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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의 땅에 한 알의 밀알로 죽다

중앙선데이 2018.11.24 00:02 611호 16면 지면보기
석영중의 맵핑 도스토옙스키 <43> 스타라야 루사에서 상트페테르부르크까지: 영광의 절정
스타라야 루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내부

스타라야 루사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기념관 내부

평생 셋집을 전전하던 도스토옙스키가 부동산을 소유하게(!) 되었다. 1872년 5월 이들 부부는 아이들을 데리고 노브고로드 주의 작은 온천 마을 스타라야 루사에 갔다. 조카 사위가 거기서 아이들이 온천욕을 한 뒤 몰라보게 건강해졌다며 꼭 한 번 가보라고 했기 때문이다. 공기는 맑고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물가는 수도의 3분의 1 정도였다. 부인은 특히 “우리 가족이 조용하고 평화롭게 오붓한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것”이 너무나 마음에 든다며 좋아했다.  
 
겨울의 스타라야 루사는 더욱더 매력적이었다. 여름 성수기 때 한 달에 월 300~400루블하던 방세가 겨울에는 15~20루블로 뚝 떨어졌다. 부인은 스타라야 루사에서 보낸 1874년과 75년 사이의 겨울이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절 중의 하나”라고 회고했다. 아이들은 건강하게 자랐고 남편의 신경도 안정을 찾아 간질 발작 강도와 횟수가 줄었다.  
 
스타라야 루사를 사랑하던 부부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1877년 초에 집 주인 그리베씨가 사망하자 상속녀가 1000루블이라는 헐값에 집을 내놓았다. 그만한 목돈도 없던 도스토옙스키는 처남에게 그의 명의로 집을 사 달라고 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도스토옙스키가 집값을 갚는다는 조건이었다. 처남이 구매한 그 집의 소유권은 도스토옙스키가 죽은 뒤에 부인 명의로 이전되었다. “표도르 미하일로비치는 스타라야 루사의 우리 별장을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편안하게 휴식을 취할 수 있는 쉼터로 여겼다.”  
 
모든 역량과 경험이 집약된 소설을 쓰다  
율 브리너가 주연한 미국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1958)의 포스터(왼쪽 사진)와 1958년 국내 대한극장 개봉 당시 신문 광고

율 브리너가 주연한 미국 영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1958)의 포스터(왼쪽 사진)와 1958년 국내 대한극장 개봉 당시 신문 광고

스타라야 루사는 모스크바에서 북서쪽으로 560km 떨어진 곳에 있는데, 밤 열차가 거의 유일한 대중교통수단이다. 모스크바 레닌그라드 역에서 두 제자와 함께 노브고로드 행 저녁 8시 23분 기차에 올랐다. 깨끗한 4인 쿠페에는 우리 일행 말고 명랑한 러시아 부인도 한 명 있었다. 덜컹거리는 기차 침대칸에 누워 네 여자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스르르 잠이 들었다.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기차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스타라야 루사 역에 다가가고 있었다. 새벽 4시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말년에 보냈던 비교적 편안한 시간을 기념해주듯 마을은 그의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고, 가족이 다녔던 성당과 단골 식품점 건물도 남아있다. 가족이 거주했던 자그마한 통나무 집은 혁명과 전쟁을 비롯한 20세기의 온갖 풍파를 다 견뎌내고 1981년 5월 4일 ‘도스토옙스키 기념관’으로 거듭났다.  
 
도스토옙스키는 스타라야 루사에서 『악령』의 마무리 작업을 했고, 『미성년』의 일부를 집필했다. 저 유명한 ‘푸슈킨 연설’도 이곳에서 집필했다.  
 
