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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다]⑧ 
 
지난달 22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청원글. 현재 청와대 답변 대기 중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쳐]

지난달 22일 청와대 국민청원게시판에 올라온 청원글. 현재 청와대 답변 대기 중이다. [청와대 홈페이지 캡쳐]

“극히 이례적인 사례다. 일반적 성적 행위로는 이해하기 힘들다.”

 
2013년 8월 대한법의학회지에 실린 ‘질과 항문 내 손 삽입에 의한 치명적 사망 사례 보고’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납니다. 수많은 사망 사례를 봐왔을 경북대학교 법의학 교실에서도 이런 사건은 처음 본다는 겁니다.
 
가해자는 피해자에게 유사성행위를 하는 과정에서 “자궁 후면에 손이 닿을 정도로 팔꿈치까지 손을 집어넣고”, “직장을 움켜잡고 잡아당겨 일부를 떼어내”기 까지 했습니다. 많은 피를 흘린 피해 여성은 끝내 숨졌습니다. 2011년 2월 경상남도 고성에서 벌어진 사건입니다.
 
7년 전 사건이 최근 25만6004명의 분노를 사게 된 것은 “가해자가 술에 취해 심신미약이었다는 이유로 고작 징역 4년형을 받았다”며 “이 사건을 다시 조사해야 한다”는 국민청원 글이 올라와서입니다. 답변에 필요한 동의 인원 20만명을 훌쩍 넘겼기 때문에 21일 마감된 이 청원은 이제 청와대의 답변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그래픽=김현서 kim.hyeonseo12@joongang.co.kr

 
◆ 문제는 '술 감경'…1·2심 판단 갈렸다
 
처음부터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됐던 건 아니었습니다. 1심을 맡은 창원지법 통영지원 형사1부(부장 김성욱)는 “피고인이 술을 다소 마신 사실은 인정되나, 사물 변별능력이나 의사결정 능력이 미약한 정도는 아니다”며 심신미약 감경을 해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피고인은 범행 전후 정황은 분명하게 진술하면서도 범행에 대해선 일관되게 ‘술에 취해 기억나지 않는다’며 범행 일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걸 나쁘게 봤습니다.  
 
피고인 A씨(당시 39세)가 수사과정에서 진술한 범행 전후 상황은 이렇습니다. ‘서로 키스를 하다가 피해자 B씨(당시 38세)가 성관계를 요구했다’ ‘아내 외에는 하지 않는다고 했더니 B씨가 손으로 해달라고 했다’ ‘계속, 더 세게 해 달라며 요구했다’ ‘팔꿈치까지 집어넣었지만, B씨가 말이나 행동으로 거부한 적 없다’ ‘이 정도면 됐겠다고 생각해 불을 켜니 여기저기 피가 묻어있었다’ ‘술이 이렇게 무서운 줄 몰랐다’.
 
A씨의 심신미약이 인정된 것은 2심서부터입니다. 부산고법 창원1형사부(부장 허부열)는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사물을 변별할 능력이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상태에 있었다고 봄이 상당하다”고 보고 징역 5년에서 4년으로 형량을 내립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판결문에는 A씨를 심신미약으로 봐야 하는 다섯 가지 이유가 적혀 있습니다. 세 가지는 목격자 등을 통해 증명된 A씨의 행동에 대한 것입니다. 평소 주량의 3배인 소주 3병을 마셨고, 식당을 나와 모텔로 갈 때 넘어지고 비틀거렸으며, 순찰을 하던 모텔 주인이 물소리가 나기에 들어가 보니 범행 후 “와 이라노, 와 이라노” 하며 B씨의 뺨을 때리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하나는 “전혀 기억이 안 나고 꿈을 꾼 것 같다”는 A씨 본인의 진술입니다.  
 
눈에 띄는 것은 “범행 내용 자체”도 심신미약 인정의 이유로 인정된 점입니다. 재판부는 “주먹을 피해자의 몸속에 넣고 휘젓고, 마구 손을 쑤셔 장기를 만지고 직장을 뜯어내는 행위 자체에 의하더라도 당시 A씨가 온전한 판단능력이 있는 상태였다고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습니다. 너무 “변태적이고 잔혹(판결문 내용을 인용한 것입니다)”해서 도저히 정상적인 사람이 한 일이라고 보기 힘들다는 겁니다.
 
