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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T업계 “연말 일감 쏟아지는데, 선택근로에 발목”

중앙일보 2018.11.27 00:02 경제 1면 지면보기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직장인들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야근하고 있다. 선택 근로제를 손질해 달라는 IT 업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서울의 한 사무실에서 직장인들이 불을 환하게 켜놓고 야근하고 있다. 선택 근로제를 손질해 달라는 IT 업계의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연합뉴스]

정보기술(IT) 서비스 업체 김모 팀장은 최근 포털시스템 구축 프로젝트로 골머리를 앓고 있다. 핵심 업무를 맡은 최모 과장이 2주간 평균 60시간을 일한 터라 이번 주는 조기 퇴근을 시켜야 했기 때문이다. 주 52시간제 시행 이후 회사는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도입했다.  
 

주 52시간을 1개월 단위 정산
업체 70%가 11~12월 초과 근무
한 달 내내 밤샘 해도 모자랄 판
“단위기간 3개월로 확대해야”

한 달 단위로 평균 근무시간이 주당 52시간이 넘지 않게 정산해야 하는데 최 과장의 근무 시간이 너무 길었던 것이다. 김 팀장은 “마무리 단계라 고객사에서 수시로 연락이 오는데 제대로 대응하지 못해 큰일”이라고 말했다.
 
주 52시간 근로제의 갑작스러운 도입 여파가 시스템통합(SI) 업체, 게임 개발사 등 정보통신기술(ICT) 업체 전반으로 확산되고 있다. 이들은 제조업종에서 주로 택하는 ‘탄력적 근로시간제’ 대신 ‘선택적 근로시간제’를 채택한 기업들이다.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그래픽=차준홍 기자 cha.junhong@joongang.co.kr]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유연 근로제의 일종으로 하루 8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한 달간 근무시간을 근로자가 자율적으로 조정하는 제도다. 다만 한 달 단위로 주당 평균 근로시간이 최대 52시간을 넘으면 안 된다.  
 
이동희 국민대 경영학부 교수는 “이론상으론 하루 20시간, 주당 60시간 넘게 일해도 상관없는 대신 한 달 평균은 주 52시간을 지켜야 하는 근무제도”라며 “정형화된 스케줄 없이 막판 납기일 때 일이 몰리는 고객맞춤형 지식산업 업종의 기업들이 주로 채택한다”고 설명했다.
 
업종 특성에 맞는 제도지만 근로시간 단위 기간이 한 달로 비교적 짧은 점이 고민거리다. 대규모 IT 프로젝트의 경우 마지막 2~3개월 사이 집중적으로 업무량이 늘어나는 경우가 많아서다. 특히 공공사업 프로젝트 종료 시점이 몰려 있는 연말은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지난 3월 한국소프트웨어(SW)산업협회가 회원사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한 결과 11월엔 71.8%의 기업이, 12월엔 74.4%의 기업이 초과근무가 발생한다고 답했다. 하지만 선택적 근로시간제 도입 이후엔 아무리 바빠도 2주간 집중적으로 일하면 남은 2주는 조기 퇴근해 평균을 맞추고 있다. 성욱준 서울과학기술대 IT정책전문대학원 교수는 “업계 상황과 맥락을 충분히 살펴보지 않은 채 정한 단위 기간”이라고 지적했다.
 
게임업계도 상황이 어렵긴 마찬가지다. 모바일 게임 업체에 근무하는 이모(38)씨는 지난 한 주간 오전 10시에 출근해 오후 4시에 퇴근했다. 수년간 공들여 개발해 온 게임을 시험해 보는 포커스그룹테스트(FGT)를 진행하고 있었지만 직전 2주간 오전 10시부터 오후 11시까지 일한 탓에 어쩔 수 없었다. FGT 이후 정식 게임 출시까지 클로즈 베타, 오픈 베타 등 시험운영 기간이 이어지는데 걱정이 태산이다. 이씨는 “개발팀 전원이 제각각의 전문 분야를 갖고 일하는 형태라 내 일을 누가 대신할 수도 없어 막막한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상황이 어렵지만 개선 여부는 불투명하다. 정치권과 노동계에선 현재 3개월인 탄력적 근로시간제의 단위기간 연장 방안만 논의 중이다. 탄력적 근로시간제는 사전에 일별 근무편성표를 작성하면 최장 3개월간 평균 주당 52시간을 맞추면 된다. 다만 주당 최대 64시간이 넘게 초과근무를 시킬 수는 없다.  
 
반면 선택적 근로시간제는 사후에 근로시간을 정산하며, 하루 최대 근로시간 제한이 없어 일이 갑자기 몰리는 IT 기업들에 적합하다. 단위 기간은 한 달이다. 한국정보산업연합회 손정배 팀장은 “산업계를 대변하는 회사들이 대부분 전통 제조업체다 보니 그쪽 얘기만 공론화된다”며 “IT 업계에선 사활이 걸린 얘기인데 너무 소외되고 있다”고 호소했다.
 
현재 추경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지난 7월 선택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현행 1개월에서 3개월로 확대하는 근로기준법 개정안을 내놨지만 논의는 답보상태다. 지난 21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열린 ‘IT 서비스 미래포럼’에서 ICT 컨설팅 업체인 KRG의 김창훈 부사장은 “IT 서비스 산업 특성을 고려할 때 선택적 근로시간제 단위 기간을 현행 1개월보다는 더 연장할 필요가 있는데 지금은 탄력적 근로시간제 연장만 논의되고 있어 안타깝다”고 말했다.
 
하지만 기간을 함부로 늘리는 것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김진 법무법인 지향 변호사는 “기간을 무작정 늘리면 중소규모 IT 기업에 취업한 청년층의 노동 시간이 과도하게 늘어나 건강과 안전을 위협받을 수 있다”며 “적절한 대안과 함께 논의가 진행돼야 할 것”이라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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