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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상복 연애소설> 전 아버지를 싫어해요, 세상에서 제일...

중앙일보 2018.11.16 08:00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일러스트 이정권 기자]

제8화

불길한 예감은 대체로 잘 들어맞는 것일까. 다음날 그녀는 도서관에 오는 날이었으나 나타나지 않았다. 술병이라도 난 걸까. 나도 작취미성이었지만 메일을 쓰기 시작했다.
 
"누나, 어제 하기 어려운 얘기 제게 해줘서 너무 고마웠어요. 매 순간 가슴이 찡했어요. 아버지와 단둘인 가정이 길고 어두운 터널이었다고, 의지할 아버지가 아니라 도망치고 싶은 대상이었다는 얘기를 들으면서 속으로 한참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그런 일은 다 과거입니다. 무겁고 음습한 지난날에서 이미 탈출한 거 맞죠? 무미건조한 결혼생활 같은 것도요.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대로 놓아버리세요. 그러면 그것들이 점점 더 멀어져 결국 눈에서나 마음에서나 떠나가지 않겠어요?
 
어제 누나 얘길 들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세상에서 내가 구원해야 할 딱 한 사람 있다면 그게 바로 당신일 거라고. 나만이 누나의 상처를 어루만져 치유할 수 있다고요. 지금 이대로의 누나를 사랑합니다. 누나는 내게 여신일 뿐입니다. 이름이 보람이든 무명이든 지금의 당신이 좋습니다. 이미 충분히 완벽해요. 어제 술자리에서 제가 농담처럼 말했죠. 누나의 시종이 되는 게 제 소원이라고. 100% 진심입니다. 언제나 누나 곁에서 누나가 필요로 하는 모든 걸 공급하는 자세로 살고 싶습니다. 제 진심의 고백을 받아주세요."
 
유치하다 싶었지만 솔직한 심정이었다. 본래 사랑에 빠지면 유치해진다고 하지 않던가. 전송키를 눌렀다.
 
어디로 사라진 걸까
하지만 그녀는 메일을 열어보지 않았다. 엿새가 지났는데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도서관에도 나타나지 않았다. 도대체 무슨 일일까. 혹시 그날 귀갓길에 무슨 사고라도 당한 건 아닐까.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그녀의 연락처도 모른다. 핸드폰을 사용하는지도 모른다. 
 
그날 저녁 내내 술 마시고 얘기하면서도 핸드폰 꺼내는 건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주소도 모른다. 신상에 대해 아는 건 마흔네 살, 김무명이 전부였다. 그날 택시를 타고 집에까지 바래다주지 못한 것이 후회됐다. 그랬으면 집이라도 한번 찾아볼 수 있을 텐데…….
 
-아, 그렇지…….
그제야 나는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그날 그녀가 타고 떠나는 택시를 휴대폰으로 찍어둔 것이 생각났다. 경찰 친구의 도움으로 택시기사와 통화했고, 그날 그녀를 내려다 준 곳을 확인할 수 있었다. 나는 바로 그곳으로 달려갔다. 한남동이었는데 좌우에 늘어선 집들 가운데 어느 집인지는 분간할 길이 없었다.
 
나는 저녁 즈음에 다시 기다리기로 하고 일단 철수했다. 다음날, 그러니까 첫 데이트 후 1주일이 되던 날 오후 4시쯤 마침내 그녀의 벤츠가 시야에 들어왔다. 쭈그리고 앉아 있던 나는 얼른 일어나 차 앞을 가로막았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도대체 어떻게 여길 알고 왔어요?"
 
"메일도 보지 않고 도서관에도 안 와서 무슨 큰일이라도 난 줄 알았어요."
 
"집에 차를 두고 올 테니 저기 '바람의 언덕' 카페에서 좀 기다리세요."
 
그녀는 다시 높임말을 쓰고 있었다. 그날 술자리 분위기는 그날로 끝이라는 뜻일까. 나는 그게, 사람이라는 게 본래 시공간의 속성을 벗어나기 힘들기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무엇보다 첫 데이트 뒤 1주일이나 지났다는 시간성이다. 연락도 두절된 상태에서. 장소는 그녀 집 근처다. 그냥 좀 아는 정도로 여기는 남자가 자신의 동네로 갑자기 찾아왔는데 거기서 야, 자 하면서 막 대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나는 다시 편한 동생처럼 대해주면 좋겠다고 했다. 그녀는 알겠다고 했지만 편한 어투가 아니었고, 중간 중간에 높임말이 계속 나왔다.
 
