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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만원짜리 위스키 책 질렀다, 덕후니까

중앙일보 2018.11.13 13:00
[더,오래]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8)
사달은 부산에서 시작됐다. 지난 6월 일본 후쿠오카에서 열린 위스키 축제가 끝나고, 일본 위스키 수입사 관계자들과 배로 부산엘 갔다. 점심엔 복국으로 해장하고, 전통 막걸리 만드는 곳에 견학도 다녀왔다. 저녁엔 남포동에 가 양곱창을 먹고, 부산의 밤을 마무리하러 찾아간 곳은 산복도로의 작은바 ‘모티’. 중후한 목소리를 가진 바텐더의 지도 아래 이런저런 위스키를 나누다 불쑥 책 이야기가 나왔다.
 
"김상, 엠마누엘 드론(Emmanuel Dron) 씨 책 샀어요?"

"아니요. 읽어보고 싶은데 너무 비싸서…."

"위스키 마니아라면 꼭 사야 하는 책이에요. 우리 회사에 한 권 남아있으니까 언제든지 주문해요."
 
부산 산복도로의 Bar 모티(Mottie). 위스키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대영]

부산 산복도로의 Bar 모티(Mottie). 위스키와 책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김대영]

 
19·20세기 위스키 집대성, 책 무게 6kg
난 이미 그 책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싱가포르에 있는 세계에서 가장 유명한 위스키 바 중 하나인 올드 얼라이언스의 공동 오너인 엠마누엘 드론. 위스키 수집가로도 유명한 그가 심혈을 기울여 19세기와 20세기 위스키를 정리했다는 바로 그 책. 위스키 마니아라면 구미가 당기는 책이라 구매하려고 보니 50만원이 넘었다. 50만원이면 살 수 있는 위스키가 떠올라 책을 사려는 마음이 사라지려는 순간 그 일본인이 말을 걸었다.
 
“김상이 언젠가 살 때까지 보관할 테니 말만 해요! 참고로 책 무게는 6kg이니까 캐리어를 하나 더 가져와야 할지도…”
 
884페이지, 2500장 이상의 사진, 35X28cm, 그리고 6kg [사진 엠마누엘 드론]

884페이지, 2500장 이상의 사진, 35X28cm, 그리고 6kg [사진 엠마누엘 드론]

 
초여름의 부산 산복도로의 맑은 밤공기, 여기에 적당한 취기가 더해지자 날 붙잡고 있던 이성이 집을 나가고 말았다.
 
“사죠, 뭐. 꼭 살 거니까 다른 사람한테 팔면 안 돼요.”
 
그렇게 넉 달이 지나 10월이 됐다. 마침 도쿄로 출장 갈 일이 생겼다. 한 번 내뱉은 말에 대한 신의를 지키려는 듯 장고 끝에 당분간 씀씀이를 줄이기로 하고 책을 주문했다.
 
호텔로 배송된 책, 'Collecting Scotch Whisky' 미국, 영국, 일본 등 15개국에서 판매 됐다. 덕분에 귀국길 캐리어는 20kg이 넘었다. [사진 김대영]

호텔로 배송된 책, 'Collecting Scotch Whisky' 미국, 영국, 일본 등 15개국에서 판매 됐다. 덕분에 귀국길 캐리어는 20kg이 넘었다. [사진 김대영]

 
호텔 로비에서 배달 온 책을 건네받는데, 호텔 직원도 무거워서 낑낑거렸다. 고작 호텔 로비에서 방까지 가는데도 무거워서 쩔쩔맸다. 책이 아니라 돌덩어리 하나를 들고 가는 느낌이었다. 침대 위에 책을 패대기치고 한숨 돌린 뒤 포장을 풀고 드디어 책과 만났다.
 
태어나서 읽어본 책 중에 가장 컸다. 남자 성인 손 8개 정도의 크기. [사진 김대영]

태어나서 읽어본 책 중에 가장 컸다. 남자 성인 손 8개 정도의 크기. [사진 김대영]

 
책은 총 15개의 파트로 되어 있다. 위스키를 병입할 때 날짜를 어떻게 기재하는지부터 시작해 19세기와 20세기 출시된 거의 모든 위스키 도감이 펼쳐진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가짜 위스키를 판별할 수 있는지, 세계 유명 위스키 수집가들의 컬렉션, 일본의 유명 바 소개 등이 담겨 있다. 책의 대부분은 컬러로 된 위스키병 사진인데, 실제 크기가 비슷하다. 그래서 못 마셔본 전설적인 위스키를 사진으로나마 대신 소유한 느낌이 들기도 했다.
 