이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요. 한 고등법원 판사는 "중범죄일수록 범행 동기가 중요한데 원한 관계나 연인관계 등 범죄를 저지를 어떠한 동기를 찾을 수 없는 경우엔 판단하기가 매우 어렵다"면서 "술을 빼놓고서는 도저히 범행을 설명할 수 없는 경우라면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을 인정한다"고 설명합니다. 
 
반면 서울 서초동의 한 변호사는 "양형기준상 '잔혹한 범행수법'이나 '가학적·변태적 침해행위'는 각각 상해죄와 강제추행죄에서 특별양형인자로 삼고 있는 중요한 가중요소다"면서 "가중해야 할 이유를 오히려 심신미약의 이유로 삼은 점이 의아하다"고 말했습니다.
 
◆ '심신미약'보다 인정되기 어려운 '항거불능'?
 
검찰은 당초 A씨를 '준강제추행치사', 즉 술에 취해 항거불능 상태에 있는 B씨를 강제로 추행하다 사망에 이르게 한 혐의로 기소했습니다. 준강제추행치사는 강간치사·강제추행치사와 마찬가지로 무기 또는 10년 이상이 법정형입니다. A씨는 세 번의 재판 내내 준강제추행치사 혐의에 대해선 무죄를 선고받습니다. B씨의 '항거불능 상태'가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보다 형이 가벼운 상해치사죄(법정형 3년 이상의 유기징역)만 인정돼 징역 5년과 4년이 나왔습니다.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그래픽=김은교 kim.eungyo@joongang.co.kr

 
피해자 B씨는 피고인 A씨와 오후 9시부터 2시간 40분 동안 함께 술을 마셨습니다. B씨의 사망 당시 혈중 알코올농도는 0.23%였습니다. 하지만 법원은 "B씨는 만취했지만 반항할 수 없는 상태는 아니었다"고 봤습니다. 1심 판결문에는 그렇게 보는 이유가 나와 있습니다. "B씨는 넘어졌으나 부축 없이 일어나 걸어갔다" "부축을 받긴 했지만 스스로 모텔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는 목격자 진술을 근거로 재판부는 당시 B씨의 상태를 "다소 취했으나 다른 사람의 부축을 받아 스스로 걸을 정도"라고 파악했습니다. 
 
"B씨가 방 안에서 A씨와 짤막한 이야기를 나눴다"는 점도 고려됐습니다. 잠시 방에 찾아왔던 다른 직장동료가 두 사람이 대화하는 걸 들었다고 했습니다. 다른 사람의 말을 알아듣고 이에 대해 응답할 수 있는지는 그 사람이 어떤 상태인지 알 수 있는 척도가 됩니다. 흥미로운 점은, 1심에선 같은 이유로("특히 범행 전에 B씨와 이야기를 나누고, 방에 찾아온 동료에게 자신의 의사를 표현한 점") A씨의 심신미약도 인정하지 않았던 겁니다. 하지만 2심에서는 B씨를 심신미약으로 봐야 하는 다른 이유들이 있으니 "이야기를 나눈 것은 인정되나 그것만으로 온전한 상태였다고 할 순 없다"고 뒤집습니다. 
 
1심에서 말한 'B씨가 항거불능 상태가 아닌 이유'와 2심의 'A씨가 심신미약 상태인 이유'를 종합하면, B씨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으므로' 반항도 할 수 있는 상태였지만 A씨는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음에도' 판단능력이 약한 상태였다는 얘기가 됩니다.
 
진술 없는 피해자...사망으로 더 불리해져
 
성범죄 관련 이미지. [일러스트 김회룡]

성범죄 관련 이미지. [일러스트 김회룡]

 
성범죄 사건에서 피해자가 항거불능 상태였는지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근거 중 하나가 피해자의 진술입니다. 피해자가 당시 스스로 어떤 상태였다고 말하는지, 어떤 기억을 하고 있는지, 혹은 어떤 기억을 하지 못하는지도 중요한 증거이며, 목격자 진술이나 CCTV 화면 등 가능한 다른 증거들과 함께 고려됩니다.
 
