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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그녀가 내 얼굴을 어루만졌다, 천사의 손길로

중앙일보 2018.11.23 08:00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9화 

나는 이어서 둘째 문장을 내놓았다. 이번엔 좀 더 창의적인 접근이라고 스스로 뿌듯해하면서.
'아이디/비밀번호 입력 없이 이용 시에는 예약 위반으로 처리됩니다.'
 
도서관 pc 화면 아래에 붙어 있는 안내문 중 일부였는데, 이 글은 사실관계의 오류라고 나는 지적했다. 아이디와 비밀번호를 입력하지 않고는 pc를 켤 수 없기 때문에 이용하는 것 자체가 불가한데 이런 말이 붙어 있었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바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마지막 문장을 제시했다.
'바닥이 너무 미끄러워요. 침을 뱉지 마세요!'
 
남자 화장실 소변기 앞에 붙어있는 문구였는데 앞뒤가 맞지 않는 글이라고 생각했다. 화장실 바닥이 미끄러운 건 다른 이유일 수는 있어도 침을 많이 뱉어서는 아닌 것 같아서였다. 아무리 둘러봐도 바닥에 침이 흥건한 것도 전혀 아니었다. 선생님도 참 이상한 문구라고 동의했다.
 
시간은 고작 15분쯤 지난 상태였다. 시계를 들여다본 선생님은 준비한 게 더 없느냐고 물었다. 내가 머리를 긁적이자 선생님은 자신도 에스컬레이터 앞에서 이상한 문구를 봤다며 내게 보여줬다. 
'도서관 이용자의 편의 제공을 위해 다음과 같이 운행함을 알려드립니다.'
오전 08:45~09:20
오후 17:30~18:00
선생님은 이 안내문 설명이 논리적이지 않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고친 글을 보여줬다.

'에너지 절약을 위해 아래 시간에만 에스컬레이터를 운행합니다.'
비싼 돈을 들여 설치한 기계를 하루 65분만 운행한다는 것인데, 이는 이용자에게 편의를 제공하기보다는 이용을 억제하기 위한 것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었다. 문장도 정리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안내문인 건 누가 봐도 아는데, 끝에 '알려드립니다' 와 문구를 왜 썼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에스컬레이터 운행시간 안내'
구차한 설명 없이 이렇게 심플하게 적는 것도 좋겠다는 의견도 냈다. 선생님의 지적은 구구절절 옳았다. 나는 그녀가 그렇게 예뻐 보일 수 없었다.

이 정도면 착한 학생 맞죠?
이렇게 해도 시간은 30분밖에 지나지 않았다. 커피도 좀 남아 있었다. 선생님은 내게 수고했다는 인사를 건넸다. 나는 이제 수업도 끝났으니 다시 누나라고 불러도 되느냐고 물었다. 그녀는 피식 웃기만 했다.
"이 정도면 내가 숙제를 잘 해와 빨리 끝난 거죠? 남은 시간은 다른 얘기 해도 되죠?"
누나의 표정은 무슨 이유인지 그리 밝지는 않았다.
"그동안 누나가 가르친 학생 중 나는 어느 정도예요? 상위 5%, 아니 1%?"
나는 분위기를 바꾸기 위해 이렇게 너스레를 떨었다.
 
"천, 오늘 저녁 뭐해? 별일 없으면 한잔할까?"
불감청(不敢請)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경우였다. 경천동지할 일이 생겼어도 그녀는 이미 내게 0순위였다. 우리는 바로 자리를 정리하고 도서관 아래쪽에 위치한 서래마을의 한 이자카야에 자리를 잡았다. 사케를 석 잔 마신 뒤 그녀가 입을 열었다.
"김천씨, 이거 모르지”
“뭐요?”
“당신이 날 발견하기 전에 내가 먼저 당신을 알아봤다는 거."
"아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7월 16일 날 처음 봤다고 했잖아. 나는 사실 그 며칠 전 이미 김천씨의 존재를 알았거든…."
그녀는 도서관 안을 오가다 우연히 아버지와 너무 닮은 사람을 보고 깜짝 놀랐다고 했다.
 
-아, 그랬구나.
"그러면서, 내가 몇 번 말을 걸었을 때 어떻게 그리 냉랭하게 굴 수 있었어요?"
네 번째 접근해서 이름을 물었을 땐 다칠 수 있다는 말까지 했다. 자신을 좋아하다가는 몸도 마음도 다칠 수 있다고.
그동안 그녀는 철저히 감추고 있었지만 그 실토로 인해 나의 자신감은 빠르게 충전되고 있었다. 
"누나, 내가 이름을 물었을 때 다칠 수 있다고 했잖아요? 그게 무슨 말이에요? 뭘 어떻게 다친다는 건지……."
그녀는 자신도 자신을 제어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말했다. 기승자가 말을 제어하지 못하면 승마가 위험한 운동이 되는 것과 같은 이치라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말에서 떨어져 정강이가 부러진 상처를 보여주기도 했다.
"승마도 하나 봐요. 근데 낙마 사고는 누나가 말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지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결과가 아니잖아요? 나와의 관계에서, 다시 말해 여신과 시종의 관계에서 제어하지 못할 일이 뭐가 있겠어요?"
그녀는 자신이 겪은 아픔은 아무도 공감하지 못할 거라는 말로 답을 대신했다.
"누나는 자신이 받은 고통이 세상에서 가장 잔인하다고 하겠지만 사람들은 다 저마다의 아픔을 안고 사는 것 아닌가요. 어느 집도 사방의 벽지가 좁을 만큼 사연이 넘치고, 철판 같은 이불에 눌려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사람도 많은 세상이잖아요. 어린 시절 나도 그랬고요."
 
