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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재는 안하고 선동열 모욕···야구인 충격 빠뜨린 정운찬

중앙일보 2018.11.16 01:15
지난 1월 취임한 정운찬(71) 한국야구위원회(KBO) 총재는 "권위적인 의미의 총재 대신 커미셔너(Commissioner)로 불러달라"고 말했다. 1920년 판사 출신인 케네소 마운틴 랜디스가 메이저리그 사무국 초대 수장을 맡은 후 커미셔너는 '중재자'의 의미로 사용된다.
 

[김식의 야구노트]
커미셔너 책무인 '중재자' 역할 실패
야구장 자주 가도 선동열 감독 안 만나
정치인 이력 있지만 정치적 역할엔 소홀

뛰어난 경제학자였던 정 총재는 국무총리까지 지낸 정치 이력이 있다. 야구인들은 그가 KBO리그의 산업화를 이끌고, 그 과정에서 정치적 역량을 발휘하길 기대했다. 정 총재도 "일을 잘해서 연말 인센티브를 받고 싶다"고 말했다.
 
10월 23일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는 정운찬 KBO총재. 양광삼 기자

10월 23일 문화체육관광위 국정감사에 출석해 증인선서를 하고 있는 정운찬 KBO총재. 양광삼 기자

 
일부는 정치인이 KBO 수장을 맡는 걸 우려했지만 총재는 어쩔 수 없이 정치적인 자리다. 이해·갈등 당사자들을 만나고, 설득하고, 중재하는 게 총재의 가장 큰 역할이다. 일인지하만인지상(一人之下萬人之上)이라는 국무총리 경력은 그의 눈부신 '정치 스펙'이다.
 
그러나 지난달 23일 국정감사 증인으로 섰던 정 총재의 발언은 너무나 비정치적이었다. 당시 손혜원(61)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야구대표팀 선발 과정에서 오지환(LG) 등 병역미필자를 우대했다는 의혹을 제기하며 선동열(55) 대표팀 감독의 사퇴를 요구하고 있었다.
 
정 총재는 "선수 선발은 감독의 고유 권한이다. 하지만 국민의 비판 여론을 제가 선 감독에게 알렸다면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금메달을 따고도 팬들로부터 비난을 받는) '오늘과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선 감독이 잘못했고, 자신은 그걸 바로잡지 않은 점을 사과하겠다는 뜻으로 들렸다.
 
이후에도 정 총재의 발언은 거침없었다. 그는 "TV를 보며 선수들을 파악했다는 것은 선 감독의 불찰이다. 이는 경제학자가 시장에 가지 않고 지표만 분석하는 것과 같다"고 말했다. 이어 "전임(專任) 감독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아마추어 선수들을 대표팀에 포함했어도 결과(금메달)는 달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의 테드 윌리엄스처럼 스타 선수가 감독으로 잘 풀리지 않는 경우도 있다"는 말도 했다.
 
정 총재는 손 의원이 듣고 싶어하는 대답을 하느라 불필요한 말까지 했는지 모른다. 발언 중 "제 사견은…"이라는 단서를 달기도 했다. 그러나 이 말을 들은 야구인들은 충격에 빠졌다. 전국에 생방송 되는 국감에서 총재가 증인선서를 하고 한 발언이 개인 의견일 수 없다는 건 자명한 사실이다. 정 총재는 선 감독의 지도방식은 물론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듯한 답변을 했다. 선 감독이 '국보(國寶)'로 불린 스타였다는 이력도 마치 약점인 것처럼 말했다.
 
손 의원이 "조 토리, 왕정치(오 사다하루)처럼 스타 선수가 감독이 된 사례도 있지만 토니 라루사처럼 선수 시절에는 유명하지 않았는데 훌륭한 감독이 된 사례도 있다"고 말하자, 정 총재는 윌리엄스 사례로 맞장구를 쳤다. 정 총재는 "(SK·KIA·KT 사령탑을 지낸) 조범현 감독이 그런 분"이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조 감독에 대한 설명을 한참 했다.
 
선 감독이 얼마나 큰 모욕감을 느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정 총재와 손 의원이 합을 맞춘 듯 야구 상식을 주고 받는 건 그렇다 쳐도, 선 감독의 사퇴를 압박하는 상황에서 다른 감독의 실명을 거론한 의도를 이해하기 어려웠다. 비난 여론의 화살을 홀로 맞고 있는 선 감독 뒤에서 정 총재는 논문을 발표하는 학자처럼 자신의 신념을 차분하게 말했다.
 
