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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호 논설위원이 간다] “300명의 독재보다 360명의 민주주의가 낫다”

중앙일보 2018.11.22 00:04 종합 26면 지면보기
연동형 비례대표제 가능할까
시민단체와 원내외 소수정당이 지난달 31일 저녁 국회 정문 앞에서 개최한 ‘아주 정치적인 밤’ 문화제. [사진 정치개혁공동행동]

시민단체와 원내외 소수정당이 지난달 31일 저녁 국회 정문 앞에서 개최한 ‘아주 정치적인 밤’ 문화제. [사진 정치개혁공동행동]

“화장실 갈 때와 나올 때가 다르다더니 집권세력이 됐다고 정치적 대의 앞에서 유불리를 따지고 있다면 비난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정호진 정의당 대변인이 19일 더불어민주당을 비판했다. 그가 말한 ‘정치적 대의’는 정당 비례득표율로 국회 의석을 나누는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말한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부정적인 입장을 피력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소수 야당과 시민단체는 즉각 반발했다. 민주평화당은 20일 “민주당은 개혁을 말할 자격이 없다”는 논평을 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민주당의 대선·총선 공약이자 당론이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후보는 연동형 비례대표제의 일종인 권역별 비례대표제를 공약으로 내걸었다. 2015년 8월 민주당의 전신인 새정치민주연합은 이를 당론으로 채택했다. 2017년 대선 공약이기도 했다. 여당은 왜 입장이 바뀌었을까. 연동형 비례대표제는 대체 무엇이고 현실이 될 수 있을까.

정당 득표율로 의석 나누는 개혁
민주당 대선 공약 뒤집는 분위기

“집권했다고 정치적 대의 외면”
소수정당·시민단체 강력 반발

다당제로 협치와 정책 경쟁을
의원 수 늘리되 특권 확 줄여야

 
지난달 31일 저녁 국회 정문 앞. 시민단체 570여 곳이 함께 참여하고 있는 정치개혁공동행동과 원내외 소수정당이 주관하는 ‘아주 정치적인 밤’ 문화제가 열렸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오늘 행사는 국회 앞에서 경찰의 정식 허가를 받고 열리는 문화제 형식의 첫 번째 집회일 것”이라고 했다. 헌법재판소는 지난 5월 국회의사당 담벼락으로부터 100m 이내에서 집회·시위를 할 수 없도록 한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11조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다.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핼러윈 복장을 하고 참석했다. [뉴스1]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와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가 핼러윈 복장을 하고 참석했다. [뉴스1]

길거리 집회인데 특이하게도 핼러윈 복장이라는 ‘드레스코드’가 있었다. 마침 이날이 핼러윈 데이였기 때문이다. 행사에 참석한 500여 명의 시민 가운데 핼러윈 복장을 한 손학규 바른미래당 대표, 정동영 민주평화당 대표, 이정미 정의당 대표와 함께 신지예 녹색당 공동위원장 등 원외 정당 정치인의 모습도 보였다. 문화제에 앞서 이날 오전 국회 본청 계단에서 7개 정당과 시민단체가 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을 촉구하는 범국민 서명운동을 시작한다는 공동 기자회견을 했다.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참여하지 않았다. 선거제도 개혁보다 ‘지금 이대로’를 선호하는 두 거대정당의 속내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지난주 1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회의실. 국회 정치개혁특별위원회가 주최하는 선거제도 개혁 관련 공청회가 열렸다. 현재 선거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발언은 차고 넘쳤다. 가장 큰 문제는 국민의 표심(票心)이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는다는 불비례성이다. 최근 총선의 사표(死票) 비율을 보면 ▶18대 총선 47.1% ▶19대 총선 46.4% ▶20대 총선 50.3%였다. 강우진 경북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지난 총선에서 유권자의 58%가 투표하고 이 중에서 절반이 사표가 된 것을 감안할 때 20대 국회는 전체 유권자의 4분의 1의 지지로 구성됐고 나머지 4분의 3의 유권자는 정치적 대표를 갖지 못한 것”이라고 했다. 올해 6·13 지방선거도 표심이 지방의회의 의석수에 제대로 반영되지 않았다. 서울지역 정당 투표에서 50.9%를 얻은 민주당이 시의회 의석의 92.7%를 휩쓸었다. 반면 정당 투표에서 25.2%를 얻은 자유한국당은 시의회 의석의 5.5%만 차지했고, 11.5%의 표를 얻은 바른미래당은 겨우 0.9%의 의석을 얻었을 뿐이다.
 
