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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사는 세상, 희망의 찬가도 묵시록도 아닌

중앙선데이 2018.11.17 02:00 610호 8면 지면보기
국립현대미술관 ‘문명–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전 가보니
제프리 밀스테인의 ‘공항’ 연작 중 ‘뉴어크8 터미널 B’(2016) ⓒ Jeffrey Milstein

제프리 밀스테인의 ‘공항’ 연작 중 ‘뉴어크8 터미널 B’(2016) ⓒ Jeffrey Milstein

유네스코 기록문화유산에까지 등재된 전설적인 사진전 ‘인간 가족(The Family of Man)’(1955) 이후, 인류를 통찰하는 대규모 국제사진전으로서 거기 필적할 만한 이름을 남긴 예는 별로 없었다. 잘해봤자 ‘인간 가족’의 비슷한 반복이나 비틀기이고, 못하면 산만하고 피상적인 전시가 되기 십상이었기 때문이다.  
'문명 -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 전시 전경. 칸디다 회퍼의 작품과 김도균의 작품이 보인다.

'문명 - 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 전시 전경. 칸디다 회퍼의 작품과 김도균의 작품이 보인다.

 
그런데 최근 용감하게 ‘인간가족’ 전에 도전장을 내미는 대규모 국제사진전이 시작됐다. 그것도 한국의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서. 저명한 사진 저술가이자 큐레이터인 윌리엄 유잉이 기획을 주도하고 국립현대미술관이 제작에 참여해 21세기 인류의 현재와 미래를 총체적으로 돌아보는 전시 ‘문명-지금 우리가 사는 방법(Civilization-The Way We Live Now·10월 18일~2019년 2월 17일)’이다. 중앙SUNDAY S매거진이 현장을 다녀왔다.  
 
43개국 135명의 작품 300여점 
'문명’ 전시의 공동기획자인 윌리엄 유잉이 로버트 워커의 ‘타임 스퀘어, 뉴욕’ 연작을 설명하고 있다.

'문명’ 전시의 공동기획자인 윌리엄 유잉이 로버트 워커의 ‘타임 스퀘어, 뉴욕’ 연작을 설명하고 있다.

독일 뒤셀도르프 사진학파 거장 칸디다 회퍼의 오래된 수도원 도서관 사진 옆에 한국 작가 김도균의 SF적인 거대 공항 주차장 사진이 걸려 있다. 전혀 다른 사진인데, 대칭적 구도가 묘하게 닮았다. 그래서 인류 문명의 시공간 이동이 자연스럽게 이루어진다.  
 
미국 작가 제프리 밀스테인, 독일 작가 크리스토프 길렌 등이 하늘에서 내려다본 공항·도로·주택단지의 아름다운 기하학적 형태와 선의 흐름에 감탄하다가, 옆에 걸린 멕시코 작가 알레한드로 카르타헤나의 사진 연작 앞에 서면 장엄함 뒤에 숨겨진 빈부격차의 어두운 현실을 갑자기 실감하게 된다. 같은 부감 사진인데, 픽업 트럭에서 잠자며 장거리 출퇴근을 하는 가난한 노동자들을 포착한 것이니 말이다.  
 
프랑스 작가 라파엘 달라포르타의 연작은 섬뜩하다. 노랑·분홍·연두색의 예쁜 화장품 용기 같은 것들이 알고 보니 사람의 육체와 생명을 산산이 부수는 대인지뢰들이라니. 리메이크한 SF영화 ‘로보캅’(2014)에도 차용된 적 있는 캐나다 작가 에드워드 버틴스키의 중국 닭고기 가공 공장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표정이 애매해진다. 핑크색 작업복을 입은 수많은 노동자가 끝이 안 보이는 겹겹의 컨베이어 벨트에서 일하는 모습에서 인구·식량·환경·노동·기술 등 수많은 현안 키워드가 떠오르며 경탄과 거부감이 동시에 일어나니 말이다.  
라파엘 달라포르타의 ‘대인’ 시리즈 중 4점의 대인지뢰(2004) ⓒ Raphael Dallaporta

