시대정신을 이끌었다. 창비의 시와 소설은 우리 문학계의 큰 줄기인 민족문학론의 토대가 됐다. 그 중심에 있었던 그가 50년간 창비를 이끌며 가장 힘들었던 게 창비의 수난보다 직원 월급 주는 일이었다는 거였다.
 
그가 말하는 이념과 장사에 대한 생각을 더 들어보자. “창비가 고비용 구조라 사업성(장사)에 한계가 있는데 이걸 운동성(이념)과 결합하는 문제를 계속 고민해왔어요 …사농공상(士農工商) 중 거리가 제일 먼 사와 상을 결합시키는 시도를 오랜 시간에 걸쳐했지요… 옛날 선비들이 으레 병서(兵書)를 읽고 병학을 중시했는데 현대의 병학이라면 경영학이 거기에 해당되지 않느냐 싶어요. 오늘날 진짜 큰 싸움은 돈싸움이에요… 오늘의 지식인은 경영을 통해 얻는 현실에 대한 지식과 감각을 갖춰야 현실을 올바로 진단해 대응책을 제시할 수 있을 겁니다.”
 
백낙청의 나이 이제 여든이다. 한 평생 선비였던 그의 경험담은 진보적 이론가로서의 멋은 덜하지만 이 시대를 가로지르는 진리가 담겼지 않나 싶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 글을 옮겨 적는 건 문재인 대통령과 참모들이 백낙청의 시각을 잘 살펴봤으면 하는 마음 때문이다. 특히 청와대 참모들이 운동권 출신이 많은 반면 기업을 직접 경영해본 이들은 적다는 점에서 더 그렇다.
 
청와대는 아직도 경제 정책 기조의 방향이 맞다는 입장이다. 김수현 신임 청와대 정책실장은 취임 후 “소득주도성장과 혁신성장, 공정경제를 통해 포용국가를 달성하겠다는 방향은 명확하다”고 했다. 하지만 청와대 일각에서도 포용국가가 어떤 내용인지 잘 모르겠다는 말이 나온다. 국민들의 피부에 와 닿지 않기 때문이다. 여권 핵심 인사는 “문 대통령이 최근 장관이나 참모들을 질책했다는 얘기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도 대놓고 말은 못하지만 비판이 적지 않다. 특히 비문 의원들을 중심으로 그런 분위기가 강하다. 학생 운동 경험이 있는 한 의원은 “개혁작업은 그대로 해나가더라도 대기업이 투자를 늘릴 수 있도록 하는 일도 해야 할 것 아니냐”며 “지지층 비판을 받더라도 먹거리는 만들어야 한다. 친기업 소리 좀 들으면 어떠냐”고 말했다. 그러면서 “북한과의 관계 개선이 경제 문제를 풀어줄 거라 하는데 언제 될 지도 모르는 일이고 명분에 매이지 않는 획기적 방안을 찾아야 한다”고 덧붙였다.
 
다행히 최근 청와대 내의 기류 변화가 감지된다. 청와대 고위 인사가 기업인들을 만나기 시작했다거나 가급적 소득주도성장 같은 말은 전면에 내세우지 않기로 했다는 등의 얘기다. 정책의 전면적 변화는 아니라도 위기 의식은 갖고 있다는 반증이다. 한 청와대 관계자는 “혁신성장이든 공정경제 등 작동해야 하는 게 중요하다. 실제 현장에서 느끼고 있는 것들을 면밀히 살펴보고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 정도로는 안된다. 상황이 정말 녹록지 않다. ‘568만’ 자영업자의 위기설은 어제 오늘 일이 아니고 문 대통령의 지지세력이었던 20대도 떠나가고 있다.
 
순방 중인 문 대통령이 공군1호기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경제 성과에 대한 질문이 나오자 그는 “약속을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지만…”이라고 양해를 구한 뒤 외교 문제에 대해서만 답했다. 아쉬운 대목이다. 경제 사정이 좋았다면 그랬을까 싶어서다.
 
백낙청의 글을 옮기며 그의 생각의 일단은 전했으리라 싶지만 진보의 어른인 그를 문 대통령이나 참모들이 직접 만나보는 건 어떨까. 진보 지사가 아니라 경영을 해본 진보 어른으로 말이다. 백낙청이 던지는 ‘월급 간신히 주는 어려움’을 놓고 청와대가 깊이 고민해볼 시점이다.
 
신용호 정치국제에디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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