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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년 인수봉 참사 생존자 “로프 풀고 기어 내려가려는 희생자들…추락 막으려 묶어놨다”

중앙선데이 2018.11.24 00:20 611호 24면 지면보기
북한산 인수봉 서남면. 1971년 11월 28일 사고 당시 하강 지점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북한산 인수봉 서남면. 1971년 11월 28일 사고 당시 하강 지점이 보인다. 김홍준 기자

“산이 돌변했다. 20여 명이 쓰러질 듯 백운산장으로 들어섰다. 산장 안은 이들이 몰고 온 냉기로 가득 찼다. 인수봉에서 하강한 이 사람들은 다행히 화를 면했다. 하지만 아직 바위에 붙어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 당시 7명 사망…북한산서 무슨 일이
날 화창하다 체감 영하 30도 돌변
강풍에 로프 엉켜 5명 꼼짝 못해
체육복 한겹만 입고 제때 못 먹어

하강 중 보니 5명 이미 얼어붙어
우리팀 2명도 저체온증·탈진 사망
의류·식량 부족…하강 너무 늦었다

오는 28일은 7명의 목숨을 앗아간 북한산 인수봉 대참사 47주년이다. 이종록(73·부루마운틴 산악회)씨는 당일 생존자이면서 최후의 하강자였다. 그의 증언과 이용대 코오롱등산학교 명예교장의 사고 일지를 바탕으로, 당시 상황을 이종록씨의 1인칭 시점으로 재구성했다.
 
 
 
바위틈에 낀 로프 끊으려 "칼! 칼!" 

 
1971년 11월 28일 체감 영하 30도의 혹한이 몰아친 인수봉에서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다음날 구조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11월 28일 체감 영하 30도의 혹한이 몰아친 인수봉에서 7명이 목숨을 잃었다. 사고 다음날 구조대원들이 시신을 수습하고 있다. [중앙포토]

1971년 11월 28일 경찰과 구조대원들이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인수봉 사고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백운산장은 1983년 4월의 인수봉 사고 때도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1971년 11월 28일 경찰과 구조대원들이 북한산 백운산장에서 인수봉 사고자들을 구조하기 위해 대기하고 있다. 백운산장은 1983년 4월의 인수봉 사고 때도 전진기지 역할을 했다. [중앙포토]

일요일인 1971년 11월 28일, 서울역에서 양희철(21), 최성규(20) 등 동료 5명을 만나 우이동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인수봉 등반에 나설 계획이었다. 날은 화창했다. 지난 며칠간 한낮에는 최고 15도까지 올라갔으니 오늘도 역시라고 생각했다. 백운산장에서 밥을 지어 먹었다. 코펠 뚜껑에 묻은 물이 얼음으로 변했다. 이렇게 추워질 수도 있나 싶었다.
 
오후 1시30분, 기존A 코스를 택했다. 앞 팀 등반이 더뎠다. 한참을 쉬자니 강한 바람에 한기가 엄습했다. 정상에 오른 건 오후 5시가 다 되어서였다. 어둑해지기 시작했다. 오후 6시, 남측 하강 구간에서 로프를 뿌렸다. 오버행(90도 이상의 경사로 이뤄진 암벽 구간)을 지나니 여러 명이 웅크리고 있었다. 그들의 로프가 바람에 날려 엉키면서 꼼짝도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소리를 질렀다. 구해달라고. 바람에 목소리가 묻혔다. 두 명이 정상에서 내려왔다. 10여 명이 옹기종기 붙었다.
 
우리 팀에서 하강하던 희철이 허공에 갇혔다. 로프가 바람에 쓸리며 바위틈에 낀 것이었다. 희철이 소리쳤다. “칼! 칼!” 그는 로프를 끊으려고 했다. 성규가 다른 로프를 써서 펜듈럼(반동을 이용해 시계추처럼 왔다갔다하는 등반법)으로 희철에게 다가갔다. 수십 번의 시도에도 희철의 팔을 잡을 수 없었다.
 
밤 10시가 지났다. 영하 12도에 바람이 거셌다. 체감기온은 영하 30도였다. 등반자 대부분이 입고 있는 옷은 한 겹 셔츠거나 허술한 체육복이었다. 끼니를 거른 사람도 있었다. 저체온증으로 몇 명이 졸기 시작했다. 어떤 이는 로프를 풀어 어떻게 해서든지 기어 내려가려고 했다. 바닥에서 30m 지점이었다. 그들의 손이 바위를 스칠 때마다 ‘딱딱’ 금속성 소리가 났다. 바위도 얼었고 그들의 손도 얼어버린 것이다. 난 이들을 때리면서 힘을 내라고 소리쳤다.
 
백운산장에서 사람들이 몰려왔다. 누군가 우리 쪽으로 올라왔다. 밤 11시30분이었다. 그 사람들이 가져온 로프로 하강을 시작했다. 그런데 5명이 문제였다.
 
이미 이곳까지 하강한 지 한참 지난 이들 5명은 인사불성이었다. 나는 이 5명이 추락하지 않도록 단단히 고정시켰다. 추락은 0.1%의 희망도 버리는 거니까. 하지만 그들은 이미 죽음의 문턱에 들어섰다. 기온은 급속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성규를 먼저 내려보냈다. 움직일 수 있는 모든 사람을 하강 시킨 뒤 내가 마지막에 내려섰다. 밤 11시45분, 하강에만 5시간45분이 걸렸다. 그들 5명과 희철은 얼음장 바위에서 목숨을 잃었다. 성규는 하강했지만 털썩 주저앉더니 일어서지 못했다. 성규는 수십 번의 펜듈럼 끝에 탈진으로 숨졌다.
 
