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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의 글로벌 줌업]시베리아 휩쓴 '설국열차'의 체코군단 무기가 독립군 청산리 대첩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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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시베리아 휩쓴 '설국열차'의 체코군단 무기가 독립군 청산리 대첩 이끌었다

중앙일보 2018.11.30 04:00
체코를 방문한 문재인 대통령이 100년 전 인연을 강조하면서 새삼 당시 역사에 관심이 쏠린다. 문 대통령은 28일(현지시간) 프라하 시내 힐튼호텔에서 현지 동포·기업인과의 간담회 자리에서 “3·1 운동이 체코 신문에 크게 보도돼 중유럽과 동유럽에 이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고 지적했다. 이어 “1919년 극동지역에서 볼셰비키와 전투 중이던 체코슬로바키아 군대가 우리 임시정부 대표들과 여러 차례 교류했다”며 “당시 한국 독립군이 체코 군대로부터 사들인 무기를 사용해 크게 이긴 게 청산리 대첩"이라고 말했다.    
19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중앙포토]

19920년 6월 봉오동 전투와 10월 청산리 대첩을 이끈 독립운동가 홍범도 장군. [중앙포토]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중앙포토]

청산리 전투를 지휘한 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 [중앙포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소장한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 맥심 기관총과 모신나강 소총이 보인다. [중앙포토]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이 소장한 민족기록화 '청산리 전투'. 맥심 기관총과 모신나강 소총이 보인다. [중앙포토]

약소민족 ‘독립 의지의 꽃’ 체코군단
문 대통령이 말한 ‘체코 군대’는 제1차 세계대전(1914~18년) 당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군대에 징병 돼 전선에 배치됐다가 러시아군에 포로가 된 뒤 독립을 위해 총부리를 거꾸로 돌린 ‘체코 군단’을 가리킨다. 러시아군 속의 체코 군인들이다. 이들을 포로수용소로 가는 대신 러시아군의 지원을 받아 러시아 군복을 입고 러시아제 무기를 든 채 전선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나 독일군에 맞섰다.  
 
이들은 1914년 7월 제1차 세계대전이 터지자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토였던 체코와 슬로바키아에서 징집된 군인이다. 전쟁 발발 전 합스부르크 왕조가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은 헝가리 의회를 분리해 이중 제국을 이뤘다. 오랫동안 체코를 이룬 보헤미아와 모라비아 지역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지역은 헝가리의 영토였다. 합스부르크는 체코 지역에도 별도 의회 설치를 허용해 삼중제국을 만들려고 하다가 세계대전을 맞았다.  
지붕 위에서 열차를 호위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인 체코군단, [사진 위키피디아]

지붕 위에서 열차를 호위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인 체코군단, [사진 위키피디아]

 
체코 군인들 러시아에 항복해 총부리 돌려
체코 징집병들은 러시아와 싸운 동부 전선에 가장 많이 배치됐다. 이 과정에서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독일이 소속된 동맹군이 아닌 연합군 편에서 싸우면서 나중에 독립 국가를 건설할 꿈을 꾸었다. 모든 슬라브족이 하나의 공동체를 구성하자는 ‘범슬라브주의’의 영향도 있었다. 19세기 말부터 고향을 떠나 러시아로 망명해 살았는데 일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은 러시아의 편에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맞서 싸우는 것이 독립에 유리하다는 입장이었다. 징집돼 전선에 투입된 체코와 슬로바키아 청년 사이에서 이에 동의하는 움직임이 일어 기회가 되면 러시아군에 투항했다. 일부는 의도적으로 집단 탈영해 러시아 쪽으로 귀순하기도 했다.  
 열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인 체코군단의 단체 사진,[사진 위키피디아]

열차로 시베리아를 횡단하며 블라디보스토크로 이동 중인 체코군단의 단체 사진,[사진 위키피디아]

1914년 8월 러시아군 최고사령부는 전쟁포로를 포함해 러시아 제국 내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들로 구성된 부대의 구성을 승인했다. 러시아 군복을 입고 러시아제 무기를 든 체코와 슬로바키아 출신 군인들은 그해 10월 러시아 제국 육군 제3군 산하로 배속돼 최전방인 갈리시아 전선으로 보내졌다. 갈리시아는 현재 폴란드 동남부와 우크라이나 서북부를 이루는 지역으로 당시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영토였으며 1차대전 당시 격전지였다. 체코인들은 러시아 외에도 프랑스, 이탈리아, 세르비아 전선에서도 싸웠다. 이들을 '체코군단'이라고 부른다.  
 
