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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록에 없는 토박이 음식 찾아 전국여행…‘입말음식 연구가’

중앙일보 2018.11.27 00:01 종합 20면 지면보기
“한국이 좁다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전국 곳곳의 농가를 다니며 부엌에 들어설 때마다 다채로움에 놀랐죠. 지역마다 내려오는 내림 음식이 있고, 그 음식 하나만으로도 줄줄이 이야기가 이어지거든요. 예를 들어 진도에 계신 할머니가 보리빵을 주시길래 누구한테 배웠는지 물으면 이를 알려준 시어머니가 자신을 아껴주신 이야기부터 보리빵 만드는 씨앗, 동네 잔치 때 보리빵 나눠 먹던 얘기까지 이어져요.”
한국 고유의 식재료와 이를 일궈온 농부들을 소개하는 요리연구가 하미현. 최승식 기자

한국 고유의 식재료와 이를 일궈온 농부들을 소개하는 요리연구가 하미현. 최승식 기자

하미현(38) 아부레이수나(경상도 모내기 민요의 제목. '서두르지도 게으르지도 않게'라는 뜻) 대표 앞엔 ‘입말음식가’ 또는 ‘입말음식 연구가’라는 생소한 호칭이 따라다닌다. 입에서 입으로, 즉 입말로 이어지는 한국 토박이 농부들의 음식·식재료를 기록하고 이를 다른 사람에게 알리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는 이를 위해 전국 곳곳을 다니느라 한 달 중 서울 집에 머무는 날은 손에 꼽을 정도로 적다고 한다. 이처럼 음식에 온 시간과 정성을 쏟는 그는 본래 프랑스 파리에서 의상학을 전공하고 광고 아트 디렉터로 일했다. 그러다 2013년 우연히 맛본 사찰음식에 매료돼 시간이 날 때마다 틈틈이 공양간을 찾아 스님을 도왔다. 그는 “사찰음식을 처음 맛봤는데 ‘맛있다’라는 감정이 아닌 참 좋은 사람을 만난 느낌이 들었다”고 했다.     

아부레이수나 하미현 대표
입으로 내려오는 농촌 밥상 기록
5년 전 사찰음식에 매료돼 시작
매달 '부엌 여는 날' 워크숍 개최
토종 식재료 이용하는 요리교실
12월 초에 책『입말한식』발간

음식은 알면 알수록 재미있었다. 사찰음식으로 농부들의 시장 ‘마르쉐’에도 종종 참여하다 보니 음식 관련 일을 하는 사람들을 알게 됐고 그들을 따라 식재료를 찾아다녔다. 시간이 지날수록 본업은 뒷전으로 밀려났다. 음식을 알면 알수록 자신에게 꼭 맞는 옷을 입은 듯한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 대표는 “궁중음식이나 사대부 음식, 사찰음식처럼 권위를 가진 음식은 늘 기록돼 왔지만 농부나 토박이의 음식과 식재료는 입에서 입으로만 이어져 오고 있었는데 집집마다 지역마다 특별한 ‘별맛 아닌 별맛’의 음식법은 기록 문화가 아니어서 오히려 내겐 만날수록 새로운 한국 여행을 하는 느낌이었다"고 설명했다.
이때부터 철마다 해먹는 음식을 입말로 전해 듣고 직접 같이 만들어 보고 기록한 후 소개하는 일에 집중했다. 고유의 식재료가 사라지면 식문화도 사라지기 때문에 식재료를 키우는 농부도 만나야 했다. 정작 하 대표를 마주한 농부들은 하나같이 집안에서 내려온 음식을 부끄러워하며 “별것 아닌” “비루한 음식”이라며 “부족함 없는 요즘 시대에 왜 이런 음식을 찾아다니냐”고 그에게 되물었다. 하 대표는 “내가 맛본 농부들의 음식은 결코 가난하거나 초라하지 않고 오히려 식재료의 맛이 살아있고 제철에만 먹을 수 있는 귀하고 순한 음식들”이라고 말했다. 경기도 농가에서 맛본 호박 들깨 수제비는 파스타와 같은 맛이, 강원도의 옥수수묵은 젤리처럼 느껴졌다. 화전민의 음식엔 고기와 생선이 없어도 기름과 잡곡, 뿌리부터 열매까지 모두 넣어 영양과 맛이 담겨 있었다.   
하미현 대표가 화전민들의 밥상을 도시락으로 차려냈다. [사진 아부레이수나]

하미현 대표가 화전민들의 밥상을 도시락으로 차려냈다. [사진 아부레이수나]

올해 3월부턴 전국에서 만난 토종 식재료를 그냥 흘려보내기 아까워 한 달에 한 번씩 ‘부엌 여는 날’이라는 이름으로 연희동 집에서 워크숍을 열기 시작했다. 매달 한 가지 식재료를 정하고 이에 맞는 토종 식재료를 한 데 모으고 평생 이를 키워온 농부를 초대해 함께 내림 음식을 맛보는 시간이다. 토종 식재료로 만든 입말음식에, 하 대표가 현대식으로 풀어낸 요리도 함께 선보인다. 예를 들어 이달엔 전국에서 키운 각기 다른 품종의 호박 9개를 모아 워크숍을 열었고 평생 호박을 키워온 농부와 함께 호박에 얽힌 이야기를 풀었다. 그는 이렇게 모은 농부들의 이야기를 엮어 12월 초에 책 『입말한식』을 내놓을 예정이다.  
“만약 혼자서 요리를 하는 일이라면 하지 않았을 거예요. 제 역할은 토종 식재료와 식문화를 일궈온 농부를 비추는 것이거든요. 그래서 즐겁고, 앞으로도 계속하고 싶어요.”
 
송정 기자 song.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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