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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과 맘 선물하는 손글 쓰기 좋은 날

중앙일보 2018.11.16 15:00
[더,오래] 전새벽의 시집 읽기(21)
지난 추석 백화점에 갔다가 선물세트의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추석 전에 쌓여있던 것에 비해 특별히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추석 백화점에 갔다가 선물세트의 가격을 보고 깜짝 놀랐다. 추석 전에 쌓여있던 것에 비해 특별히 좋은 것 같지도 않은데 비싸게 팔리는 이유는 무엇일까. <저작권자(c) 연합뉴스, 무단 전재-재배포 금지>

 
지난 추석 때 선물을 사러 백화점에 갔다가 깜짝 놀랐다. 고기·과일·생선 등이 선물세트라는 이름 아래 엄청나게 비싸게 팔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좋은 제품이었겠지만, 그렇다고 추석 전에 그곳에 쌓여있던 것에 비해 특별히 더 좋은 것 같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이 가격의 차이는 무엇일까. 포장 값이라고 하기엔 차이가 너무 큰 것 아닌가.
 
빼빼로 축제에 가담하고 싶지 않은 까닭
유통업체의 대목 노리기가 아무리 장삿속이라고 하더라도, 그들을 마구 비난하기에는 개운치 않은 부분이 있다. 찾는 사람이 있는데 어쩌란 말이냐. 나만 하더라도 별다른 도리가 없어 결국 그 백화점에서 선물 쇼핑을 마쳤다. 내년에는 ‘산지직송 주문’ 같은 걸 미리 알아봐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추석 때는 나름 재미있게 장사하겠지만, 유통업체의 마음이 시종 편할 리 없다. ‘대목’이 무척 제한적이기 때문이다. 추석이 끝나면 남은 대목은 그야말로 손에 꼽는다. 10월의 할로윈, 12월의 크리스마스, 그리고 그사이 빼빼로 데이 정도 아닐까.
 
막대과자가 가득 찬 진열대 앞에서 관광객들이 상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화려한 포장을 한 선물도 좋지만 포장지는 결국 버려질 것이다. 선물은 마음에 쌓여야 한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막대과자가 가득 찬 진열대 앞에서 관광객들이 상품을 살펴보고 있는 모습. 화려한 포장을 한 선물도 좋지만 포장지는 결국 버려질 것이다. 선물은 마음에 쌓여야 한다. <저작권자 ⓒ 1980-2018 ㈜연합뉴스. 무단 전재 재배포 금지.>

 
평소 초콜릿류의 음식을 습관적으로 사 먹는 나는 빼빼로를 좋아한다. 하지만 11월에는 사지 않는다. 포장이 쓸데없이 과해지기 때문이다. 종이 상자와 비닐 하나면 될 포장이 어째서 이렇게 자꾸 늘어나는가. 여러 곽의 빼빼로를 묶어 하트가 그려진 비닐로 다시 감싸는 건 예사고 거기에 조화를 얹어 바구니에 넣은 다음 커다란 곰 인형까지 곁들여 파고 사는 이 축제에 나는 통 가담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는다.
 
받는 순간에야 예쁘고 화려한 선물이 좋을 것이다. 인스타그램에 자랑도 할 수 있고. 하지만 화려하게 포장한 과자 선물, 그것의 최종 목적지를 나는 어렵지 않게 떠올릴 수 있다. 포장지는 결국 버려질 것이고 내용물은 기껏해야 복부에 쌓일 것이다. 선물은 그런 곳이 아니라 마음에 쌓여야 한다. 마음에 쌓이는 것들은 이런 쪽이다.
 