이날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원내외 정당과 시민단체의 공동 기자회견.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불참했다. [뉴스1]

이날 오전 국회 본청 앞에서 열린 원내외 정당과 시민단체의 공동 기자회견. 더불어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은 불참했다. [뉴스1]

민심을 그대로 반영하려면 한 표의 가치를 동등하게 만들어 선거제도의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 이런 지적에 학계와 정치권은 대체로 공감한다. 독일식 연동형 비례대표제가 주목받는 것도 그래서다. 이 제도는 비례대표 선거의 정당 투표율에 따라 정당별 의석수를 결정하는 방식이다. 의석 배분을 할 때 지역구 당선자에게 먼저 배정하고 남은 의석을 정당 명부 순위에 따라 배정한다. 이를테면 비례대표 선거에서 한 정당이 정당 득표율로 50석을 확보했는데 지역구에서 30명이 당선됐다면 나머지 20석을 정당 명부에 따라 의석을 배정하는 것이다. 지역구 당선자가 55석이라면 정당 명부에 따른 추가 의석 배정은 없다. 5석의 초과 의석이 발생하기 때문에 의원 정수는 그만큼 늘어난다. 만약 20대 총선을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치렀다면 비례대표를 포함한 의석수가 ▶민주당 123석→110석 ▶새누리당 122석→105석 ▶국민의당 38석→83석 ▶정의당 6석→23석으로 바뀐다. 과다 대표된 거대 정당의 의석수는 줄고 과소 대표된 나머지 정당의 의석은 늘어난다. 지역구 텃밭에서 승자 독식을 누리고 있는 민주당과 자유한국당이 선거제도 개혁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여당 의원은 6·13 지방선거의 압승 분위기가 다음 총선까지 이어질 것으로 낙관하고, 자유한국당의 대구·경북(TK) 의원들도 텃밭의 안온함을 포기하고 싶어하지 않는다.
 
연동형 비례대표제에 대한 걱정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정당이 부실하면 아무리 좋은 제도라도 작동하기 힘들다. 정당 명부 작성의 객관성과 공정성이 무너지면 심각한 혼란이 생길 수 있다. 다당제로 인한 국정 혼란과 대통령제와의 정합성 문제를 우려하기도 한다.
 
하지만 장점이 훨씬 더 많다. 정치권에 협치와 타협의 공간이 열리고 의원들이 소모적인 지역구 관리에서 벗어나 국가적인 이슈를 다루는 선의의 정책 경쟁에 나설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 대표성을 특정 정당이 독점하는 것도 막을 수 있다. 박상훈 정치발전소 학교장은 “대통령을 둘러싼 적대적·양극화 정치로 퇴행하지 않으려면 제 2, 3 야당들이 다원적 경쟁과 협력의 정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다당제=정치 혼란’이라는 편견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강원택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는 “대통령제와 다당제의 결합에 대한 문제 제기는 과도한 미국 중심의 사고이며 양당제가 옳다는 건 예외적 사례인 미국만 고려한 것”이라고 했다.
 
연동형 비례대표제로 가려면 의원 정수를 늘려야 한다. 현실적으로 지역구 줄이기는 힘들어서다. 공청회에선 비례대표 의원이 지역구의 절반은 돼야 최소한의 비례성을 확보할 수 있다는 분석이 많았다(강원택·박상훈). 시민단체는 의원 수를 360석으로 늘리자는 쪽이다. 이들은 앞으로 여론전을 강화해 시민과의 공감대를 넓히고 선거제도 개혁 전선에서 뒷걸음질 치는 민주당을 압박하겠다는 계획이다. 하승수 비례민주주의연대 공동대표는 “연봉·보좌진 등 의원의 특권을 줄이면 현 수준에서 국회 예산을 동결하면서 의원 정수를 늘릴 수 있다”며 “국민 입장에서도 같은 돈으로 의원 300명을 쓰는 것보다 360명을 쓰는 게 낫지 않겠나”고 했다. 그는 “선거제도 개혁은 보수나 진보의 문제가 아니다”며 “정치적 계산만 버리면 가능하다”고 했다. 박상훈 학교장은 “비례성을 높여야 한다는 건 수학 공식처럼 간단하고 분명한 과제”라며 “개혁 논의를 공전시키거나 무책임하게 시간을 미루는 전략을 고수하는 정당에 한국 정치의 미래를 맡길 수는 없다”고 말했다.
 
뉴질랜드는 1993년 연동형 비례대표제를 도입했다. 뉴질랜드 국민은 의원 정수 확대에 대한 거부감을 이겨냈다. 당시 선거제도 개혁에 뛰어든 뉴질랜드 시민단체들이 내건 구호가 ‘99명의 독재보다 120명의 민주주의가 낫다’였다. 우리도 그렇게 외쳐야 한다. "300명의 독재보다 360명의 민주주의가 낫다.” 선거법 고치기는 개헌보다 어렵다고 한다. 길고 험난한 싸움은 이제 막 시작됐을 뿐이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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