 6만 명이 넘는 체코 군단 장병이 열차로 시베리아를 횡단 중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6만 명이 넘는 체코 군단 장병이 열차로 시베리아를 횡단 중이다. [사진 위키피디아]

러시아 혁명 볼셰비키, 타협하고 전쟁 이탈
그런데 결정적인 문제가 생겼다. 러시아 혁명이다. 러시아에선 1917년 3월(당시 러시아 달력으론 2월)에 ‘2월 혁명’이 터지고 로마노프 왕조가 전복됐지만 새로 들어선 알렉산드르 케렌스키의 임시정부는 1차대전을 계속 치르기로 했다. 그런데 1917년 11월 7일(당시 러시아 달력으론 10월) 볼셰비키가 적위대를 동원해 임시정부 청사인 겨울궁전을 점령하는 ‘10월혁명’을 일으켜 정권을 탈취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임시정부를 전복하고 정권을 차지한 볼셰비키는 10월혁명 이듬해인 1918년 3월 러시아가 맞서 싸우던 동맹국(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불가리아, 오스만튀르크)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정을 맺고 서부의 광활한 영토를 포기한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그뿐만 아니라 볼셰비키가 정권을 차지하자 이에 반발하는 반혁명군이 백군을 조직해 저항에 나서면서 러시아 내전이 발발했다. 1922년까지 계속된 내전에서 적군 120만, 백군 150만의 사상자가 발생했으며 러시아 전역은 피바다가 됐다.  
 
러시ㅏ의 무장열차. [사진 위키피디아]

러시ㅏ의 무장열차. [사진 위키피디아]

“지구를 빙 돌아서라도 전투를 계속하겠다”
러시아군 속의 체코 군인들은 난처해졌다. 그들의 입장에선 자신들을 후원하던 제정 러시아가 몰락하고 권력을 차지한 볼셰비키는 중동유럽 슬라브계 소수민족을 지배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전투를 중지했기 때문이다. 이들에게 체코 독립운동 지도자였던 토마스 마사리크의 지침이 도착했다. “러시아 내란에 가급적 휘말리지 말고 목숨을 잘 보전해 서방으로 가라.” 서방은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과 계속 싸우고 있던 프랑스나 이탈리아 등의 서부 전선을 가리킨 것이었다. 
러시아군 소속 체코군단은 자체 무장력을 바탕으로 독자적인 부대를 조직해 행동에 들어갔다. 이들은 서부전선으로 가서 계속 싸울 방법을 찾았다. 처음에는 러시아 북부 아르한겔스크 항구를 통해 서방으로 가는 방법을 모색했다. 영국과 프랑스 등이 백군을 지원하기 위해 이 지역을 거쳐 군대와 선박을 보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전이 격렬하게 진행 중인 러시아 중심지를 거쳐 북부 항구로 가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  

서쪽은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에 막혀 있고 북쪽으로 가자니 내전이 한창인 상황에서 이들의 선택은 ‘동쪽’이었다. 결국 이들은 시베리아 철도를 이용해 비교적 전투가 ‘덜’ 격렬했던 시베리아를 거쳐 극동의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서방으로 가서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서부 전선에서 독일이나 오스트리아-헝가리 군대와 싸우려면 시베리아를 거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배를 타고 가는 수밖에 없었다. 지구를 한 바퀴 도는 긴 여정이다.  
 
체코군단, 시베리아에서 ‘설국열차’ 연출  
이들은 이동 수단인 열차 수백 량을 구해 여기에 병력은 물론 무기와 식량, 일용품을 싣고 유라시아 대륙을 동서로 관통해 러시아의 동쪽 끝, 태평양을 향했다. 수백 량의 무장 열차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시베리아를 횡단했다. 눈에 덮이고 사방이 온통 얼어붙은 겨울 시베리아를 지날 때는 영화 ‘설국열차’와 다름없는 절박한 풍경을 연출했을 것이다. 이 기나긴 열차 행렬에는 병영은 물론 병원과 우체국, 신문사, 은행까지 있었다. 체코인들은 의지와 시스템 모두를 갖추고 있었다.  
 
시베리아 횡단을 하다 잠시 정차한 틈에 열차 앞에 도열한 체코 군단 잗병.[사진 위키피디아]

시베리아 횡단을 하다 잠시 정차한 틈에 열차 앞에 도열한 체코 군단 잗병.[사진 위키피디아]