라파엘 달라포르타의 ‘대인’ 시리즈 중 4점의 대인지뢰(2004) ⓒ Raphael Dallaporta

 
전시에 나온 다른 작품들도 그렇다. 43개국 135명이 내놓은 300여 점(연작으로 묶인 사진을 개별로 치면 500여 점) 하나하나가 이해하기 쉬우면서도 겹겹의 의미를 담고 있는데, 이것들이 복합적인 생각과 감정을 불러일으킨다. 앤터니 스패스 코리아중앙데일리 수석에디터는 “지치는 전시였다, 너무 볼 게 많아서. 열 중 아홉이 수작이었다”라고 말했고, 이번 전시에 작가로 참여한 시각예술가 한성필도 “동시대 사진예술계의 주요 작가들을 거의 다 모은 것 같다. 구성도 좋다”고 평했다. 
 
전설의 사진전 ‘인간 가족’에 도전하다
마크 파워의 ‘두 노래의 소리’ 연작 중 ‘바티칸에서 생중계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 폴란드 바르샤바, 2005년 4월’(2005) ⓒ Mark Power

마크 파워의 ‘두 노래의 소리’ 연작 중 ‘바티칸에서 생중계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 폴란드 바르샤바, 2005년 4월’(2005) ⓒ Mark Power

1955년 뉴욕 현대미술관(MoMA)에서 처음 열린 후 40여 개 국을 돌며 200만 명 이상의 관람객을 모은 ‘인간 가족’전은 사진 역사에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반드시 들어보았을 전시다. 당시 MoMA의 사진 수석 큐레이터였던 에드워드 스타이켄은 “인류는 하나”라는 메시지를 내걸고 각국 사진작가들이 인간의 출생·일·사랑·죽음 같은 개인사부터 전쟁과 평화 같은 사회사까지 담아낸 500여 점을 선보였다. 이 전시는 심지어 전쟁의 폐허에서 아직 복구 중인 57년 서울의 덕수궁 미술관에서도 열렸다. 얼마나 인기가 많았던지, 당시 사진을 보면 두루마기에 갓 쓴 할아버지부터 어린 학생까지 수많은 사람이 전시장 앞에 길게 줄지어 서있을 정도다.  
 
이번 전시를 기획한 윌리엄 유잉은 중앙SUNDAY S매거진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인간 가족’을 염두에 둔 게 사실이다. 규모도 사진 500여 점으로 비슷하다. 그러나 다른 점이 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얼마 안 된 시점에서 만들어진 ‘인간 가족’은 인간성에 대한 매우 긍정적인 비전을 보여주고자 했다. 기획자 스타이켄은 어떤 메시지를 갖고 있었다. 하지만 21세기 현재의 문명을 다룬 이 전시에는 그런 메시지가 없다. 내 메시지는 단지 ‘이것이 사진작가들이 하는 일이며 이것이 그들이 인류 문명에 대해 보여주는 것이다’일 뿐이다.”  
 
유잉과 젊은 미술사학자 홀리 루셀, 그리고 국립현대미술관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가 공동 기획한 이 전시는 과연 ‘인간 가족’ 처럼 휴머니즘 가득한 낙관적인 분위기가 아니다. 유잉은 기자간담회에서 “현재는 호모 사피엔스가 멸종할 수도 있는 최초의 세기”라는 미래학자 제임스 마틴의 말을 인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더 발전한 소통과 협업이 현대 문명의 긍정적인 면”이라고도 언급했다.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는 21세기 문명에 대해 긍정이나 부정의 어느 한쪽으로 기울지 않고 다만 현실주의적으로 다양한 사진 작가들의 눈을 통해 보려고 한다. 굳이 말하자면, 아주 약간, 현실성 있게, 긍정적이다.” 
 
