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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나간 청와대 청원 … ‘여론재판장’ 변질

중앙일보 2018.11.13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강서구 PC방 살인범을 강력히 처벌해주세요.”  
 

상위 10개 중 6개가 엄벌 요구 내용
‘PC방 살인범 강력처벌’ 117만 1위

순기능 있지만 사법권 침해 소지
백악관처럼 제도 제안 등 국한을

지난달 17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올라온 글은 13일 현재 117만 명이 동의했다. 지난해 8월 게시판이 생긴 이래 최다 기록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 동의자 수가 많은 상위 10개 청원을 분석해보면 6개가 특정 범죄나 범죄자를 엄벌해달라는 내용이다. ▶조두순 출소 반대 및 무기징역(3위·61만명)▶어린이집 아동 학대 엄벌(6위·41만명)▶음주운전 엄벌(7위·40만명)▶미성년자 성폭행범 엄벌(9위·35만명)▶거제 살인 피의자 엄벌(10위·35만명) 등이다. 이밖에 김보름 스피드스케이팅선수의 국가대표 자격 박탈(4위·61만 명)과 나경원 의원의 평창올림픽 조직위원직 파면(8위·36만명) 등 특정 개인에 대한 징계를 요구하는 청원도 2개였다.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m@joongang.co.kr

그래픽=김경진 기자 capkm@joongang.co.kr

 
시행 15개월째를 맞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 대한 엇갈린 평가가 나오고 있다. 일단 국민이 정부와 직접 소통하고 토론할 수 있는 순기능에 주목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다.  
 
이명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는 “공공신뢰가 떨어지는 사회에서 사법기관에 기대지 않는 여론 장이 만들어졌다"며 "사법부와 수사기관이 이를 겸허히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신경아 한림대 사회학과 교수는 “전문가 의견으로 사회와 정치가 움직이는 시대는 지났다”며 “국민이 이런 문제에 관심 있는데 ‘당신들은 뭐하냐’고 알리는 순기능이 있다”고 진단했다. 실제로 청원이 입법으로 이어지고 있는 경우도 있다. 지난 9월 군 복무 중 휴가를 나왔던 윤창호씨가 만취 운전자의 차에 치여 뇌사 상태에 빠진 후 윤씨 친구들은 청원을 냈다. 이후 문재인 대통령이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처벌 강화를 지시했고, 지난달 21일 국회에서 음주운전 처벌을 강화하는 법안이 발의됐다.  
청와대 공식 답변 기준인 20만명의 동의를 받아 '답변 대기'상태가 된 청원들. 대부분은 특정 범죄자를 규탄하는 내용이다. [청와대 게시판 캡쳐]

청와대 공식 답변 기준인 20만명의 동의를 받아 '답변 대기'상태가 된 청원들. 대부분은 특정 범죄자를 규탄하는 내용이다. [청와대 게시판 캡쳐]

 
그러나 청원의 순기능만 봐서는 안 된다는 의견도 만만찮다. 윤해성 한국형사정책연구원 부패·경제범죄연구실장은 “강력범죄에 대한 처벌 수위를 높이고 공소시효도 늘려왔지만 범죄 통계에 유의미한 감소세가 없다”며 “교화 대책이 없는 처벌 만능주의는 해결책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청와대 게시판이 삼권분립의 원칙을 침해하며 만기친람(萬機親覽)식 국정 운영으로 이어진다는 비판도 있다. 구정우 성균관대 사회학과 교수는 “권력이 분산된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청와대가 할 수 있는 영역과 그렇지 않은 영역을 구분하는 것이 당연하다”며 “모든 민원이 전부 청와대로 몰리는 것은 제왕적 대통령제의 모습”이라고 지적했다.  
 
실제로 답변 요건(20만명 이상 동의)을 갖춘 경우라도 처벌은 청와대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이 때문에 "청와대는 개별 사건에 대한 수사지휘를 하지 않는다", "법 개정을 위해 국회와 협력하겠다"와 같은 원론적인 답변만 내놓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난 2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조두순 사건 피해 가족을 우롱하는 만화가 윤서인을 처벌해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만화가 윤서인씨가 조두순 사건을 남북관계에 빗대 풍자하는 만화를 그린 것이 발단이었다. 이 청원은 24만명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공식 답변이 됐지만 청와대는 "개별 사건에 대해 수사 지휘를 하지 않는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영상은 윤씨 처벌 요구에 대한 청와대 답변.