내 그대에게 해주려는 것은
꽃꽂이도
벽에 그림 달기도 아니고
사랑 얘기 같은 건 더더욱 아니고
그대 모르는 새에 해치우는 그냥 설거지일 뿐.
얼굴 붉은 사과 두 알
식탁에 얌전히 앉혀두고
간장병과 기름병을 치우고
수돗물을 시원스레 틀어놓고
마음보다 더 시원하게,
접시와 컵, 수저와 잔들을
프라이팬을
물비누로 하나씩 정갈히 씻는 것.
겨울 비 잠시 그친 틈을 타
바다 쪽을 향해 우윳빛 창 조금 열어놓고,
우리 모르는 새
저 샛노란 유채꽃
땅의 가슴 간질이기 시작했음을 알아내는 것,
이국(異國) 햇빛 속에서 겁 없이.
 
-황동규,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
 
황동규 시인(1938~)의 ‘버클리풍의 사랑 노래’란 시다. 시인은 자신의 잘 알려진 다른 시 한 편에서 “내 그대를 생각함은 …(중략) 해가 지고 바람이 부는 일처럼 사소한 일일 것”이라고 한 바 있다. (‘즐거운 편지‘) 그 말처럼 상대 모르게 설거지를 해치우는 시인의 사랑 방식은 지극히 일상적이다. 너무 일상적이어서, 인스타그램에 자랑조차 할 수 없다.
 
하지만 어떤가. 대목일의 ‘일(日)’은 일 년에 몇 번뿐이지만 일상(日常)의 ‘일’은 매일이다. 일상의 순간에 상대방을 위한다는 건 좋은 일이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좋은 일은 그 마음이 ‘글’이 되어 남겨졌다는 것이다.
 
말보단 활자가, 활자보단 손글이 좋아
말은 뱉는 순간 흩어진다. 그걸 남기려면 활자로 바꾸어야 한다. 활자는 타이핑보다 직접 쓰는 것이 좋다. 손으로 쓴 글을 선물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선물하는 일이다. [사진 pixabay]

말은 뱉는 순간 흩어진다. 그걸 남기려면 활자로 바꾸어야 한다. 활자는 타이핑보다 직접 쓰는 것이 좋다. 손으로 쓴 글을 선물하는 것은 몸과 마음을 선물하는 일이다. [사진 pixabay]

 
말은 뱉는 순간 흩어진다. 그걸 잡아채려면 말을 활자로 바꾸어야 한다. 또 활자는 타이핑 치는 것보다 손으로 직접 쓰는 것이 좋다. 글은 마음이고 육필은 몸이라, 손으로 쓴 글 한 편을 선물하는 일은 몸과 마음을 선물하는 일인 것이다.
 
‘좋은 날에 글 주고받기’는 내게는 그럴듯하게 들리지만 모든 사람에게 잘 어울리는 일은 아닐 것이다. 그래도 한번 해보면 어떨까. 잘 쓴 글이 아니더라도 상관없다. 내가 잘나서 상대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닌 것처럼, 내 글이 잘나지 않았더라도 받는 사람은 분명 좋아할 것이다.
 
나는 오늘 아내에게 ‘당신이 귀여울 때’라는 작은 메모를 썼다. 별것 아니지만, 이런 것을 모아두었다가 나중에 꺼내보면 참 재미있지 않을까.
 
빼빼로와 달리 글 선물하기에는 특별히 좋은 날이 없다. 매일이 좋은 날이다. 수시로, 불규칙적으로, 내키는 대로 해도 좋다. 그래도 한 마디 덧붙이자면, 역시 내일보다는 오늘 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전새벽 회사원·작가 jeonjunha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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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새벽 전새벽 작가 필진

[전새벽의 시집 읽기] 현역 때는 틈틈이 이런저런 책을 통해 필요한 정보들을 얻었다. 인터넷 사용법부터 블록체인에 이르기까지. 은퇴 후에는 조금 다르다. 비트코인과 인공지능보다는 내 마음을 채워줄 따뜻한 말 한마디가 더 필요하다. 어쩌면 시 읽기가 그것을 도와줄지도 모른다. 중장년층에 필요할 만한, 혹은 그들의 마음을 움직일 시를 소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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