"취한 상태에서 몸이 마음처럼 움직여지지 않았다. 피고인이 '싫냐'며 계속하는데 놀라고 당황스러워 입 밖으로 소리가 나지 않았다"  
"평소 주량보다 적게 마셨지만 12시간 근무 후 술을 마셔 피곤한 상태로 잠에 들었다. 고통이 느껴져 눈을 떠 보니 피고인이 몸 위에 올라타 있었다."
"주점에서 술을 마신 중간부터 아침에 잠에서 깰 때까지 아무런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모두 최근 준강간으로 실형이 선고됐던 사건에서 재판부가 신뢰했던 피해자의 진술들입니다. 여기에 "피해자가 자다 깨다 하더라" "피해자의 소지품을 일행이 챙겨줘야 했다"는 목격자 진술이나, 피해자가 비틀거리며 걷거나 넘어지는 CCTV영상 등이 함께 고려될 수 있습니다. 세 사건 모두 "피해자는 술에 취해 정상적인 상황 판단이나 의사결정을 할 수 없는 상태였다"는 게 인정됐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의 경우 피해자가 사망했기 때문에 피해자의 진술이 없습니다. 대신 법원은 피해자의 의사를 대략적으로 추측하려 했습니다. 1심 재판부는 판결문 말미에 "설령 B씨가 당시 술에 취해 반항하기 곤란한 상태였더라도" 라며 한 문단을 덧붙입니다. ▷B씨가 A씨에게 술한잔 더하러 가자고 하는 걸 들은 사람이 있고 ▷B씨가 넘어진 후 걸어가며 A씨의 팔짱을 끼는 걸 본 사람이 있고 ▷모텔에서 다투거나 반항하는 소리를 들은 사람이 없고 ▷모텔 방문이 잠겨있지 않았던 점 등을 고려하면 A씨가 "B씨의 의사에 반해" 강제로 추행하려 했다고 보기 어렵다고요.
 
◆ 술엔 더 엄격·피해자엔 더 열린 법원 됐지만
 
음주 관련 이미지. [ 일러스트 = 강일구 ]

음주 관련 이미지. [ 일러스트 = 강일구 ]

 
'조두순 사건' 이후 2010년 제정된 성폭력처벌법은 '음주 또는 약물로 인한 심신장애 상애 상태에서 성폭력범죄를 범한 경우 심신상실·심신미약 감경을 하지 않을 수 있다(20조)'고 하고 있습니다. 
 
실제로 성범죄 사건에서 음주로 감형받는 일은 점점 더 드문 일이 되고 있습니다. 김두얼 명지대 경제학과 교수 지난 19일 '음주와 양형' 학술대회에서 "지난해 비음주 성범죄 평균 형량은 징역 18개월이었지만 음주 성범죄는 26개월이었다"면서 "10년 전에는 음주가 집행유예 확률을 높였지만 2017년에는 이런 경향이 많이 감소했다"고 말했습니다.
 
또 법원은 피해자들에게 더 귀 기울여 들으려는 노력을 해왔습니다. 2012년 6월 대법원이 "피해자 진술의 신빙성을 판단할 때 (...) 진술이 일관되고 공소사실에 부합하는 경우 객관적으로 봐 도저히 믿을 수 없다고 볼 별도의 자료가 없는 한 함부로 배척해서는 안 된다"는 판결을 한 이후 이 내용은 수많은 하급심 판결에서 인용돼 왔습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성범죄로 인정되지 않았기 때문에 음주 감경 예외에 해당하지 않았고, 피해자가 범행 직후 사망했기 때문에 법원이 충분히 듣고자 했던 피해자의 진술 자체가 없었습니다.
 
"고도의 개연성을 인정할 정도의 심증을 형성하는 증거가 없다면 설령 피고인에게 유죄의 의심이 가더라도 피고인의 이익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1심 판결문에 인용된 '의심스러울 땐 피고인의 이익으로'란 법언은, 이 사건의 결론을 잘 상징해 주고 있습니다. 
 
문현경 기자 moon.hk@joongang.co.kr
 
◆'판결 다시보기' 시리즈
※‘판다’는 ‘판결 다시 보기’의 줄임말입니다. 중앙일보 법조팀에서 이슈가 된 판결을 깊이 있게 분석하는 코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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