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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상유이말<相濡以沫>

중앙일보 2018.12.03 00:16 종합 30면 지면보기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

장자(莊子)가 길을 가다 어느 말라비틀어진 연못 안을 들여다봤다. 물고기 두마리가 배를 허옇게 드러내고 있었다. ‘곧 죽겠구나’했는데 다음날 가 보고는 놀랐다. 두 마리가 여전히 살아 있었다. 서로 거품을 내 상대 몸을 적셔가며 버티고 있더란다. 여기서 비롯된 고사성어 ‘상유이말(相濡以沫, 거품으로 서로를 적시다)’은 어려운 상황에서 작은 힘이나마 보태 남을 돕는 행동을 비유한다.
 
의미가 훈훈하다 보니 ‘상유이말’은 외교 테이블에 왕왕 오른다. 최근엔 박원순 서울시장이 중국 베이징을 방문한 자리에서 인용했다. 박 시장은 지난 26일 천지닝 베이징 시장에게 “서울과 베이징 청년들이 양국을 방문해 창업도 하고 교류를 강화하길 바란다. 서울시는 중국 청년들의 창업도 지원하고 있다”고 덕담했다.
 
외교 무대에서 베이징 시정부와 중국 청년들에게 좋은 취지로 건넨 말이 무슨 문제랴만, 상유이말의 위로와 보듬음이 절실한 계층은 국내에 무척 많다.  
 
덕담이 오가던 그날, 서울역에서는 중소기업진흥공단과 코레일이 주최한 ‘서울 청년 채용 박람회’가 열렸다. 제대를 앞둔 군 장병부터 실업계 고등학생들까지 단체로 찾았다. ‘내 몸 하나 일할 곳’을 찾으려는 절절한 발걸음이 이어졌다.
 
좁은 취업문 앞에서 절망하는 청년층은 서울교통공사 등 공기업의 고용세습 의혹에 또 한번 좌절하고 있다.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사회여론연구소’가 23~24일, 전국 19세 이상 1015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여론조사에서 ‘공기업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 과정에서 채용 비리가 있었을 것으로 보느냐’는 질문에 무려 90.1%가 “있을 것”(매우 많을 것 46.1%, 어느 정도 있을 것 44.1%)이라고 답했다. 20대와 30대에서 “있을 것”이라고 보는 답변은 평균치보다 높았다. 기성 세대에 대한 분노와 불신으로밖에는 설명이 안 되는 대목이다. 고용세습 의혹이 확산되면서 대학생들 사이에선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는 자조 섞인 농담이 유행이다.
 
대학생뿐이 아니다. 준공영제에 동참 중인 서울의 버스 사업자들도 절박하다. 버스운송 수입 중에 서울시가 버스 사업자들에게 나눠줘야 할 정산금 약 500억원이 11개월째 지급되지 않고 있다. 추석 전에 들어왔어야 할 성과이윤 230억원도 서울시는 지난달 하순에야 지급했다.
 
“한 분의 삶도 놓치지 않고 살피겠다. 한 분의 이야기도 소홀히 듣지 않겠다.” 다섯 달 전 박원순 후보는 서울시장 당선 소감에서 이렇게 밝혔다. 상유이말의 정신이, 보살핌이 시급한 분들에게 먼저 발휘되길 기대한다. 일의 선후가 바뀐 걸 뜻하는 본말전도(本末顚倒)라는 말도 있다.
 
박태희 내셔널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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