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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수 “건물주·유튜버 꿈꾸는 아이들, 그 뿌리는 뭘까”

중앙일보 2018.11.22 00:04 종합 22면 지면보기
배우 김혜수. 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남성 위주 관료사회에서 분투하는 여성으로 나섰다. [사진 강영호 작가,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배우 김혜수. IMF 외환위기를 다룬 영화 ‘국가부도의 날’에서 남성 위주 관료사회에서 분투하는 여성으로 나섰다. [사진 강영호 작가, 호두앤유엔터테인먼트]

“인물과 스토리는 만들어도, IMF(국제통화기금) 협상 내용은 가공이 있을 수 없었죠. 시나리오 받아 보곤 피가 거꾸로 솟았어요. 우리가 미처 몰랐던 실체가 정말 너무하더라고요. 1997년은 우리 삶이, 가치관이, 양심이 왜곡된 선택을 하게 만든 결정적 시기였어요. 이 영화가 반드시 만들어져 더 많은 사람에게 그때의 진실을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사회영화 ‘국가부도의 날’ 주연
1997년 IMF 외환위기 전후 다뤄
최악 막으려는 한은 통화팀장 역
시대에 울고 웃는 인간군상 묘사

“시나리오 보고 피가 거꾸로 솟아
중산층·평생직장 왜 무너졌을까”

28일 개봉하는 영화 ‘국가부도의 날’(감독 최국희)에서 외환위기 당시 최악의 상황을 막으려 분투하는 한국은행 통화정책팀장 한시현 역을 맡은 배우 김혜수(48)의 말이다. 이 영화는 IMF 구제금융 협상 당시 비공개 대책팀이 운영된 사실에 상상력을 보태며, 국가부도 위기를 앞둔 일주일여를 여러 인물을 통해 재구성한다. 한시현과 충돌하는 재정국 차관(조우진 분)은 위기를 국민에게 공개하는 대신 정재계 동문들에게만 귀띔한다. 잇속 밝은 젊은 금융맨(유아인 분)은 위기에 역투자해 인생역전을 꾀한다. 중소기업 사장(허준호 분)은 정부의 낙관론을 믿지만 결국 비극적 상황에 내몰린다.
 
21일 만난 김혜수는 완성된 영화를 보고 “눈물이 났다”며 “완성도도 나쁘진 않았지만, 그런 걸 떠나 우리 모두 굳게 먹었던 마음만큼은 지켜냈구나, 싶었다”고 했다.
 
‘국가부도의 날’에 유아인은 젊은 금융맨으로 등장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국가부도의 날’에 유아인은 젊은 금융맨으로 등장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시나리오를 보고 왜 분개했나.
“처음엔 별생각 없이 펼쳐보다 어느 순간 모르는 것들, 정재계 관련 인물을 검색해가며 읽었다. IMF가 요구한 과도한 선결조건은 국제법에도 어긋난다. 도움받는 입장에서 우리 정부도 최소한 나라와 국민의 보호 장치는 마련했어야 했는데 패를 다 버렸더라. 90년대 중반만 해도 80%이상이 스스로 ‘중산층’으로 인식했고 ‘평생직장’이란 말이 있었다. 요샌 중산층의 안정적 기반을 가지려고 피눈물을 흘린다. 저는 연예인이고 상대적으로 혜택받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말을 하는 게 어떤 분들에게 박탈감을 줄 수 있다. 하지만, 당시 협상안을 읽으면서 오늘날 많은 젊은이들이 경제생활을 시작하기도 전에 삶의 위기를 느끼고 고통받는 근간이 된 것 같아 너무 속상했다. 요즘 초등학생 꿈이 유튜버와 건물주라잖나. 우리 사회의 시스템이, 분위기가, 어른들의 욕망이 아이들까지 돈 생각을 하게 부추긴 것 같아 충격적이었다.”
 