유잉의 말대로 전시는 인류 문명에 대한 밝고 희망찬 찬가도 아니고 반대로 디스토피아로 향하는 묵시록도 아니다. 전시는 “우리 시대의 다면체적 초상화”를 8개의 섹션으로 구성했다.  
 
‘벌집(Hive)’ 섹션에서는 도시가 계속 성장하고 확장해가는 유기체 같은 면모를 드러낸다. 이 섹션은 ‘흐름(Flow)’ 섹션으로 자연스럽게 이어지는데, 인간·자원·상품·자본 등 온갖 것의 끊임없는 흐름과 그 흐름을 이어주는 도로·공장 컨베이어벨트·전선·배수관 같은 것을 포착한 사진들이 서로 극적인 대비와 조화를 이룬다.  
 
도나 슈워츠의 ‘둥지에서: 장래의 부모’ 연작 중 3점(2006-12) ⓒ Dona Schwartz

도나 슈워츠의 ‘둥지에서: 장래의 부모’ 연작 중 3점(2006-12) ⓒ Dona Schwartz

‘따로 또 같이(Alone Together)’ 섹션에서는 ‘결국 혼자’이지만 또한 ‘사회적 동물’일 수밖에 없는 인간의 여러 면모를 보여준다. 그 중 도나 슈워츠의 ‘장래의 부모’ 및 ‘빈 둥지의 부모’ 연작과 정연두의 ‘상록 타워’ 연작이 특히 흥미롭다. 여러 가족이 각자의 집안에 서있는 모습을 찍은 연작이라는 점에서 두 작가의 작품은 구조가 비슷하다. 하지만 슈워츠의 작품은 가족이 일반적으로 겪는 인생 사이클을 보여주는 것이 초점이고 다인종·동성 커플 등 다양한 구성의 부모와 인테리어가 나타나는 반면, 정연두의 작품에서는 31개 가족의 구성이 거의 비슷하고 그들이 서있는 거실의 가구 배치마저 놀랍도록 비슷해서, 획일화된 한국사회와 그 획일화를 부추기는 아파트 문화를 가늠케 한다.  
정연두의 ‘상록 타워’ 연작 중 3점(2001) ⓒ 정연두

정연두의 ‘상록 타워’ 연작 중 3점(2001) ⓒ 정연두

 
이어지는 ‘설득(Persuasion)’ 섹션은 광고와 프로파간다와 관련된 사진이 등장한다. 로버트 워커의 ‘뉴욕 타임스퀘어’ 연작에서는 요란하고 파편화된 거대한 광고 이미지들 사이에 실제 인간들이 섞여 있거나 거기 압도당해 있다.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의 장례식을 거대 전광판으로 바라보는 폴란드 군중을 전선이 잔뜩 꽂힌 전광판 뒤에서 포착한 마크 파워의 작품은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마셜 맥루언의 말을 비롯한 수많은 글귀가 입 안에 맴돌게 한다.  
 
이 섹션은 자연스럽게 다음 섹션인 ‘통제(Control)’로 흘러간다. 각종 군사시설 사진도 인상적이지만, 루카 차니에의 거대한 조명등을 밝힌, 텅 빈 국제축구연맹(FIFA) 집행위원회 회의실 또한 강렬하다. “전 세계 수십억 명이 동시에 보는 월드컵을 통제하는 것은 큰 권력이며 그러한 큰 권력 뒤에는 큰 부패가 쌓이기 마련”이라고 한국을 방문한 차니에 작가는 기자 간담회에서 말했다.  
 
루카 차니에의 ‘권력의 통로’ 연작 중 ‘국제축구연맹(FIFA) 취리히 집행위원회’(2013) ⓒ Luca Zanier

루카 차니에의 ‘권력의 통로’ 연작 중 ‘국제축구연맹(FIFA) 취리히 집행위원회’(2013) ⓒ Luca Zanier

이러한 권력의 틈바구니에서는 ‘파열(Rupture)’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이 섹션에는 아름다워서 오히려 끔찍한 대인지뢰 사진 연작처럼 전쟁 및 난민 관련 사진은 물론, 크리스 조던이 찍은, 새끼새의 시신에서 가득 나온 플라스틱 쓰레기 연작 등 환경과 관련한 충격적인 작품이 많다.  
 
