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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정호의 시시각각] 헛다리 짚은 문 대통령의 체코행

중앙일보 2018.12.04 00:18 종합 30면 지면보기
남정호 논설위원

남정호 논설위원

뒷말 무성한 지난주 문재인 대통령의 체코 방문은 알고 보니 심한 헛다리 짚기였다. 문 대통령은 아르헨티나 G20 회의 가는 길에 체코에서 원전 수주를 위한 정상외교를 폈다는 게 당국의 설명이다. 하지만 당시 체코 대통령은 출국 중으로 주인 없는 집에 간 셈이다. 더 심각한 건 기껏 가봐야 원전 수주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상황이었다는 점이다.
 

국가수반 아닌데도 ‘정상회담’ 주장
대통령·총리, 한국에 공사 줄 리 없어

서울의 땅 밑을 파 내려가면 우루과이 앞바다가 나온다. 대척점으로 불리는 이곳은 마침 아르헨티나 바로 옆이다. 대척점까지는 동서남북 어느 쪽으로 가도 여행 시간이 같다. 지구가 둥근 탓이다.
 
직항으로도 25시간 이상 걸리는 아르헨티나는 한번에 가기엔 너무 멀다. 그래서 급유도 할 겸 대개 중간에서 하루이틀 쉬었다 간다. 문 대통령 일행도 그랬다.
 
결국 어디에 들를 건지가 문제였을 거다. 비행 10~14시간 정도의 나라면 어디든 괜찮은지라 유럽·중동·호주, 심지어 중앙아메리카 등 여러 곳이 고려됐을 게 분명하다. 체코로 낙점됐다면 이곳을 방문할 뚜렷한 이유가 있는 게 당연했다.
 
당국은 원전 사업을 따내기 위해 문 대통령이 체코에 가 정상외교를 벌였다고 한다. 하지만 이는 물정 모르는 소리다. 우선 국가수반인 밀로시 제만 대통령이 이스라엘에 가느라 없었다. 외교부는 “실질적인 정부 운영권이 총리에게 있다”며 안드레이 바비시 총리와의 만남을 사실상의 정상회담이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체코에서는 대통령이 총리를 임명한다. 2016년 체코에 온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을 상대한 것도 제만 대통령이었다. 누가 봐도 대통령이 정상이다.
 
게다가 체코 정부가 이번 만남을 비공식 회담으로 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외교부는 “대통령이 없는 데 공식적인 정상회담을 갖는 건 곤란하다는 게 체코 측 입장”이라고 해명했다. 스스로 정상회담이 아님을 실토한 꼴이다.
 
더 어처구니없는 건 방문의 실효성 여부다. 자리를 비운 제만 대통령은 유명한 친러파다. 그가 대놓고 러시아의 원자력 회사 로사톰을 민다는 건 현지 언론에도 보도된 공지의 사실이다. 바비시 총리는 지난 10월 아예 “새로 짓지 말고 기존 원전을 10년 더 쓰자”고 주장한 인물이다. 이 나라의 대통령, 총리 모두 한국에 원전 사업을 맡길 생각이 손톱만큼도 없는 것이다.
 
이런 데도 문 대통령이 왜 굳이 체코에 들렀는지 이해가 안 된다. 세계 각지에 외교 현안은 산처럼 쌓여 있다. 원전 수주 경쟁은 사우디·폴란드 등 세계 도처에서 벌어진다. 아르헨티나의 G20 개최가 결정된 건 2016년 말. 2년간의 여유가 있었음에도 대통령의 외국 방문이 이렇듯 허술하게 이뤄졌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이번뿐이 아니다. 지난 10월에 이뤄진 유럽 순방 때는 양쪽 간 이견으로 한·유럽연합(EU) 간 공동성명이 나오지 못했다. 사상 처음이다. 또 지난달 29일에는 한·미 정상회담을 두고 미국 측이 ‘풀어사이드(pull aside·약식회담)’로 급을 낮추겠다고 했다 소동이 났다. 외교 당국이 잘만 챙겼다면 막을 수 있는 사안들이었다.
 
전직 고위 외교관들은 하나같이 "요즘 외교부의 사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잘 돌아가지 않는다”고 한탄한다. 이는 무엇보다 청와대의 ‘외교부 패싱’ 탓이 크다. 외교를 전문가에게 맡기지 않고 청와대가 혼자 주무르려 하니 될 턱이 없다.
 
부패 정권 심판은 열정과 정의감만으로도 가능하다. 하지만 경제는 물론이고 외교·안보 역시 노련한 경험과 전문 지식이 필요하다는 걸 정권 핵심은 깨달아야 한다.
 
남정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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