그러나 스타라야 루사는 무엇보다도 ‘카라마조프’라는 이름으로 기억된다. 조용하고 평화로운 이 작은 시골 마을에서 그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전체의 3분의 2를 썼다. 스타라야 루사의 크고 작은 디테일이 소설의 배경이 됐다. 여주인공 그루센카의 모델인 마을 주민 아그리핀나가 살던 집은 ‘그루센카의 집’이란 이름으로 보존되어 있다. 작가의 단골 식품점 주인은 소설 속에서 같은 이름으로 등장한다. 일부 주민들은 아직도 소설 속의 몇몇 장소를 과거 역사의 일부처럼 기억한다. 2018년 6월 4일에는 ‘카라마조프가의 형제 기념관’이 이곳에 새로 문을 열어 애독자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다.  
 
1877년 10월호 ‘작가일기’에 도스토옙스키는 “건강상의 이유로 약속한 날짜에 잡지를 발간하는 것이 어려워 내년 1월부터 부터 향후 2년간 잡지를 정간한다”는 공지사항을 실었다. 원망 가득한 독자의 편지가 쇄도했다. 매달 발간이 어려우면 서너 달에 한 권이라도 내달라는 ‘읍소형’ 편지도 많았다.  
 
도스토옙스키는 하는 수 없이 12월호에 ‘진짜’ 정간 이유를 밝혔다. “잡지 일을 하는 지난 2년 동안 부지불식간에 저의 내면에서 무르익어 온 소설 집필에 전념하기로 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향후 3년간 이 소설에 몰두했다. 소설은 ‘러시아 통보’ 1879년 1월호부터 연재되기 시작해 1880년 11월에 완결되었다. 대문호의 모든 작가적 역량, 모든 사상, 모든 인생 경험이 하나의 서사에 집약된 대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이렇게 탄생했다.  
 
소설의 진행은 의외로 순조로웠다. 총 12개의 ‘권’(book)과 에필로그로 이루어진 소설은 우리말 번역본(‘열린책들’ 번역본 기준)으로 1800쪽에 달한다. 그는 1권과 2권을 그야말로 ‘후딱’ 써버렸다. 수많은 플롯의 수렁에서 허덕이는 일도, 1년 동안 쓴 원고를 다 버리는 일도 없었다. 그동안 쌓이고 쌓였던 모든 사상과 소재가 자연스럽게 어우러져 저절로 술술 풀려나오는 듯했다. 그는 ‘작가일기’를 중단할 때 이미 어디를 향해 가야할지, 무엇을 써야 할지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우왕좌왕하거나 두리번거릴 필요가 없었다. 그냥 깊이 들어가기만 하면 되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쏟아진 후대인의 찬사 중 가장 괄목할 만한 것은 아인슈타인의 찬사다. 아인슈타인은 이 소설이 ‘인류 문학 전체의 정점’이라고 극찬했으며 “내 손에 들어온 것 중 가장 위대한 것”이라 단언했다. 그는 또 “나는 그 어떤 과학자한테서 보다도, 심지어 가우스한테서 보다도, 도스토옙스키한테서 배운 게 훨씬 많다”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아인슈타인 “이 소설은 인류 문학 전체의 정점”
포르피리예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 장례식 그림

포르피리예프가 그린 도스토옙스키 장례식 그림

이제 대단원을 서둘러야 할 시간이다. 1880년은 ‘도스토옙스키의 해’였다. ‘푸슈킨 연설’로 그의 명성은 절정에 올랐고 수많은 독자들, 특히 대학생들과 청년들이 그의 글과 말에 환호했다. 그해 말 단행본으로 출간된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는 순식간에 다 팔렸다. “이것은 온갖 불행으로 얼룩진 그의 생의 마지막 기쁨이었다.”  
 
그러나 영광과 더불어 죽음이 소리없이 찾아왔다. 1881년 1월 26일 그는 각혈을 시작했다.  의사는 곧 나을 거라고 했지만 그는 신이 자신을 부르고 있다고 생각했다. 부인에게 유배 이후 평생 동안 지니고 살았던 성경책을 가져다 달라고 부탁해 펼쳐보았다.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복음 3장: 15절).  
 