뤼성원의 ‘흰 곰’ 연작 중 ‘로테르담 동물원, 네덜란드’(2016) ⓒ Sheng-Wen Lo

뤼성원의 ‘흰 곰’ 연작 중 ‘로테르담 동물원, 네덜란드’(2016) ⓒ Sheng-Wen Lo

하여 인간은 그 다음 섹션의 주제처럼 ‘탈출(Escape)’을 꿈꾼다. 그런데 어떻게 된 게 이 섹션이 8개 섹션 중에서도 특히 비관적으로 보인다. 그린란드의 빙하가 이미 오염으로 얼룩진 가운데 그 위에서 좋다고 사진 찍는 관광객들을 포착한 올라프 오토 베허의 작품, 인간들 사이에 놓인 북극곰의 침묵의 절규를 보여주는 듯한 뤼성원의 ‘로테르담 동물원’ 등은 자연조차 상품으로 개발해 소비하는 현대인과, 그런 소비를 통해서만 일상에서 ‘탈출’할 수 있는 웃픈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올해의 전시로 꼽을 만” 
뱅상 푸르니에의 ‘우주 계획’ 연작 중 ‘아리안스페이스 S1B 청정실의 로켓 추진체 1번,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기아나 우주센터’(2011) ⓒ Vincent Fournier

뱅상 푸르니에의 ‘우주 계획’ 연작 중 ‘아리안스페이스 S1B 청정실의 로켓 추진체 1번, 프랑스령 기아나 쿠루 기아나 우주센터’(2011) ⓒ Vincent Fournier

그렇다면 이러한 인류의 ‘다음(Next)’은 무엇인가. 이 섹션에서 각국 유전자 조작 동식물의 기괴한 모습을 보여주는 로버트 자오 런후이의  연작은 신기하면서 섬뜩하고, 중국 외딴 산 속에 위치한 구경 500m의 세계 최대 천문 망원경을 포착한 미하엘 나야르의 ‘빠.르.게’는 경이롭다. 하지만 뱅상 푸르니에의 순백색 기아나우주센터 내부에 서있는 우주인의 사진처럼, 인간은 우주복을 입고 있어도 거기에 연결된 탯줄 같은 긴 선을 필요로 할 것이다. “나는 이 사진에서 이 가늘고도 중요한 선이 특히 마음에 든다”고 유잉은 말했다.  
 
유잉은 “각 섹션의 사진이 여러 측면과 여러 겹의 의미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다른 섹션에도 들어갈 수 있다”며 “우리는 개별 작가들에게 연락해 전시 주제를 설명했는데, 작가들은 자신의 작품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관련된 주제의 다른 작가 작품까지 추천해 준 덕분에 전시가 유기적으로 풍요로워졌다”고 들려주었다.  
 
때문에 전시는 방대한 규모임에도 산만하다는 인상을 주지 않는다. 작품 설치 또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 제1전시실의 거대한 원형 공간을 잘 활용했다. 벽면에 걸린 사진들, 원형 전시실 한가운데 그물망 같은 스탠드에 걸린 사진들, 그리고 벽면 안쪽 전시실의 사진들로 관람 동선이 부드럽게 연결된다.  
 
2017 베니스비엔날레 한국관 예술감독을 맡은 바 있는 이대형 큐레이터는 “좋은 큐레이터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반드시 보아야 한다. 올해의 전시라고 할 만하다”며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전시는 중국 베이징 울렌스 현대미술센터(2019년 3월), 호주 멜버른 빅토리아 국립미술관(2020년 9월), 프랑스 마르세이유 국립문명박물관(2021년 1월) 등 10여개 미술관으로 순회전을 이어간다.   
 
글·사진 문소영 기자·코리아중앙데일리 문화부장 사진 국립현대미술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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