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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 만반진수는 생전 일배주만 못하다

중앙선데이 2018.11.24 02:00 611호 28면 지면보기
이지민의 “오늘 한 잔 어때요?” <63> 누하동 ‘목원의 서촌가락’
2016년 3월 시작된 “오늘 한 잔 어때요?”는 시종 머리를 쥐어뜯는 고뇌와 번뇌의 시간이었다. ‘내가 이 연재를 왜 한다고 했을까?’ 라고 자괴감에 빠진 적도 많았다.  
 
허들을 높여 놓은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주제가 ‘술’이다 보니 흔한 술은 배제하고 좋은 술을 다양하게 파는 곳을 계속 발굴해야 했다. 술이 많아도 음식이 맛없으면 꽝. 갔다가 실망해서 리스트에서 지운 곳이 한 둘이 아니다. 사람 이야기도 담아야했기에 사연이 있거나 스토리가 있는 곳이어야 했다. 다른 매체에 소개되지 않은 곳을 찾으려 애썼다. 그렇게 마음에 드는 곳을 찾아도 언론에 소개되는 게 싫다고 퇴짜를 맞기도 했다.  
 
그럼에도 연재를 이어갈 수 있었던 원동력은 기사 후 반응이었다. 전국의 양조장들이 잘 되려면 술이 지속적으로 소비가 되어야 하고 따라서 전통 주점의 역할이 중요하다. 그래서 막걸리와 전통주를 파는 곳을 일부러 더 찾아 소개했다. 기사가 나간 뒤 “오픈 이래 최고 매출을 찍었습니다. 기사 보고 온 분들께서 주문도 많이 해주시고, 만족스럽다고 칭찬해 주시네요. 정말 감사합니다”라는 사장님들의 문자는 큰 힘이 되었다.  
 
그러던 중 S매거진이 막을 내린다는 데스크의 전화를 받았다. 피날레를 위해 ‘마지막’을 주제로 준비해달라는 말씀을 듣고 깊은 고민에 빠졌다. 속상함에 힘이 쭉 빠졌지만, 긴 연재의 방점을 찍을 만한 곳을 소개하고 싶었다. 아껴둔 막걸리 주점이 떠올랐다.  
 
경복궁역 2번 출구를 나와 서촌 길을 따라 걷다 보면 목조 간판으로 꾸며진 작은 주점을 만날 수 있다. 유리 창에 붙어 있는 작은 종이에 쓰인 문구가 눈에 들어온다. ‘멋, 흥, 정, 맛, 쉼’. 바로 ‘목원의 서촌가락’이다. 촬영 차 이곳을 찾은 날이 마침 금요일 오후였는데, 안으로 들어서니 낮술하는 여성 손님이 여럿 보였다. 냉장고에 가득한 막걸리로 자꾸 눈길이 갔다. ‘오늘은 참아야 하는데 .’  


환하게 웃으며 우리를 반긴 분은 김현주(51) 사장님. 옥호에서 ‘목원’은 사장님의 호를 그대로 땄다. 화목한 뜰이라는 뜻이다. ‘가락(加<39A1>)’은 한자 그대로 즐거움을 더하는 곳. “판소리 사철가에 이런 말이 있어요.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 생전의 일배주 만도 못 허느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즐겁게 술을 나누는 게 인생의 참 맛이라는 철학을 담았습니다.” 
 
전북 남원 출신인 그는 대학 졸업 후 서울로 와서 결혼해 아들 셋을 키우며, 방송작가로 20년을 일했다. 복잡한 도시에 살며 육아에 방송 일까지 하다 보니 스트레스를 해소할 방법이 필요했다. 우연히 시작한 판소리는 큰 힘과 의지가 되었고, 가야금, 사물놀이 등 관련 장르까지 빠르게 섭렵했다. 재미있는 건 엄마의 국악에 대한 열정이 온 가족을 국악 패밀리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연세대 국제대학원에서 교직원으로 일하는 남편 박우석(54)씨는 대금과 단소를, 세 아들 다울·찬울·산울 군은 각각 거문고·대금·피리를 배웠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첫째와 둘째는 서울대 국악과, 막내는 서울예대 국악과에 입학해 공부하고 있다. 우리의 전통 문화를 제대로 알려보는 일을 해야겠다고 마음먹은 그가 북촌에 국악 공방을 오픈하자, 온 가족이 함께 국악 공연을 펼치기에 이르렀다.  
 
