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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 부자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방법은?
백성호의 현문우답

고 이병철 회장의 질문, 부자가 '바늘구멍' 통과하는 방법은?

중앙일보 2018.11.16 07:00
백성호 기자 사진
백성호 중앙일보 종교담당차장 vangogh@joongang.co.kr
 
사람들은 ‘자연인’이나 ‘무소유’의 삶을 꿈꿉니다. ‘무소유’하면 법정 스님의 수필집 『무소유』가 떠오르지요. 그런데 정작 “무소유가 뭡니까?”하고 물어보면 우물쭈물합니다. 딱 떨어지게 답을 하지는 못합니다.  
 
“뭔가 어렴풋하게는 알겠는데, 딱히 뭐라고 말하기는 또 어렵네.” 주로 이런 답이 돌아옵니다. 그럴 때 저는 다시 물어봅니다. “그 어렴풋한 그림은 어떤 건가요?” 그럼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의 가족도, 나의 재산도, 나의 명예도 모두 뒤로 하고 산속에 들어가서 사는 거지.” 아니면 이런 답도 돌아옵니다. “내가 가진 것을 하나씩 둘씩 모두 내려놓고, 검소하게 사는 것 아니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무런 소유물도 없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돌아다니는 나그네의 삶. 그런 거라고 생각해.”  
 
 
그들의 대답은 다 제각각으로 들립니다. 그런데 가만히 들여다보면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건 ‘물질적으로 점점 가난해지는 삶’입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내심 이런 삶을 동경합니다. 그런데 한 꺼풀 더 들어가서 따져보면 사실 이런 삶을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래서 ‘무소유’를 동경하면서도 ‘나하고는 상관없는 삶’이라며 등을 돌리고 맙니다. 법정 스님의 수필집을 읽을 때는 감동을 받지만, 나의 일상으로 돌아서면 ‘그건 내 일은 아니야’라고 생각합니다. 
 
여러분은 어떠십니까. 자신의 일상에서 ‘무소유의 삶’을 살고 계시나요. 아니라고요? 그럼 진정한 ‘무소유’란 대체 어떤 걸까요. 정말 그렇게 부담스럽기만 한 걸까요.  
 
 
불교에만 ‘무소유’가 있는 건 아닙니다. 그리스도교에도 ‘무소유’가 있습니다. 여러분도 많이 아는 구절입니다.  
 
“부자가 천국에 가는 것보다 낙타(혹은 밧줄)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마태복음 19장24절)
 
 
듣고 보니 참 비슷하죠? 삼성의 창업주인 고(故) 이병철 회장도 타계하기 몇 달 전에 가톨릭 신부에게 이런 물음을 던졌습니다. 부자는 왜 천국에 갈 수 없느냐고 말입니다. 왜 그런 물음을 던졌을까요? 아무리 생각하고 또 생각해도 이해하기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받아들일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런 물음을 던진 겁니다. 언뜻 보면 예수 역시 ‘무소유의 삶’을 설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부자는 무조건 바늘구멍을 통과할 수 없는 걸까요. 그럼 ‘부자인가, 부자가 아닌가’를 가르는 재산의 총액은 얼마쯤 되는 걸까요. 그게 있어야 내가 진짜 부자인지 아닌지 알 수 있을 테니 말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가령 이웃에게 많은 걸 베풀고,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돕는 억만장자가 있습니다. 그런 사람 역시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는 어려운 걸까요? 그럼 붓다 당시에 거부(巨富)였던 유마 거사는 지옥으로 간 걸까요? 아무리 생각해도 알쏭달쏭할 뿐입니다.  
 
‘무ㆍ소ㆍ유(無ㆍ所ㆍ有)’란 세 글자를 들여다보세요. ‘무(無)의 처소(所)가 유(有)다.’ 그걸 풀이하면 ‘없음이 있음 속에 있다’가 됩니다. 이번엔 거꾸로 읽어보세요. ‘유ㆍ소ㆍ무(有ㆍ所ㆍ無)’. ‘유(有)의 처소가 무(無)다.’ 풀이하면 ‘있음이 없음 속에 있다’가 됩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보던 소리가 아닌가요. 그렇습니다. 붓다는 이걸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이라고 표현했습니다. 다시 말해 ‘무소유=공즉시색’이 되고, ‘유소무=색즉시공’이 되는 겁니다.  
 