순간 누나의 두 눈이 반짝였다.
“벽지에도 다 못 적을 사연이란 표현은 어디서 본 거야, 아니면 자기가 지어낸 말이야?”
그녀는 특이한 표현이나 잘 된 문장에는 본능적으로 반응하는 거 같았다.
나는 그것보다 자기라는 호칭에 두 귀가 확 열렸다. 친한 상대를 지칭하는 말이기도 하지만 내 귀에는 가까운 남녀 사이에서 쓰는 말로 들렸다. 아니, 그렇게 듣고 싶었다는 표현이 정확할 것이다. 그런 내 마음을 읽었는지 그녀도 조금은 애매해 하는 표정이었다. 나는 더 이상 내색하지 않았다. 진실을 알고 나면, 그게 꾸며낸 진실일지라도 허무해지거나 실망하는 경우를 종종 경험했기 때문이다.

수업 더는 못할 거 같아
우리는 술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나는 오늘은 건배 구호 하나를 만들자고 했지만 그녀는 여전히 술은 각자 알아서 마시는 것이라고 응수했다.
“그러려면 왜 같이 마셔요? 나는 이제부터 혼자라도 구호를 외치겠어요.”
“나의 여신을 위하여!!”
나는 그녀의 잔에 부딪히면서 이렇게 외쳤다.
그녀는 싫지 않은 표정이었다. 하지만 상응하는 대응은 하지 않았다. 그런 식으로 한참 내 얼굴을 들여다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오늘 첫 수업해 봤는데 더는 못할 것 같아……."
난데없는 폭탄선언이었다.
글공부도 생각보다 좋았거니와 누나와 마주 앉아 얘기할 수 있다는 게 더없이 좋았는데 이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인가.
나는 도대체 왜냐며 따지고 들었다.
그녀는 나를 보면 아버지에 대한 감정이 자꾸 되살아나 힘들다고 털어놨다.
"그렇군요……."
나는 갑자기 연민의 정이 치솟았다. 상처가 얼마나 깊길래….
"그래도 누나는 그런 아버지라도 아직 살아 계시잖아요. 저는 초등학교 4학년 때 잃었어요. 아버지를……"
누나는 깜짝 놀라는 표정이었다. 상처 없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나는 어머니에게 들은 비사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아버지에겐 매우 가깝게 지내던 고향 3년 선배가 있었다. 당시에는 오퍼상이 많았는데 그분도 그런 일을 했다. 일종의 무역중개업인데, 상대 나라에서 물건을 받아 국내 대리점에 공급하며 중간에서 마진을 먹는 사업이었다. 사업이 점차 커지면서 수입할 품목과 수량이 늘어나면서 자금이 더 필요하게 되었다. 그 선배는 아버지에게 은행이자의 두 배를 주겠다고 하고 돈을 빌렸다. 
 
아버지는 매달 이자 받는 재미가 쏠쏠했다. 충분히 믿을 만하고 사정을 훤히 아는 사람이었기에 위험하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았다고 한다. 사고는 늘 그런 때 터지는 법. 선배라는 사람이 해외 거래처에 거액의 물건대금을 송금했는데 그쪽에서 그걸 꿀꺽 삼켜버리고 종적을 감춰버리고 말았단다. 아버지는 선배에게 돈을 달라고 채근했지만 받을 길은 막막했다. 그 선배는 정말 생각지도 못한 사고라며 시간을 주면 재기해 아버지 돈부터 갚겠다고 약속했다. 그때 돈으로 1억이 넘었다고 하니 지금으로 치면 족히 10억은 되리라. 
 
2년쯤 지난 뒤 그 선배가 몇몇 채권자들에게 빚을 갚는다는 소리가 들렸다. 아버지는 선배를 찾아가 내 돈부터 갚는다고 했는데 어찌 된 일이냐고 따졌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되면서 두 사람의 우정은 바닥을 드러내게 되었다. 마침내 아버지가 선배의 멱살을 잡는 일까지 벌어졌다. 맨날 갚는다고 말로만 하지 말고 당장 내 돈 내놓으라고 벽에 몰아세웠다. 그 싸움이 걷잡을 수 없이 커졌고, 급기야 선배가 휘두르는 흉기에 아버지는 가슴을 찔리고 말았다. 피투성이가 돼 응급실에 실려 온 아버지를 보고 어머니는 혼절해 버렸다. 아버지는 닷새는 버텼지만 결국 회생하지 못했다.
 
숨도 안 쉬고 내 얘기를 듣던 누나가 내 얼굴을 어루만져 만져주었다. 천사의 손길 같았다.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상처는 때가 되면 아문다. 시간이 약이란 말은 대체로 맞다. 내 경우도 그랬다. 거의 잊고 지냈다. 친한 관계일수록 돈거래를 하지 말라는 어머니의 교훈만 새긴 채.
 
하지만 누나의 경우는 좀 다른 것 같았다. 대학 시절 들었던 강의가 어렴풋이 생각났다. 시간이 지나면 상처엔 새 살이 돋지만 보호막도 함께 자란다. 고통을 속으로만 새기는 사람은 스스로 자신을 지켜야 한다는 보호 본능이 웃자라는 경우가 많다. 다시는 그런 상처를 받지 않아야 한다는 강박증에 시달리기도 한다. 하지만 그게 뜻대로 안 된다. 벗어나야 한다고 다짐하면 할수록 더욱 깊은 늪에 빠진다. 오지 않는 잠을 자야 한다고 생각하면 할수록 불면의 시간이 길어지는 것과 비슷하다. 나는 누나의 위로를 받고 있었지만 그녀를 심연에서 하루빨리 구출해야 한다는 의무감이 커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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