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서소문 포럼] 나는 고발한다

중앙일보 2018.11.13 00:51 종합 27면 지면보기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강주안 중앙일보 사회에디터

20여 년 전 지방 근무할 때의 일이다. 한 경찰서로 갓 전입한 전투경찰과 의무경찰이 잇따라 자살하는 일이 벌어졌다. 이유를 추궁하는 기자들에게 내놓은 경찰 고위 간부의 답은 말을 잃게 했다.
 

“힘든 일이라 가족들 채용 … 수험표 사진 보낸 건 맞선용”
취업준비생 울리는 궤변, 내부고발자들이 진실 밝혀주길

“대원들이 훈련소에서 고된 생활을 하다가 경찰서에 배치돼 환대를 받으니 적응이 안 된 것 같다.”
 
오래전 분노의 기억이 되살아난 건 요즘 가족 채용 의혹이 불거질 때마다 공공기관과 공기업이 쏟아내는 궤변을 접하면서다. 해명 하나를 들으면 의문 두 개가 생긴다. “남들이 꺼리는 업무라 직원의 가족들이 떠맡아서 하다 보니 어쩌다 정규직이 됐다”는 설명이 대표적이다. 환경미화원이나 조리원, 창구 직원이 선망의 직업은 아닐지 모른다. 그러나 정년이 보장되고 복지 혜택이 두둑한 공공기관 정직원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얼마 전 강원도 강릉시에서 환경미화원을 모집했을 때 경쟁률이 23대 1이었다. 30㎏짜리 모래주머니를 업고 사력을 다해 달리는 미화원 선발 시험 풍경은 익숙하다. 인기 직종으로 떠오른 셰프야 말해 뭣하랴.
 
“거친 사람들을 상대하는 고된 일자리”라고 반박하는 한국마사회 현장 근무는 시급이 높아 청년들 사이에서 ‘꿈의 아르바이트’였다고 한다. 이런 일자리에 직원 가족들이 우르르 들어간 뒤 정규직으로 변신한 사실을 접한 취업준비생들이 울분을 토하는 게 이상한 일인가.
 
의혹을 촉발한 서울교통공사(교통공사)와 서울시의 대응이 압권이다. 새로운 의혹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도 적반하장 식으로 야당을 협박하고 일부 보수 언론만의 문제 제기로 몰고 간다. 중앙일보가 10월 16일 처음으로 교통공사의 가족 채용 의혹을 보도한 이후 가장 발 빠르게 비판에 동참한 언론은 KBS와 MBC다.
 
‘서울교통공사 신규 정규직 전환자 가운데 10% 가까이가 직원의 친·인척이라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의혹을 사기에 충분하다.’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일러스트=김회룡 aseokim@joongang.co.kr]

‘이런 곳(교통공사)에서 임직원의 아들딸, 형제, 남매, 배우자, 며느리, 형수 등 친인척이 무더기로 채용되고 정규직화했다는 사실 자체에 사람들은 분노와 박탈감을 느낄 수밖에 없다.’
 
앞의 글은 경향신문 사설이고 후자는 한겨레 사설이다. 서울시와 교통공사가 보수 신문만 구독하는 것일까. 서울시는 이 사태를 ‘태산명동서일필(泰山鳴動鼠一匹)’이라고 일찌감치 규정했다. 윤준병 행정1부시장은 ‘태산이 떠나갈 듯이 요동하게 하더니 뛰어나온 것은 쥐 한 마리뿐’이라는 설명과 함께 쥐 한 마리가 일부 정치권과 언론이라고 주석을 달았다. 감사원 감사가 굴러가기도 전에 결론부터 못박은 이유가 뭘까. 차기 대선주자로 꼽히는 박원순 시장의 서울시가 감사원에게 통보한 가이드라인일 수 있다. 서울시의 의도가 무엇이든 정권의 부침을 체감해온 감사원 직원들로선 쥐 한 마리 이상 잡아내기가 부담스러울 것이다. 서울시와 교통공사 임직원들은 함구령으로 간주할 가능성이 크다.
 
고위직 인사가 채용 면접을 나흘 앞두고 아들의 수험표와 사진을 간부 카톡방에 띄웠던 사실이 폭로되자 김태호 사장 등 교통공사 측이 보인 반응도 의아하다. 동생에게 맞선용으로 보내려다 실수로 간부들 방에 올린 것이라고 감싼다. 환하게 보정한 얼굴, 화목한 가족사진이 아니라 붙을지 떨어질지 모르는 회사의 수험표를 맞선용으로 내미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가. 오히려 며칠 뒤 면접장에서 마주할 아들 얼굴을 기억해 달라고 실수를 가장해 올렸을 개연성이 크지 않을까.
 
인사처장이 정규직 전환자 명단에서 자신의 부인을 빼고 다른 사람 이름으로 조작해 국회에 제출한 일, 99.8%가 응답했다는 가족 현황 조사에서 언니와 동생과 제부가 아무도 신고하지 않은 사실 정도는 대수롭지 않다는 식의 태도도 당혹스럽다. 당시 가족 파악 공문에는 ‘고의적 미제출 또는 허위기재 시 업무지시 불이행으로 간주’라는 경고까지 적혀있다. 
 
서울교통공사가 가족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배포한 공문.

서울교통공사가 가족 현황을 조사하기 위해 배포한 공문.

이런 의문이 한두 개가 아니다.
 
20여 년 전 자살한 전·의경의 억울함은 풀어줄 수 없었다. 진실을 증언해줄 당사자들이 세상을 떠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족 채용 의혹은 당국이 의지만 있다면 규명이 가능하다. 많은 내부고발자들이 진실을 말할 준비가 돼 있다.
 
진실을 위해 투쟁한 인물로 프랑스 작가 에밀 졸라를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유대인이라는 이유로 누명을 쓰고 종신형을 살게된 장교 드레퓌스를 위해 로로르라는 잡지에 ‘나는 고발한다(J’Accuse…!)’라는 글을 써 프랑스 사회를 흔들었다. 권부를 향한 그의 일갈은 오늘 우리에게도 울림을 준다.
 
“진실이 지하에 묻히면 자라납니다. 그리고 무서운 폭발력을 축적합니다. 이것이 폭발하는 날에는 세상 모든 것을 휩쓸어 버릴 것입니다.”
 
공기업 가족 채용의 진실도 그렇다. 적당히 묻으려 한다면 훗날 청년들의 분노가 무섭게 폭발할 것이다. 
 
약 20년 전 시민운동가였던 박원순 시장은 에밀 졸라의 집념을 『내 목은 매우 짧으니 조심해서 자르게』라는 책에 담아냈다. 채용비리 의혹을 적당히 덮고 넘어가려는 공기업 간부들에게 이 책의 일독을 권한다.
 
강주안 사회에디터
관련기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