이제 우리는 ‘열쇠’를 하나 찾았습니다. ‘무소유’의 진정한 뜻이 무언인지 풀어줄 열쇠 말입니다. 부자가 왜 바늘구멍을 통과하지 못하는지 일러줄 열쇠 말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이렇게 따집니다. “삶은 결국 경쟁이잖아. 학교에서도, 직장에서도, 사회에서도 모두가 경쟁이야. 그런데 무언가를 거머쥐려는 소유욕도 없이 어떻게 상대를 이길 수 있겠어? 소유욕이 없다면 이 험난한 경쟁사회를 헤쳐갈 수가 없지.” “욕망이 없다면 결국 어떠한 성취도 없는 것 아냐? 무소유는 정말 도인이나 성자의 일이지, 우리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야.”  
 
과연 그럴까요? 스포츠 선수들을 보세요. 그들은 매순간 승리와 패배의 갈림길에서 경기를 뜁니다. 그런데 감독이나 코치는 항상 “몸에 힘을 빼라”고 말합니다. “긴장을 풀라”고 합니다. 왜 그럴까요. 몸에 힘이 들어가면 어깨와 근육이 뻣뻣해지니까요. 결국 자기 실력을 다 발휘할 수가 없습니다. 그럼 그렇게 몸에 힘이 들어가는 근원적인 이유가 뭘까요? 맞습니다. 마음에 힘이 들어가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해 ‘승리’에 집착하기 때문입니다. 결국 나의 소유욕으로 인해, 내 안의 에너지를 다 뽑아낼 수가 없게 됩니다.  
 
운동뿐만 아닙니다. 우리의 삶도 그렇습니다. 마음으로 무언가를 ‘꽈∼악!’ 붙들고 있다면 긴장을 하게 마련입니다. 힘이 들어가니까요. 동시에 우리의 하루가 경직되고, 우리의 삶도 뻣뻣해지는 겁니다. 대상은 물질적 재산뿐만 아닙니다. 과거의 상처, 현재의 욕망, 미래의 불안 등 내 마음이 뭔가를 ‘꽈∼악!’ 틀어쥐고 있다면 그게 바로 ‘소유의 삶’이 되는 겁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부자’가 되는 거죠.  
 
 
그러니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는 집착에 대한 무소유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부자의 기준도 ‘재산의 총액’이 아니라 ‘집착의 총액’입니다. 집착이 클수록 바늘구멍은 좁아지고, 집착이 적을수록 바늘구멍은 넓어집니다. 집착이 많을수록 천국과 멀어지고, 집착이 적을수록 천국과 가까워집니다.  
 
 
예를 들어 부자와 거지 두 사람이 있습니다. 물질에 대한 집착 없이 어려운 이웃에게 많이 베푸는 억만장자와 돈에 대한 엄청난 집착을 안고 살아가는 가난한 거지입니다. 둘 중 누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게 될까요. 둘 중 누가 불교에서 말하는 ‘무소유의 삶’에 가까운 사람일까요. 그렇습니다. 물질의 창고가 비어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음의 창고가 비어있는 사람입니다.  
 
 
 
붓다는 ‘있음’의 정체가 ‘없음’이라 했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잡히는 물질의 정체가 ‘없음’이라 했습니다. 그 ‘없음’이 현실에서는 ‘있음’으로 작용합니다. 그걸 깊이 이해할 때 ‘무ㆍ소ㆍ유(無ㆍ所ㆍ有)’와 ‘유ㆍ소ㆍ무(有ㆍ所ㆍ無)’의 뜻도 깨닫게 됩니다.  
 
그렇다면 ‘무소유의 삶’은 뭘까요? 그렇습니다. 죽을 힘을 다해 틀어쥐고 있던 마음의 손아귀를 푸는 겁니다. 그럼 되묻겠죠. “그렇게 힘을 빼면 목표도 없고, 도전도 없고, 성취도 없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습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은 우리 눈앞에 주어진 현실이죠. 그건 부정의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인 긍정의 대상입니다. 우리가 그걸 외면한다면 대체 어디에 ‘삶’이 있겠습니까? 그 속에서 힘을 뺀 슈팅, 자연스런 스윙, 걸림 없는 점프를 하는 겁니다. 왜냐고요? ‘소유의 에너지’보다 ‘무소유의 에너지’가 훨씬 더 크니까요.  
 
 
이번 주 J팟 팟케스트 ‘백성호의 리궁수다’의 주제는 ‘[일상의 궁리] 내 마음 속 리궁수다’입니다. 지지고 볶는 일상 속에도 궁리의 순간이 있습니다. 가만히 들여다보면 일상 속 궁리와 종교적 수도 과정이 다르지 않습니다. 맥이 통합니다. 아래 배너를 클리하시면 더 많은 이야기가 기다립니다.  
 
 
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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