"무슨 일 있는 건 아니죠?"
 
그녀는 아버지 요양원에 다녀오는 길이라고 했다. 올해 84세인데 갈수록 상태가 나빠져 이젠 미워할 수도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돌아가시기 전에 화해해야 하는데 의사소통도 잘 안 된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처음 보는 누나의 눈물이었다. 난 바로 손수건을 건넸다. 그 순간 어머니의 가르침이 더없이 고마웠다. 남자는 늘 손수건을 가지고 다녀야 한다, 손수건은 내가 아니라 남을 위한 것이다, 데이트할 때 여자친구를 위해 벤치에 깔아주고, 누군가 다쳐서 피를 흘릴 때, 어린아이가 옷에 무엇을 흘렸을 때처럼 쓰임새가 무궁무진하다고 했다.
 
결혼도 한 번 해봤고….
그녀는 아직 내 메일을 못 봤다고 했다. 며칠간 아버지를 간호하느라 피곤할 텐데 얼른 집에 들어가 쉬라고 했다. 메일 보라는 말도 빠뜨리지 않았다. 누나 집에서 옥수동 우리 집은 가까웠다. 택시로 10분 정도면 충분했다. 누나 집도 대충 확인했고 우리 집에서 가깝다는 것도 마음에 들었다. 물론 누나의 아버지가 편찮다는 건 부담이었지만.
 
이제 나의 고백 편지에 그녀가 어떤 답장을 보낼 것인지, 그것만 궁금했다. 그녀의 답신은 밤 10시쯤 왔다. 자신은 혼자가 좋다고 했다. 결혼도 한 번 해봤으니 더 이상의 결혼은 없을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내가 자기를 좋아하는 것을 말릴 수는 없지만 지금 이 상태에서 더 발전하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도 했다. 나는 낙담했다. 1주일 전 그런 속 깊은 얘기를 털어놓을 정도라면 내게 관심 있다는 뜻이 아니었나…….
 
나는 서운하고 속상했다. 하긴 지난 몇 달 그녀와 이메일 데이트를 하면서 실망하고 낙심한 게 어디 한두 번인가. 그래도 그녀는 희망의 불씨 하나는 남겨두었다.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소통은 유지해도 좋다는 것이었다. 사실 여기까지 온 것만 해도 크나큰 진전이었다. 처음 그녀에게 접근할 때만 해도 지금 상황은 상상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로부터 다시 닷새가 지난 뒤 그녀가 도서관에 나타났다. 나는 말 그대로 날아갈 심정이었고, 구름 위를 걷는 기분이었다. 1시간쯤 뒤 나는 그녀 자리로 다가가 커피 한잔하자는 메모를 건넸다. 도서관 카페에서 기다리는데 10분쯤 뒤 그녀가 나왔다.
 
"이젠 전처럼 월요일과 수요일에는 빠지지 않고 나오실 거죠?"
 
그녀는 고개만 끄덕였다. 막상 다시 만났지만 딱히 할 얘기는 없었다. 훤한 대낮에, 어색했다. 나는 너무 초조해하지 말자고 속으로 되뇌었다. 그녀를 도서관에서 다시 본 것만 해도 가슴이 벅찼으니까.
 
그 후에도 나의 도서관 출입은 계속됐다. 하지만 다음 진로 찾기 같은 목적은 뒷전으로 밀린 상태였다. 산이 있으니 오른다고, 도서관이 있으니 간다는 식이었다. 백수라는 사실도 아직은 그녀에겐 비밀이었다. 회사가 베트남으로 이전하면서 그 중간에 몇 달 여유시간이 생겨서 도서관에 나와 이 책 저 책 보면서 재충전 중이라고 둘러댔다. 나의 여신 앞에서 백수라는 말은 절대 나오지 않았다.
 