그는 이 대목이 자신의 죽음을 암시하는 것이라 확신했다. 그는 시종일관 침착하게 지상에서의 삶을 마무리했다. 사제를 청해 종부 성사를 받았고, 아이들에게 축복을 해주었고, 상냥하고 부드럽게 부인을 위로해 주었다. ‘언제나 뜨겁게 사랑했으며’ ‘행복한 결혼 생활에 감사한다’는 것이 오열하는 부인에게 남긴 마지막 말이었다. 1881년 1월 28일 저녁 8시 30분, 대문호 도스토옙스키는 가족의 품에서 고통 없이 평화롭게 세상을 하직했다.  
 
장례식은 러시아 역사에 또 하나의 획을 그었다. 러시아 국민은 ‘예언자’의 죽음에 마땅한 예를 표했다. 1월 31일, 러시아 전역에서 파견된 70여 대표단과 15개 합창단, 그리고 어린 학생들을 포함하는 수만 명의 일반인 조문객이 매서운 한파 속에서 자발적으로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까지 운구 행렬을 따라갔다. 수도원 교회에서 밤샘 기도가 있었고 다음날 장례 미사가 거행되었다. 미사는 그 옛날 비스바덴에서 도박으로 빈털터리가 된 도스토옙스키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움을 주었던 야니세프 신부가 집전했다. 당시 비스바덴 정교성당의 주임사제였던 야니세프는 이제 신학대학 총장이 되어 있었다.  
 
수도원 일대는 인파로 교통이 마비되었고 여기저기서 실랑이가 벌어졌다. “비켜요, 아주머니! 입장권 없으면 못 들어가요!” “제가 바로 고인의 부인이에요.” “흥, 도스토옙스키씨 미망인은 많기도 하군!”  
 
입장권이 없던 도스토옙스키의 부인은 결국 지인의 신원보증을 거치고서야 가까스로 남편의 장례 미사에 참석할 수 있었다. 그토록 많은 인파가 몰렸건만 수도원 경내에는 담배꽁초 한 개, 종이 조각 하나 보이지 않았다.  
 
한파 속 수만 명이 조문한 ‘예언자’의 장례식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무덤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에 있는 도스토옙스키 무덤

여기까지 원고를 쓰고 퍼뜩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나는 137년 뒤의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와 있다. 호텔 창문에는 성 이삭 대성당의 거대한 황금색 돔이 손에 잡힐 듯 가까이 어른거린다. 계획했던 것은 아닌데, 도스토옙스키 기행의 마무리를 ‘도스토옙스키의 도시’에서 하게 되었다. 보이지 않는 어떤 손에 이끌려 여기까지 온 것 같다.  
 
부슬부슬 가랑비가 날리는 11월의 상트페테르부르크는 한낮에도 어두컴컴하다. 간판과 쇼윈도와 신호등의 불빛이 잿빛 어둠과 어우러져 묘한 매력을 풍긴다. 정처없이 걷다가 알렉산드르 넵스키 수도원의 티흐빈 묘지에 갔다. 조금 전에 누군가가 가져다 놓은 듯한 싱싱한 꽃들이 시간의 흐름을 무색케 한다.  
 
거장의 묘비명은 그가 그토록 좋아했던, 그래서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의 제사로 인용했던 ‘요한복음’의 한 구절이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밀알 하나가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알 그대로 남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보다 더 도스토옙스키와 어울리는 묘비명은 없을 듯하다. 도스토옙스키야말로 문학의 땅에 떨어져 죽은 한 알의 밀알 아니었나 싶다.  
 
※ 석영중 교수의 『카라마조프가의 형제』에 관한 이야기는 12월 1일자부터 중앙SUNDAY 신문 지면의 ‘맵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로 이어집니다.  
 
고려대 노문과 교수.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자유, 도스토예프스키에게 배운다』등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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