난 인수봉 하강 지점에 희철과 성규를 기리는 명패를 만들었다. 사고 이후 인수봉에서 하강할 때마다 그 명패를 닦아주고 쓰다듬어 줬다. 백운산장지기였던 (이)영구 형(2018년 9월 작고)이 한참 지나 내게 이러더라. 그때 인수봉에서 내려온 사람들, 구조대원들 챙겨주느라 쌀이 동났다고. 그래서 며칠 굶었다고. 그래도 누군가는 살아서 괜찮았다고.
1971년 11월 28일 인수봉에서 숨진 양희철, 최성규씨를 기리는 명패. 이종록씨를 비롯한 부루마운틴 산악회 회원들이 만들었다. 이 명패는 원래 인수봉 하강지점에 있었지만 지금은 추모공원으로 옮겼다. 북한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 명패를 철거할 때 하단에 '산벗 일동'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산벗'이란 산악회를 수소문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루마운틴 산악회가 만든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계기로 이종록씨는 하단에 '부루마운틴 산악회'를 별도로 표시했다. 사진 이종록

1971년 11월 28일 인수봉에서 숨진 양희철, 최성규씨를 기리는 명패. 이종록씨를 비롯한 부루마운틴 산악회 회원들이 만들었다. 이 명패는 원래 인수봉 하강지점에 있었지만 지금은 추모공원으로 옮겼다. 북한산 국립공원관리공단에서 이 명패를 철거할 때 하단에 '산벗 일동'이 적혀 있는 것을 보고 '산벗'이란 산악회를 수소문했으나 연락이 닿지 않았다. 우여곡절 끝에 부루마운틴 산악회가 만든 것을 알게 됐다. 이런 계기로 이종록씨는 하단에 '부루마운틴 산악회'를 별도로 표시했다. 사진 이종록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그래픽=이정권 기자 gaga@joongang.co.kr]

 
83년에도 기상 돌변으로 7명 사망
 
1971년 11월 29일자 중앙일보 1면의 제목은 ‘인수봉서 7명 조난 절명 - 하산 서둘다 강풍에 자일 얽혀’였다. 같은 날 중앙일보 ‘분수대’는 이렇게 쓰고 있다. ‘…경험 있는 리더들이 없었다는 것, 충분한 장비들이 없었다는 것… 결정적으로는 기후의 돌변이 원인이었다. 그렇다고 피할 수 없는 사고는 아니었다.’
 
이종록씨도 “하강을 좀 더 빨리했었어야 했다”며 “보온의류·비상식량 등 장비가 너무 열악했던 것도 사실”이라고 당시를 떠올렸다. 며칠간 날은 화창했지만 이미 이날 한파주의보가 발령되기도 했다.
 
인수봉에서는 1983년 4월 3일에도 폭설과 강풍으로 대학생을 포함한 7명이 숨졌다. 이들 역시 교련복·체육복 등 허술한 복장을 갖췄다.
 
이 두 번의 참사 이후 산악인들에게 불문율이 생겼다고 한다. 4월 말~11월 중순으로 등반기간을 지키자는 것. 어떤 이는 프로야구 시즌과 등반 시즌을 일치시키자고 한다. 이종록씨는 “사실 예전엔 등반기간이라는 개념이 없었다”며 “날씨만 좋으면 겨울이라도 인수봉에 올랐다”고 말했다.
 
 
"1%의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눈 덮인 북한산 인수봉. 24일엔 서울에 첫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김홍준 기자

눈 덮인 북한산 인수봉. 24일엔 서울에 첫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됐다. 김홍준 기자


인수봉에서 이처럼 기상 돌변에 의한 사고가 잇따른 까닭은 뭘까. 이용대 코오롱 등산학교 명예교장은 이를 지형적 특성에서 분석했다. 근처의 협곡이 바람 통로 역할을 하는데, 강풍이 불면 회오리의 형태로 바뀌어 인수봉을 급습한다는 것이다.
 
이 명예교장은 인수봉은 그 자체가 오명의 역사라고 말한다. “71년, 83년 사고는 기상 돌변이 어떤 재앙을 가져다주는지 큰 교훈을 심어줬다”며 “도전도 좋지만 1%의 불확실성에 대비해야 하는 게 산악인”이라고 말했다.
 
인수봉은 한국 알피니즘의 출발점이다. 2016년 고 김창호 대장과 강가푸르나 남벽에 올라 황금피켈상 심사위원상을 받은 최석문씨는 “인수봉은 811m로 높지 않지만 히말라야를 꿈꾸는 사람들에게는 어머니 같은 존재”라며 “한국 산악인들을 세계적으로 성장시킨 배경엔 인수봉이 있다”고 설명했다.
 
날이 추워졌지만, 그래도 오늘 누군가는 자신의 꿈을 안고 인수봉을 오른다. 이 명예교장은 “정상은 선택이지만 하산은 필수”라며 “등반의 완성은 다시 집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했다.
 
숫자로 보는 인수봉
811 (m, 해발 고도) 
89 (등반 루트 갯수) 
200 (m, 최장 구간) 
500 (m, 둘레) 
7 (명, 단일 사고 최다 사망자 수, 1971·83년)
 
김홍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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