체코군단은 볼셰비키에 호의적이진 않았다. 하지만 서부전선으로 가는 일이 급했기에 이들과 싸울 때는 싸우고 협력할 때는 협력하면서 러시아 내전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필요하면 백군과 함께 이동하기도 했다. 그 반대로 백군 장군과 러시아 제국이 과거 소유했던 백금 등을 볼셰비키에 넘기고 동쪽으로 가는 열기도 했다.  
볼셰비키는 1918년 7월 17일 제정 러시아 마지막 황제 니콜라이 2세와 가족을 우랄 산맥 남부 예카테린부르크에서 집단 총살했는데 당시 체코군단이 이 도시로 접근하고 있다는 정보가 들어오자 초조한 나머지 일을 저질렀다는 주장도 있다. 당시 혁명에 반대하는 연합군은 체코군단의 철수를 돕기 위해 무기와 물품 등을 지원했다. 당시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도 실제로는 영토적 욕심에서 이뤄졌지만, 표면상 명분은 체코군단의 철수 지원이었다. 이처럼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횡단은 세계사적인 사건이다.  
체코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인 토마스 마사리크가 체코군단을 사열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체코 독립운동가이자 초대 대통령인 토마스 마사리크가 체코군단을 사열하고 있다 [사진 위키피디아]

 
블라디보스토크 점령하고 귀국 진행
체코군단이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와 제정러시아를 복구하려는 백군 사이의 내전이 한창이던 러시아와 시베리아를 거쳐 동쪽 바다에 도착한 것은 1918년 7월 6일이었다. 체코군단은 극동의 적군과 전투를 치른 끝에 블라디보스토크 항을 점령했다. 체코군단은 이 항구를 연합군 항구로 선포하고 모든 연합군 선박에 항만 시설을 개방했다. 몇 달 뒤인 1918년 11월 11일 독일이 항복하면서 1차대전이 끝났다.  
체코군단은 이곳에 1920년까지 머물면서 선박을 수배해 유럽으로 차례차례 떠났다.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에 주둔할 당시 발간한 신문 ‘덴니크’는 1919년 한국에서 3·1운동이 일어난 지 17일 만에 소식을 전했다. 그 뒤에도 두 차례 더 기사화했다. 세계사적 사건의 주인공인 체코군단이 또 다른 세계사적인 사건인 3.1운동에 관심을 가진 셈이다.  
 
가이다 장군, 독립군에 무기 넘긴 걸로 추정  
주목할 점은 당시 만주와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우리 독립군이 체코군단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이는 무기를 사용해 일본군과 전투를 치렀다는 사실이다. 체코군단은 보유한 무기를 잘 수습해서 가져갔는데 일부에서 유출됐다. 당시 체코군단의 라돌라 가이다 장군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다 비교적 나중에 귀국했는데 그가 지휘하던 부대가 보유 무기의 일부를 한국 독립군에게 넘긴 것으로 추정된다. 체코군단이 체코로 가져가 보관하던 유물 중에는 은비녀와 반지 등도 있다는 점이 유력한 근거다. 당시 독립군이 연해주와 만주에 이주한 우리 동포들로부터 이렇게 독립자금을 현물로 받아 이를 들고 체코 군단을 찾아가 무기를 구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청산리 항일 대첩기념비.[중앙포토]

중국 동북 지방에 있는 청산리 항일 대첩기념비.[중앙포토]

 
체코군단 무기는 미국이 지원
독특한 것은 체코군단이 보유하던 무기는 러시아제가 아니고 미국산이라는 점이다. 산업시설이 부족했던 제정 러시아는 자국 육군의 기본무기인 모신나강 소총(M1891)을 적기에 충분히 생산할 능력이 없었다. 그래서 1차대전이 발발하자 미국의 레밍턴사에 150만 정을, 웨스팅하우스사에 180만 정을 각각 주문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일어날 때까지 75만 정을 제작했는데 수송 문제로 47만 정만 납품했다. 혁명으로 납품을 못 하고 남은 28만 정은 미군이 인수했다. 일부는  러시아 혁명에 개입하기 위해 투입된 연합군에 공급됐다. 5만 정은 체코 군단에 공급됐다. 이 체코군단이 블라디보스토크를 떠나면서 일부 무기를 한국 독립군의 손에 들어온 셈이다. 우리 역사에는 체코 무기라고 알려졌지만 이는 미국산 러시아 소총이었다.  
독립군은 이 무기를 바탕으로 화력을 강화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홍범도 장군이 1920년 6월 6~7일 벌인 봉오동 전투, 홍범도 부대를 비롯한 독립군 연합부대가 10월 21~26일 치른 청산리 전투의 승리에서 사용된 무기가 이것으로 짐작할 수밖에 없다. 독립군 사진에서 보이는 무기는 맥심 기관총과 모신나강 소총으로 보인다. 게다가 당시 이 지역에서 이런 무기를 구할 수 있는 곳은 체코군단이 가장 유력하다. 물론 전투를 치르던 백군과 적군이 돈을 받고 팔았을 가능성도 있다. 체코군단의 시베리아 횡단은 물론 한국의 독립운동은 이처럼 대단히 국제화된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귀국한 체코군단을 황영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체코 영웅인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프라하의 바츨라프 광장에서 귀국한 체코군단을 황영하는 행사가 열리고 있다. 체코 영웅인 바츨라프의 기마상이 보인다. [사진 위키피디아]