전설적인 위스키 중 하나인 아드백 1885. 가짜 위스키인지 알려면 코르크를 확인하라. 코르크가 과하게 '숙성' 되어있다면 가짜를 의심할 것. [사진 엠마누엘 드론]

전설적인 위스키 중 하나인 아드백 1885. 가짜 위스키인지 알려면 코르크를 확인하라. 코르크가 과하게 '숙성' 되어있다면 가짜를 의심할 것. [사진 엠마누엘 드론]

 
위스키는 같은 증류소에서 만들더라도 시대에 따라 맛이 바뀐다. 그래서 위스키 회사들은 맛이 바뀔 때 라벨이나 병모양을 바꿈으로써 변화를 알리기도 한다. 하지만 위스키 증류소는 짧게는 10년도 안 돼 바뀐 라벨과 병모양을 친절하게 알려주지 않는다. 위스키 신상품을 팔아야 하는 증류소로선 위스키 팬이 옛날 위스키에 집착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이 증류소 대신 위스키의 역사를 대변하고, 간혹 만나는 20세기 위스키가 1970년대 것인지 1980년대 것인지 알려준다.
 
1980년대에 발매된 싱글몰트 위스키 롱몬 15년. 바텐더로부터 언제 출시된 위스키인지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는데, 책에서 같은 보틀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쁘던지. 왜 1980년대에 이런 디자인의 라벨이 만들어졌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위스키 마니아는 즐겁다. [사진 김대영]

1980년대에 발매된 싱글몰트 위스키 롱몬 15년. 바텐더로부터 언제 출시된 위스키인지 제대로 설명을 못 들었는데, 책에서 같은 보틀을 발견하고 얼마나 기쁘던지. 왜 1980년대에 이런 디자인의 라벨이 만들어졌을까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위스키 마니아는 즐겁다. [사진 김대영]

 
책을 넘기다 유명 위스키 수집가가 소개되는 파트에서 입이 떡 벌어졌다. 세계 각지, 총 16명의 수집가가 나오는데, 소장하고 있는 위스키들이 하나같이 보물 같은 것이었다. 그리고 양도 어마어마했다. 위스키를 즐기면서 꽤 위스키를 모았다고 생각했는데, 그들에 비하면 소꿉장난하는 수준이었다. 수집가의 집에 초대받아 위스키를 원 없이 구경해보고 싶다.
 
한 스위스인이 수집한 위스키 사진. 박물관이 따로 없다. [사진 엠마누엘 드론]

한 스위스인이 수집한 위스키 사진. 박물관이 따로 없다. [사진 엠마누엘 드론]

 
사진만으로도 설레는 위스키 덕후
위스키를 좋아하는 사람에게 확실한 행복을 주는 책이다. 엠마누엘 드론은 2000년 이후부터 현재까지 출시된 위스키를 담은 두 번째 책을 쓰고 있다. 그는 2000년 이후 위스키 업계에 커다란 진화가 있었다고 평했다. 많은 독립병입 위스키 회사가 생겨났고, 위스키 전문 웹사이트와 블로그가 탄생했으며, 위스키 축제와 위스키 경매도 활발해졌다.
 
지금 우리가 자주 접하는 위스키를 모은 책이라니 벌써 기대가 된다. 물론 그 책도 무겁고 비쌀 것이 뻔하다. 이번엔 취해도 함부로 사겠다고 말하지 않으리라. 지킬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위스키 덕후가 되어버리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사진 김대영]

위스키 덕후가 되어버리면 사진을 보는 것만으로도 설렌다. [사진 김대영]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매체팀 대리 kim.daeyoung1@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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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영 김대영 중앙일보 일본비즈팀 과장 필진

[김대영의 위스키 읽어주는 남자] 위스키 덕후이자 싱글몰트 위스키 블로거다. 위스키를 공부하기 위해 일본에서 살기도 했다. 위스키와 위스키 라벨에 담긴 다양한 이야기를 소재로 위스키에 대한 지식과 그로부터 얻을 수 있는 삶의 지혜 등을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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