국감이 끝난 직후 장윤호 KBO 사무총장은 "총재님이 소신대로 말씀하셨다"고 평했다. 정치적 수사(修辭)가 필요할 때 비정치적 소신 발언을 한 탓에 여론의 역풍이 불었는데도 그랬다. 선 감독은 지난 14일 사퇴 의사를 밝히며 "이게 총재의 소신에 부합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45년 동안 선수·코치·감독으로서 야구장에서 살다시피한 선 감독을 정 총재는 '시장에 가지 않는 경제학자'로 비유했다. 정작 중재자가 필요한 현장에 정 총재를 보기 어려웠다. 아시안게임 이후 한 달 넘도록 선 감독이 팬들과 정치권으로부터 맹공을 받는 동안 정 총재는 당사자를 만나지 않았다.
 
정 총재의 국감 발언은 선 감독 사퇴의 직접적 발화점이었다. 그럼에도 정 총재는 장 사무총장을 선 감독에게 보내 "사견을 말한 것이니 오해 말라"고 전했다. 선 감독이 사퇴 기자회견을 할 때도 같은 건물에 있던 정 총재는 나타나지 않았다. 대신 장 사무총장이 기자회견장에 나와 "선 감독이 너무 갑작스럽게 사퇴해서 현재로서는 대책이 없다"고 말했다.
 
정 총재는 지난 2월 미국·일본을 오가며 훈련 중인 선수들을 훈시했다. 7월엔 메이저리그 사무국을 방문했고, 뉴욕의 양키스타디움에서 시구를 했다. KBO리그와 아시안게임도 열심히 봤다. 정 총재에게 '시장'은 의전을 받는 야구장만이 아니다. 오히려 이해 당사자가 얽혀 있는 곳이 총재의 진짜 업무공간일 터인데 그는 좀체 보이지 않았다.
 
지난 7월 정운찬 총재가 양키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메츠와 양키스 경기에서 시구하고 있다. [사진 KBO]

지난 7월 정운찬 총재가 양키스타디움에서 펼쳐진 메츠와 양키스 경기에서 시구하고 있다. [사진 KBO]

 
노련한 정치인은 시민이 던진 달걀을 피하지 않는다. 심지어 테러를 당해도 그걸 역전의 기회로 삼을 줄 안다. 정 총재가 생즉사 사즉생(生卽死 死卽生)의 심정으로 국감에 섰다면, 손 의원의 공격을 의연하게 받아내고 선 감독을 비롯한 야구인들을 보호했다면 '오늘과 같은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모든 게 내 탓"이라고 말했어도 정 총재가 책임질 일은 하나도 없었다.
 
선 감독은 초지일관 "모든 책임은 감독이 진다"고 했다. 그가 삼성·KIA 감독을 맡았을 때 스타일로 짐작해 보면, 선 감독은 투수 파트 전체를 관장했을 것이다. 수비·공격 파트는 코치들에게 권한을 줬을 것으로 보인다. 대표팀의 한 코치는 "선수 선발은 우리 모두의 책임인데 선 감독님 혼자 떠안고 계신다. 정말 죄송하다"고 말했다.
 
선 감독은 14일 기자회견에서 "내가 떠나는 것이 선수들을 보호하고, 금메달의 명예를 지키는 일"이라며 자리를 떠났다. 국감에서 "야구만 할 줄 알았지 행정은 하나도 모른다"던 선 감독의 말과 행동은 투박할지언정 정치적으로 훨씬 세련됐다. 선 감독은 웃으며 떠났고, 그를 배웅하는 KBO 관계자들은 미안함에 어쩔 줄 몰라 했다.
 
선동열 야구대표팀 감독이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웃으며 야구회관을 떠나는 모습. 선 감독을 배웅하는 KBO 관계자들의 표정이 더 침통하다. [연합뉴스]

선동열 야구대표팀 감독이 사퇴 기자회견을 마친 뒤 웃으며 야구회관을 떠나는 모습. 선 감독을 배웅하는 KBO 관계자들의 표정이 더 침통하다. [연합뉴스]

 
정 총장이 KBO리그의 모델로 삼는 메이저리그에서도 야구와 정치가 충돌한 사건이 얼마 전 있었다. TV로 월드시리즈를 보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트위터를 통해 데이브 로버츠 LA 다저스 감독의 투수기용을 비판한 것이다. '정치의 개입'이라 볼 수도 없는 해프닝에 가까운 장면이었다.
 
로버츠 감독은 "대통령이 야구에 관심을 갖는 건 좋은 일"이라며 유연하게 대처했다. 다저스 투수 리치 힐은 "야구보다 국정이나 신경 쓰라"고 독설을 날렸다. 몇 마디 말이 오갔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트럼프 대통령이 뭐라 하든 다저스 구단은 로버츠 감독과 장기 계약을 추진하고 있다.
 
이 사례에서 보듯 구성원의 역량과 노력에 따라 리그의 가치를 지키고, 또 키울 수 있다. KBO 총재의 책무는 리그 구성원 중 가장 무겁다. 특히 정치적으로.
 
야구팀장 see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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