지난 2월 청와대 청원 게시판에는 "조두순 사건 피해 가족을 우롱하는 만화가 윤서인을 처벌해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글이 올라왔다. 만화가 윤서인씨가 조두순 사건을 남북관계에 빗대 풍자하는 만화를 그린 것이 발단이었다. 이 청원은 24만명의 동의를 얻어 청와대 공식 답변이 됐지만 청와대는 "개별 사건에 대해 수사 지휘를 하지 않는다"며 원론적인 답변을 내놨다. 영상은 윤씨 처벌 요구에 대한 청와대 답변.

 
청와대 청원게시판에는 황당한 청원도 적지 않다. 지난 5월 청와대 게시판에는 유튜버 양예원(24)씨를 상대로 비밀 촬영을 한 스튜디오의 이름을 ‘합정 원스픽처’라고 특정한 폭로성 청원이 올라왔다. 한 달여 이후 원스픽처가 게시자 등을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낸 후에야 해당 스튜디오가 비밀촬영과 무관하다는 점이 밝혀졌다. 이 과정에서 배우 수지가 이 청원에 참여한 사실을 비난하며 ‘수지 사형’을 촉구하는 청원글까지 올라오기도 했다. 연예인 이광수도 예능 프로그램에서 다른 출연자를 '꽃뱀'이라고 지칭했다는 이유로 사형 청원 대상이 됐다.
 
그 외에도 미북 정상회담이 진전되지 않자 "트럼프를 탄핵하자", 축구선수 모하메드 살라를 다치게 했다는 이유로 "레알 마드리드의 세르히오 라모스를 형사처벌해달라", 법무부가 낙태죄 합헌 의견을 내며 "무책임하게 성교하고 책임지지 않는 여성"이라는 표현을 썼다는 이유로, "박상기 법무부 장관의 거세를 청원합니다" 등 터무니없는 청원글이 올라왔다.
 
특정 집단을 향한 혐오 발언이 담긴 글도 황당한 청원의 단골 사례다. '기독교 금지법을 제정해주세요' 같은 특정 종교인을 맹목적으로 비난하는 청원부터 '페미니스트 활동법으로 금지해주세요''모든 여성 정책 없애주세요''조선족 추방' 등 혐오성 짙은 의견이 청원을 가장한 글도 잇따라 올라왔다.  
 
미국 백악관에서 운영하는 청원 게시판인 위더피플(WE THE PEOPLE)의 청원 1단계 화면.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청원을 받고 그 외 이슈는 '국회에 호소' 항목으로 분류한다. [사진 위더피플]

미국 백악관에서 운영하는 청원 게시판인 위더피플(WE THE PEOPLE)의 청원 1단계 화면.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청원을 받고 그 외 이슈는 '국회에 호소' 항목으로 분류한다. [사진 위더피플]

전문가들은 평가를 떠나 청와대 게시판의 역할이 보다 명확해져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지난 6일 서울대 행정대학원이 개최한 ‘국민청원, 현황과 과제’ 포럼에서는 청원 게시판에 여론몰이·갈등조장 글 등이 여과 없이 올라오고 삭제 기준도 불투명하다는 점이 지적됐다. 정동재 한국행정연구원 사회통합연구실 부연구위원은 “1년 동안 7만5000여 건을 청와대가 삭제했다. 하지만 욕설·비속어 글이라는 기준 외에는 명확한 삭제 기준이 없어 일부 청원자들이 불신을 표출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한 명이 트위터 등 SNS 계정을 여러개 생성해 추천수를 조작할 수 있다는 문제점도 거론됐다. 실제로 올해 초 카카오톡 계정 설정을 통해 한 개 ID로 계속 ‘동의’ 버튼을 누를 수 있다는 우회 기법이 알려지자 청와대는 카카오톡 ID 접근을 차단했다. 정 부연구위원은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대한 긍정적인 여론이 많지만 단순 여론 수렴 창구인지, 권리구제 수단인지 권한과 역할을 명확히 규정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청와대가 벤치마킹한 미국 백악관의 시민 청원 사이트 '위더피플(Wethepeople)'은 청원 첫 단계에서 ▶특정 이슈에 대한 행정부의 입장 발표 촉구▶행정 제도 변경 제안▶새로운 행정 제도 제안 등으로 행정부가 할 수 있는 일에 대해서만 청원을 받는 점을 명시하고 있다. 그 외 이슈에 대해서는 '국회에 호소(call on congress)'로 분류한다.  
 
이현우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한국의 정당 정치가 개인의 삶과 분리돼 있고 법적 구제 장치는 어렵게 느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청원 게시판의 순기능이 있다"면서도 "부작용이나 문제점에 대해선 개선책을 논의해야 할 때"라고 말했다.  
 
홍지유·조한대 기자 hong.jiyu@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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