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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BS2 일일드라마 '끝까지 사랑'. 남자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그럼 뭐 미투라고 하라"며 형편 없는 젠더 감수성을 보여준다. [사진 KBS]

KBS2 일일드라마 '끝까지 사랑'. 남자 엉덩이를 아무렇지 않게 만지며 "그럼 뭐 미투라고 하라"며 형편 없는 젠더 감수성을 보여준다. [사진 KBS]

 
"성별에 따른 차별·편견·비하·폭력 없이 인권을 동등하게 보장받고, 모든 영역에 동등하게 참여하고 대우받는 것". 법에서 정하고 있는 '양성평등'의 정의다. 굳이 이를 보지 않더라도, 상식적으로 성폭력 피해에는 남녀가 없다는 것 정도는 모두 안다. 그럼에도 뜬금없이 법전을 들춰본 건 최근 접한 몇몇 드라마 때문이다.
 
지난 9일 KBS 일일드라마 ‘끝까지 사랑’부터 보자. 이날 69회 내용은 이랬다. 극 중 여성 등장인물은 식당에서 청소하고 있던 남성의 엉덩이를 장난스레 ‘툭’ 친다. 이를 본 다른 남성이 깜짝 놀라며 “암만 남자 엉덩이래도 그러면 안 된다”고 정색하는데, 여성은 되레 웃으며 다가가 이번엔 정색한 남성의 엉덩이를 만지며 “이랬다고 그러느냐”고 말한다. 여기서 그치지 않고 여성은 말한다. “그럼 뭐 미투라도 하든가.”
 
범죄를 '당찬 행위'로 묘사한 드라마
MBC '숨바꼭질'. 극중 여주인공이 남자 목욕탕에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모습을 '당찬 모습'으로 그려 비판을 받았다. [사진 MBC]

MBC '숨바꼭질'. 극중 여주인공이 남자 목욕탕에 막무가내로 들어가는 모습을 '당찬 모습'으로 그려 비판을 받았다. [사진 MBC]

 
앞서 지난 9월 MBC 주말극 ‘숨바꼭질’은 여주인공이 막무가내로 남자 목욕탕에 들이닥친 장면을 담아 논란이 되기도 했다. 극 중에서 남탕에 들어간 여주인공의 성폭력은 '걸크러시' 캐릭터의 당찬 행위로 묘사됐다. 당시 제작진은 논란이 거세지자 “회사를 살리기 위해 통념을 깨어 나가는 과정을 그리기 위한 의도로 촬영된 장면이었다”며 사과했다. 지난 3월 MBC 월화극 '위대한 유혹자'도 남주인공의 얼굴·가슴·엉덩이를 주물럭거리는 장면을 우스꽝스럽게 묘사했다.
 
남성에 대한 성폭력 피해는 그간 사회적으로 인식 자체가 부족했다. 여성에 비해 절대적 피해가 작았던 이유도 있지만 가부장적 사회가 강요하는 ‘남성다움’의 굴레가 의식적 혹은 무의식적으로 남성의 성폭력 피해에 대한 목소리를 위축시켰다. 동시에 남성의 피해를 사소한 것으로 전락시켰다. 앞서 언급한 사례들은 이러한 사회적 부조리를 그대로 재연해 놓고, 폭력적 메커니즘을 재생산하고 있다.
 
공영방송이 "그럼 뭐 미투라도 하든가" 비아냥
공영방송인 KBS의 드라마 '끝까지 사랑'은 남성에 대한 성폭력을 가볍게 여기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그럼 뭐 미투라도 하든가"라며 미투 운동에 대한 조롱도 서슴지 않는다. 앞서 이 문제를 지적한 오마이스타의 김윤정 기자는 “성폭력 피해자의 용기에 ‘2차 가해’로 응답하기 일쑤인 사회에서, 미투는 이렇게 가볍고 우스운 농담의 소재가 될 일이 아니다”라고 짚었다. 변화에 앞장서야 할 공영방송이 오히려 거대한 사회적 흐름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다. 성공한 프로그램을 좇아갈 때는 그리도 트렌드에 밝던 방송가가, 유독 젠더 감수성에서는 이리도 변화가 늦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상담의 5%는 남성 피해자인데 이들은 주변의 인식이나 시선 때문에 상담 전화조차 지난한 고민 끝에 건다"며 "성폭력은 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도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권 침해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어떠한 성희롱 성폭력도 희화화의 대상이 돼선 안 된다"며 "방송사의 이러한 묘사는 성폭력을 심각한 인권 침해로 보지 않는다는 사고의 방증이 아니겠냐"고 말했다.
 
사회 변화 발목 잡는 지상파 드라마
SBS 일일드라마 '나도 엄마야'. 부인이 바닥에 앉아 남편의 발톱을 깎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 SBS]

SBS 일일드라마 '나도 엄마야'. 부인이 바닥에 앉아 남편의 발톱을 깎는 모습을 담았다. [사진 SBS]

 
남성에 대한 묘사가 이러니, 여성에 대한 묘사는 말할 것도 없다. 대중문화 속 여성에 대한 성폭력은 그간 숱한 비판이 일었음에도 여전해서 더 악질적이고 고약하다. 실연의 아픔을 달랜다며 술집 여성 종업원을 옆에 앉혀 놓고 노래를 부르는 모습을 '남성다운 행위'로 포장하거나(SBS ‘기름진 멜로’), 바닥에 앉아 소파에 앉은 남편 발톱을 깎아주는 부인의 모습을 담기도 한다(SBS ‘나도 엄마야’). 사랑한다는 이유로 강제로 포옹하거나 입맞춤하는 일방적 행동을 로맨틱한 것으로 그리는 건 ‘단골 메뉴’다.
 
실질적 양성평등을 이루려는 노력은 전 세계적으로도 여전히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변화에 과거로 회귀하려는 백래시(backlash) 현상이 적지 않은 게 사실이다. 성별 간 대립 구도로 상황을 단순화해 본질을 호도하고, 심지어 미투 등을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얄팍한 모습까지 보인다. 거기에 지상파까지 가담하는 모습을 보는 건 슬픈 일이다. 공공재인 전파를 무료로 이용해 방송하는 지상파의 공적 책무는 그네들이 필요할 때만 내세우는 '전가의 보도'인지 묻고 싶다.
 
 노진호 기자 yesno@joongang.co.kr
 
 
※[노진호의 이나불]은 누군가는 불편해할지 모르는 대중문화 속 논란거리를 생각해보는 기사입니다. 이나불은 ‘이거 나만 불편해?’의 줄임말입니다. 메일, 댓글, 중앙일보 ‘노진호’ 기자페이지로 의견 주시면 고민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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