공연과 함께 즐길 수 있도록 막걸리·전·나물·떡 등을 준비해 프로그램도 운영했다. “그렇게 5년을 운영하고 나왔더니 주위에서 아깝다고, 많은 분들이 제가 주모를 해야한다고, 음식 장사를 하면 좋겠다고 권유했어요. 고민 끝에 오픈한 곳이 이곳입니다. 국악 행사에서 손님들이 좋아했던 음식과 8도 강산에서 공수한 술을 메뉴에 올렸죠.”  
 
촬영을 준비하다가 깜짝 놀랐다. 테이블 위로 빠르게 올려지는 음식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새 한상이 제대로 차려져 있었다. 편육·명태 초무침·도토리묵·가오리찜·두부김치·해물파전·능성어찜 . 여기에 막걸리가 20여 종 깔리니 침이 꿀꺽 넘어갔다. 촬영을 마치니, 사장님이 빨리 맛을 보라며 종용한다.  


스타트는 도토리묵. 집간장에 5년 숙성한 매실청으로 만든 양념장을 올려냈다. 낭창낭창한 탄력과 쫄깃한 식감으로 입맛을 살려주었다. 전라도에서 공수해오는 수제 편육은 맛이 깔끔하고 고소했다. 묵은지를 들기름에 볶아 올려낸 두부김치나 투박한 듯 큼직하게 부쳐낸 해물파전은 엄마가 해준 음식처럼 편안한 맛이다.  
 
인기 메뉴인 생선찜은 완도와 고흥 녹동항에서 해풍에 말려 보낸 생선을 쓴다. 철 따라 장대·민어·우럭 등이 나오는데, 이날은 능성어였다. 목포에서 공수해오는 가오리는 담백함 그 자체. 항아리에서 폭 삭혀 숙성한 버전으로도 주문이 가능하다. 속초에서 꾸덕꾸덕 말려 염장해온 명태를 양념해서 낸 초무침은 막걸리 안주로 손색이 없다.  
 
막걸리는 해창·송명섭·금정산성·느린마을·지평 등 유명 막걸리에서부터 장수 번암 막걸리, 문경 생 탁배기 등 잘 알려지지 않은 양조장의 막걸리까지 다양하게 구비했다. 주당으로서 추천하는 막걸리는 옥천 이원양조장에서 출시한 우리밀로 만든 향수 막걸리와 문경의 신생 양조장에서 공수해오고 있는 하우스 막걸리(이름 미정). 걸쭉한 풍미가 입에 착 붙는다. 
 
이미 배가 엄청 불렀지만 “식사는 해야지요?”라며 나온 곤드레밥은 수저질을 절로 하도록 만드는 맛이었다. 문득 메뉴판을 보니 음식과 막걸리 가격이 참 저렴하다. “사장님, 가격을 좀 올리셔야 ”라는 소리에 방긋 웃으며 대답하신다.  


“음식을 진실하게 내니 누군가는 알아주겠죠. 사람을 좋아해서 음식 장사를 시작했고, 항상 귀한 손님을 맞이하는 마음으로 냈어요. 언젠가는 좋은 일이 있겠죠.”  
 
이런 곳을 계속 발굴해서 소개해야 하는데, 마지막이라니. 아쉬운 마음에 막걸리를 연거푸 들이켰다. 오후 3시부터 시작된 인터뷰는 결국 밤 10시가 넘어서야 끝이 났다. 은근한 취기에 서촌 길 자락을 터벅터벅 걸으며 혼자 중얼거렸다. “사후에 만반진수는 불여 생전의 일배주 만도 못 허느니라.” 좋은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좋은 술 한잔! 인생의 참 맛을 알리는 일은 앞으로도 계속된다. 쭈욱!!  
 
‘대동여주도(酒)’와 ‘언니의 술 냉장고 가이드’ 콘텐트 제작자이자 F&B전문 홍보회사인 PR5번가를 운영하며 우리 전통주를 알리고 있다. 술과 음식, 사람을 좋아하는 음주문화연구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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