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남기고 싶은 이야기] 물자지원 대신 인재육성 나선 미국 … 박정희에게 ‘과학대학원’ 제안

중앙일보 2018.11.13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뉴욕 공대에서 교수로 일하던 1969년 1월 뉴욕타임스(NYT)에서 접한 운명의 뉴스는 존 해너(1902~91년) 미시간주립대 총장이 미국 국제개발처(USAID) 처장을 맡았다는 내용이었다. 내게 유학 기회를 줬고 멘토로서 보살폈던 그분이다. 69년 1월 취임한 공화당의 리처드 닉슨(13~94년, 재임 69~74년) 대통령이 그에게 이 자리를 맡겼다. 군사를 제외한 대외원조를 총괄하는 이 연방정부 조직은 당시엔 대통령 직속 기관이었다. 
존 해너 미국 국제교류처장. 미시간 주립대 총장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 미시간주립대]

존 해너 미국 국제교류처장. 미시간 주립대 총장 시절의 모습이다. [사진 미시간주립대]

NYT는 해너 처장이 취임사에서 “후진국(나중에 개발도상국으로 순화)에 물고기를 주는 대신 낚시 방법을 가르치겠다(Instead of giving fish, we will teach them how to fish)”라고 말했다고 보도했다. 대외 원조정책의 방향이 ‘물자 지원’에서 ‘인재 육성’으로 바뀐다는 의미다. 

정근모, 과학기술이 밥이다 - 제131화(7582)
<34> 과학기술 특수대학원 준비
은사 해너 총장, 국제개발처장으로
미국 대외원조 정책 전환 의사 밝혀
물자 지원에서 인재 양성으로 바꿔
하버드 때 쓴 '두뇌 유출 방지' 논문
해너 처장에 넘겼더니 사업계획서로
한국에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 추진
70년 3월 귀국 당정협의회에서 설명
박 대통령과 정관계 인사 모인 자리


기사를 읽는 순간 하버드대 과학기술 정책과정에 다니면서 썼던 ‘후진국에서의 두뇌 유출을 막는 정책 수단’이라는 논문이 떠올랐다. 미국에 유학한 각국의 과학기술 인재들이 귀국해 조국 발전에 기여할 방법을 고민한 논문이었다. 핵심은 미국 원조기금으로 각국에 과학기술 연구·교육 기관을 세우면 두뇌 유출을 막는 것은 물론 과학기술 발전도 도모할 수 있다. 이들이 양성한 인력을 산업 발전에도 활용할 수 있다. 물자에서 인재로 무게 중심을 바꾼 미국 원조를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활용할 방법은 없어 보였다. 뉴욕 대학에서 한국인 제자를 가르치면서도 이런 생각을 많이 하던 터였다.  
1968년 미국의 인종 평등 정책을 담당하는 공민권 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존 해너 박사(왼쪽)가 위원 중 한 명인 조지 매리언 존슨 교수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 미시간주립대]

1968년 미국의 인종 평등 정책을 담당하는 공민권 위원회 위원장 시절의 존 해너 박사(왼쪽)가 위원 중 한 명인 조지 매리언 존슨 교수와 대화하는 모습. [사진 미시간주립대]

나는 이 논문을 찾아 들고 워싱턴의 USAID 처장실을 찾았다. 오랜만에 옛 제자를 만나 반가워하던 해너 박사는 이 논문을 보고 무척 만족해했다. 그는 “논문을 USAID 사업을 위한 사업계획서로 고쳐 써서 달라”라고 부탁했다. 그래서 논문을 바탕으로 ‘한국에 응용과학 및 공학 전문대학원을 설립하는 안건’이란 사업 제안서를 만들어 USAID에 넘겼다. 해너 처장은 한국의 박정희 대통령에게 새로운 이공계 특수대학원 설립을 권고하는 편지와 함께 이 제안서를 보냈다. 
당시 주한 USAID의 존 휴스턴 단장은 해너 처장의 지시를 받고 김학렬(1923~72년) 경제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을 만났다. 그는 영문 60쪽 분량의 ‘과학기술 특수 대학원 설립 제안서’를 전달하고 한국이 사업 추진을 결정하면 USAID가 적극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다. 
1970년 9월 방한해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오른쪽)과 환담하는 존 해너 미국국제개발처장. [중앙포토]

1970년 9월 방한해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오른쪽)과 환담하는 존 해너 미국국제개발처장. [중앙포토]

70년 3월 나는 김기형 초대 과학기술처 장관의 초청으로 일시 귀국했다. 귀국의 기쁨도 잠시, 제안서와 관련해 당정 협의회에 보고할 브리핑 자료를 당장 만들어야 했다. 경제기획원 대회의실에서 열린 회의에는 박정희 대통령과 윤치영 공화당 의장, 백남억 공화당 정책의장, 길전식 공화당 사무총장 등 쟁쟁한 정치인이 참석했다. 김학렬 부총리, 남덕우 재무장관, 홍종철 문교부 장관, 김기형 과기처 장관 등 경제 부처 수장들도 함께했다. 이제 주사위는 던져졌고 나는 루비콘 강을 건넜다. 
존 해너 박사(왼쪽)가 미시간주립대 총장 시절인 1957년 5월 캠퍼스를 찾은 응오딘지엠 당시 베트남 대통령(가운데)을 만나고 있다. [사진 미시간주립대]

존 해너 박사(왼쪽)가 미시간주립대 총장 시절인 1957년 5월 캠퍼스를 찾은 응오딘지엠 당시 베트남 대통령(가운데)을 만나고 있다. [사진 미시간주립대]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황수연 기자 ciimccp@joongang.co.kr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