배우로서 97년을 기억하면.
“조심스런 얘기지만 연기자로선 큰 변화가 없었다. 좋은 음악들이 거리에 쏟아졌고 개성이 부각되면서 자유롭고 풍요로운 느낌이었다. 그러다 뭔가 불균형과 위험이 감지됐다. 어딜 가도 큰 재난이 있을 때처럼 뉴스가 들렸다. 당시엔 몰랐지만 친지 중에도 타격 받은 분들이 있었다. 영화에도 나오지만 IMF 사태가 터지고도 서민들은 우리가 과소비해서 이렇게 된 줄로만 알았다. 언론에서 그렇게 접했으니까. 십시일반 금 모으기 운동엔 저도 동참했다. 겪으면서도 잘 몰랐단 사실을 이 영화 찍으면서야 깨달았다.”
 
한시현은 위기를 예측하고 국민에 알리려 하지만 실패한다.
“씁쓸하지만, 한시현 같은 사람이 어떤 자리에서건 있었을 거라 믿고 싶다. 어찌 보면 모범적이고 전형적인 인물이다. 솔직히 좀 재미없을 수 있단 생각도 했다. 하지만 이 사람을 움직이는 진심이 찡했다. 정의의 투사가 아니라 내 삶의 자리에서 본분을 다하는 사람이기에 관료들과 IMF의 부당함에 부딪힐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옳다 그르다가 아니라 나는 과연 어떤 지점에 있는 어른인가를 생각하게 만드는 사람이었다. 연기 테크닉 차원이 아니라 경제용어와 영어가 뒤섞인 딱딱한 말들 속에 그의 진심을 어떻게 전달할지에 집중했다.”
 
‘국가부도의 날’에 뱅상 카셀은 IMF 총재로 등장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국가부도의 날’에 뱅상 카셀은 IMF 총재로 등장한다. [사진 CJ엔터테인먼트]

IMF와 협상 장면은 모두 영어인데.
“5개월의 프리프로덕션 기간 동안 제가 할 수 있는 것들을 하나하나 다져나갔다. 단어 하나라도 막연하거나, 대사에서 오는 중압감이 있으면 말에 감정을 실을 수 없다. 제작진에 뜻풀이를 요청해 두툼한 페이퍼를 읽고 또 읽었다. 굉장히 한심한 지경이었다. 자문해준 경제 관련 학자분들 설명은 녹음해서 들어도 어려워 실제 금융권에 종사하는 젊은 분에게 강의를 들었다. 저처럼 관객들도 낯설고 어려울 수 있는 단어들은 최대한 쉬운 말로 바꿨다. 영어 대사는 담당 선생님과 경제학자에 자문을 구하며 연습했다. 지나고 보니 ‘한시현처럼’ 철두철미하게 분석하고 준비하며 한시현에게 다가갔던 것 같다.”
 
IMF 총재 역을 맡은 프랑스 배우 뱅상 카셀과 호흡은 어땠나.
“강렬하고 매혹적인 배우잖나. 중요한 장면이기도 하고 엄청난 배우를 상대해야 한다는 부담감도 있었다. IMF를 겪은 나라 중 우리나라만큼 위기를 극복해낸 사례가 드물다. 뱅상 카셀도 그 지점 때문에 흥미를 가졌다고 했다. 실제 IMF 사태를 면밀히 공부해왔더라. 그래서 더 긴장하며 완벽을 기했다. 제가 시력이 나빠서 매번 컷하기 무섭게 모니터에 붙어서 확인했다. 외국배우가 한국영화에 나오면 튀기 쉬운데, 이질감이 전혀 들지 않는다는 게 놀랍더라.”
 
극중 한시현은 여성을 비하하는 사회적 편견에도 부딪히는데.
“20년 전엔 형식적인 ‘레이디 퍼스트’는 있어도 여성비하 발언이 자연스러웠다. 남자 상관이 말단 여성 직원에게 커피나 타오란 말을 해도 항의하는 게 이상했던 시대다. 당시 금융조직에 한시현 같은 위치의 실무직 여성이 있었냐 물으니 없었다더라. 남성형 권력구조 속에 그 정도까지 올라갔다면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엄청난 실력자란 설정이다. 여성이란 걸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으려 했다. 그만의 원칙, 소신에 충실하려 했다.”
 
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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