 
체코군단의 프라하 개선 행진
체코군단 장병은 새로 생긴 조국의 수도 프라하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개선 행진을 했다. 프라하의 국립박물관에서 이어지는 바츨라프 거리는 개선 장병과 이들을 환영하는 군중으로 넘쳤다. 한국인에게 인기가 있는 관광지인 프라하를 방문하는 사람들이 한 번은 반드시 지나는 중심지다.   
체코군단은 남은 군자금으로 ‘체코군단 은행’을 설립해 운영했다. 이들은 시베리아를 횡단하면서 백군의 부탁을 받고 러시아 제국의 국고인 백금을 운반했는데, 적군에게 백군 지휘부와 함께 이 백금을 전량 넘겨주기로 하고 길을 무사히 통과한 적이 있다. 이 과정에서 러시아 백금을 일부 남겼다가 가져와 은행을 설립했다는 추측도 있다. 물론 확인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지식인들의 오랜 외교활동은 더불어 체코 군단의 활약상은 독립을 이룬 바탕이 됐다. 체코군단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1919년부터 1920년 중반까지 6만7739명이 귀국했다. 그사이 생긴 체코군단 병사들의 부인과 아이도 이 숫자에 포함됐다. 이들은 불굴의 인간 의지가 무엇을 만들 수 있는지를 우리에게 가르치고 있다. 
 
체코군단은행 [사진 위키피디아]

체코군단은행 [사진 위키피디아]

신생 체코슬로바키아도 한국과 인연 깊어  
체코군단이 지구를 빙 돌아 귀국했더니 전쟁은 이미 끝나고 신생 독립국 체코슬로바키아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서로 문화와 전통이 사뭇 다른 체코와 슬로바키아가 언어가 비슷하다는 이유로 역사상 처음 한 나라를 이뤘다. 하지만 체코슬로바키아에서 '벨벳혁명'을 통해 공산주의가 무너지고 민주 정권이 들어선 1992년 국민투표로 두 나라는 분리를 결정해 1993년 1월 1일부터 딴 나라로 갈라섰다. 
 
한국과의 인연은 1953년에도 계속됐다. 제2차 세계대전 뒤 체코슬로바키아는 소련의 위성국가가 돼 공산 체제를 강요받았다. 1953년 7월 27일 6·25전쟁 정전협정 뒤 중립국 감시위원회를 설치하면서 유엔군 측이 스위스와 스웨덴을, 중국 인민 지원군과 북한군은 폴란드와 체코슬로바키아를 선택했다. 이 때문에 한국에선 공산국가이자 소련의 위성국가인 체코슬로바키아가 중립국일 수 없다며 "체코슬로바키아 물러나라"는 구호를 외치며 곳곳에서 학생들을 동원한 데모가 벌어졌다. 지금 70~80세인 한국인 세대는 이때 처음으로 체코슬로바키아란 나라 이름을 들었다는 사람도 상당수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분리된 뒤 어느 나라도 중립국 감독위원회 업무를 승계하겠다는 나라가 없어 이들의 임무는 종료되고 폴란드만 남았다가 북한에 의해 축출됐다. 
50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언론과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개혁조치를 취한 '프라하의 봄' 당시 침공한 소련군 기갑차량이 시민들의 화염병 세례를 받고 있다.[사진 위키피디아]

50년 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이 언론과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개혁조치를 취한 '프라하의 봄' 당시 침공한 소련군 기갑차량이 시민들의 화염병 세례를 받고 있다.[사진 위키피디아]

 
올해로 반소항쟁 '프라하의 봄' 50주년  
체코슬로바키아가 올해로 50주년을 맞은 '프라하의 봄'도 한국에 잘 알려졌다. 1968년 1월 개혁파인 알렉산데르 두브체크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가 되면서 표현의 자유와 이동의 자유를 허용하는 조처를 하자 소련군은 그해 8월 바르샤바 조약기구 회원국과 함께 기갑부대를 동원해 체코슬로바키아를 침공했다. 프라하는 점령도시가 됐으며 소련군은 이 나라에 1989년까지 계속 머물렀다. '프라하의 봄'은 한국에 소련의 만행과 제국주의 본성을 잘 드러내는 사례로 소개됐으며 권위주의 시절에는 학교에서도 교육됐다. 
 
체코와의 인연 100주년 기려야 
2011년 8월 당시 주한 체코공화국 대사관의 야로슬라브 올샤 대사는 한국사 관련 자료들을 서울역사박물관에 기증했다. 이 가운데 체코군단이 1919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발간한 신문 '덴니크'의 원본이 포함됐다. 3·1운동에 대한 기사도 실은 그 신문이다. 체코와 한국은 내년에 100년 인연을 기념하게 된다. 거대한 역사 드라마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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