연애의 조건
도서관에 나와서는 누나를 찾는 일도 변함없었다. 누나의 행동이나 동선도 그 전과 달라지지 않았다. 월요일과 수요일, 오전 10시쯤 나타나 오후 5시쯤 떠나는 것도 그대로였다. 하지만 엄청나게 달라진 것이 하나 있다. 월요일과 수요일 오후 1시간 정도 그녀와 직접 대면하는 기회가 열린 것이다.
 
1대1 글공부 시간이었다. 나의 절절한 구애에 누나는 조건을 하나 걸었다. 자기에게 글짓기를 배워야 한다는 거였다. 자신을 좋아하는 걸 허락하되, 자기식의 글쓰기를 내게 가르치겠다는 거였다. 허용이나 허락 같은 단어가 자주 사용되는 걸 보면 여전히 우리는 상하관계였다. 사귀는 것도 그녀의 허락이 있어야 가능하고, 조건도 그녀가 일방적으로 정하는 것이었다.
 
"누나가 글쓰기를 가르쳐주고, 나는 그걸 배워야 한다구요? 그런 조건이라면 마다할 이유가 없죠. 좋습니다."
 
그녀는 내가 너무 좋아하자 부연설명을 했다.
"그게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닐 거야. 너무 만만하게 보면 안 돼. 내가 네 첫 메일을 맘대로 고쳐 보내준 거 알지? 그땐 그냥 아무 설명 없이 고친 글만 보여줬지만 이젠 내 앞에서 뭐가 잘못됐는지 일일이 지적받아야 하는데…."
 
"누나, 사실 저도 한때 문학 소년이었어요. 글짓기 반에서도 활동하고. 고등학교에 올라오면서 수업과 입시 공부에 매달리는 바람에 그런 활동은 사라졌지만…. 어쩌면 뒤늦게 누나를 만나 작가의 꿈을 이룰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나는 사탕을 쥔 아이처럼 좋아했다. 나의 목표는 하나, 나의 여신을 자주 만나는 것뿐이었다. 그러니 누나의 조건이라는 건 아무런 장애가 되지 못했다. 첫 수업 날이 되었다. 첫 데이트 후 우리의 관계가 한참 지지부진하다가 새로운 장이 열린 것이다. 과제는 나흘 전 이메일을 통해 나에게 전달됐다. 도서관 곳곳에 붙은 안내문 중 잘못 쓴 글을 찾아서 고쳐 써 오라는 것이었다. 
 
오후 4시 나는 도서관 카페로 가서 구석자리에서 누나와 마주 앉았다. 카페 분위기와는 달리 누나는 매우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나의 국어 선생님으로 등장하는 첫날이었기 때문에 그랬을까. 나는 일단 선생님의 마음에 드는 착한 학생이고 싶었다. 해온 숙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놨다. 그때 음료가 준비됐다며 진동벨이 울렸다. 내가 벌떡 일어나자 누나는 제지했다.
 
"나와 함께 수업하는 이 시간, 너는 학생이야. 학생의 임무는 오로지 배우는 것이고."
커피는 누나가 가지고 왔다.
 
"수업시간 중 나에 대한 호칭은 선생님이야. 알았지? 오늘은 첫 시간이라 간단한 과제를 내줬고, 1시간도 안 걸릴 거야."
 
나는 첫 과제를 내놓았다.
<헤드폰을 끼고 나누는 대화는 타인에게 소음을 초래하므로 민원이 발생하지 않도록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는 이 안내문을 아래와 같이 고쳐 보여주고, 설명이 필요한지 물었다.
--헤드폰을 끼고 나누는 대화는 타인에게 소음을 초래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누나는 더 고칠 데가 없냐고 물었다.
난 다시 읽어봤지만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타인에게 소음을 초래한다는 대목이 좀 이상하지 않아?"
 
나는 고개를 갸우뚱했다.
 
--헤드폰을 끼고 나누는 대화는 타인에게 소음이 될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헤드폰을 끼고 나누는 대화는 주변 사람을 방해할 수 있으므로 주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선생님은 두 개의 조금 다른 문장을 제시했다.
 
"큰 차이 없는 것 같은데요."
 
"큰 차이는 없어도 작은 차이는 있는 거야. 글을 조금이라도 더 개선하는 게 내 수업의 목표야."
 
지적을 받고 다시 읽어보니 선생님 글이 더 자연스럽다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역시 제 선생님, 맞네요..."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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