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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 잃는 즐거움을 알게 해준 슬로베니아 시골 마을

중앙일보 2018.11.12 11:00
[더,오래]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3)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 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 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 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편집자>
 
"이쯤에서 길을 잃어야겠다." 한 선배의 카톡 프로필 문구다. 말이 멋있어 의미 해석은 생략했다. 스마트폰 쳐다보다 한 정거장만 지나쳐도 짜증이 밀려오는 시대에 길 잃는 묘미라니!
 
한 달간의 유럽여행 중, 크로아티아 자그레브에서 차를 빌려 슬로베니아의 수도 류블랴나로 가던 날이었다. 20여년 전에 독립한 슬로베니아도 낯선 마당에 류블랴나는 더 낯설다. 사람들 말로는 작지만 사랑스러운 도시라 했다.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일반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것은 여행의 느낌을 고조시키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사진 박헌정]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일반 도로를 천천히 달리는 것은 여행의 느낌을 고조시키기에 아주 좋은 방법이다. [사진 박헌정]

 
구글맵에 목적지 숙소(아파트를 빌렸다) 주소를 입력하고 고속도로를 달려 슬로베니아 국경에 들어섰다. 휴게소 노천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때까지는 참 좋았다. 다시 출발, 그런데 도로 표지판에는 류블랴나가 60km 남았는데 구글맵은 120km 남았다고 알려주며 고속도로를 빠져나와 북쪽으로 가라고 한다. 그렇지, 일반도로로 천천히 가며 정취를 느껴봐도 좋겠다. 그게 여행이지!
 
이때부터 줄곧 왕복 2차로다. 한 시간 넘게 가도록 2차로는 계속되고 심지어 좌우로 숲이 더 울창해진다. 때때로 시퍼런 강물과 나란히 달리는 정겨운 길. 과한 흥분은 맹신을 낳는다. “어? 드라바강? 시내에 류블랴니차강이 흐른다고 들었는데 같은 건가 보네?” 백마강이 금강인 것처럼 말이다. 네비게이션은 목적지가 5km 남았다고 알려주는데도 도시 흔적이 없다가 3km 남은 지점에서야 집이며 창고가 간간이 보인다.
 
잠시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네비게이션의 안내가 나온다. 숙소에서 다운타운 관광지까지 1km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시내가 어디란 말인가? [사진 박헌정]

잠시후 목적지에 도착한다는 네비게이션의 안내가 나온다. 숙소에서 다운타운 관광지까지 1km라고 들었는데 도대체 시내가 어디란 말인가? [사진 박헌정]

 
“정말 작은 도시인가 봐. 이게 수도야? 사람 사는 세상이 정말 다르구나. 적정개발! 우리도 이렇게 좀 살아야 하는데...” 이런 이야기를 나누며 드디어 들어섰다. 이건 숫제 도시가 아니라 마을이다. 주소대로 차를 주차하고 짐을 내린 후 호스트에게 연락하니 아들이 곧 찾아가 안내할 테니 정문에서 기다리란다. 그늘에 벤치가 있었다. ‘이렇게 자상할 수가!’.
 
주민들이 집 앞을 오가며 힐끔거린다. 지루함도 달랠 겸 구글맵을 켜고 왔던 길을 확대해 봤다. 어? 현 위치가 류블랴나가 아니라 오스트리아 국경에 있는, Radlje ob Dravi라는 작은 마을이다. 주소는 똑같은데 뒤에 Ljublanja란 도시명이 있는 것과 없는 것, 나는 없는 것을 찍고 온 것이다. 이럴 수가! 부랴부랴 전화해서 버벅거리며 상황을 설명했다.
 
Dronvo82 지점에서 계속 직진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일반 도로로 나와 북쪽으로 올라갔다. 시골마을 Radlje ob Dravi은 거의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해 있다. [사진 구글지도 캡쳐]

Dronvo82 지점에서 계속 직진했으면 되었을 것을 괜히 일반 도로로 나와 북쪽으로 올라갔다. 시골마을 Radlje ob Dravi은 거의 오스트리아 국경에 인접해 있다. [사진 구글지도 캡쳐]

 
“분홍색 건물 맞나요?”, “맞아요, 분홍색. 아들이 갈 겁니다.”, “네, 알겠습니다.” 그럼 맞을 텐데? 그런데 불안하다. 저쪽에서도 내 목소리가 심상찮은지 다시 전화가 왔다.
“주변에 뭐가 보여요?”, “왼쪽에 작은 산이 있고...”, “산? 그리고요?”, “오른쪽에는 강이 있고...”, “No!!! 도시 한복판 주택가에 무슨 산이나 강이 있어요?”
 
허둥지둥 차에 올랐다. 두 시간을 가야 한다. 자그레브에서 올 때와 달리 류블랴나로 가는 좁은 도로는 고개와 계곡을 번갈아 통과한다. 골짜기 계곡마다 평상 놓고 닭백숙과 도토리묵을 팔면 좋을 것 같은 비경이 끝없이 이어진다. 근사하던 2차로는 중앙선이 없어지더니 급기야 포장만 겨우 된 농로가 되고 트랙터 모는 할아버지는 급히 길을 비켜준다. 다급한 내 마음은 숲을 집어삼킬 기세로 씩씩대며 가속기를 밟는다.
 
마을에서 다시 나가는 길. 이제야 간간히 보이던 트랙터들이 이해된다. 기왕에 이런 시골까지 깊숙히 들어왔으니 아무 집에나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룻밤 숙박을 부탁해 봤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진 박헌정]

마을에서 다시 나가는 길. 이제야 간간히 보이던 트랙터들이 이해된다. 기왕에 이런 시골까지 깊숙히 들어왔으니 아무 집에나 가서 사정을 이야기하고 하룻밤 숙박을 부탁해 봤으면 어땠을까 싶다. [사진 박헌정]

 
그러다가 생각했다. 내가 지금 일하러 가는 건가? 신고받고 출동 중인가? 일상의 무료함 속에 허비하던 수많은 시간들은 어쩌고 진작에 상상 속에서나 그려봤음직 한 한가로운 유럽의 시골 정취를 받아들이지도 못한 채 겨우 두어 시간, 그것도 이런 아름다운 숲길을 지나며 이렇게 부아났을까. 나는 왜 길이라도 잃은 듯 허둥댈까. 이건 행운이다. 선물이다. 이들 방식대로 일상이 진행되는 이 작은 마을에 언제 다시 아무 목적 없이 찾아오겠는가.
 
회사를 자신 있게 그만둔 후 계속 나를 흔든 것은 길을 잃을까 하는 조바심이었다. 지인들은 걱정해주듯 "뭐라도 해야지?"하며 불안감을 자극했다. 내 모습을 통해 길 잃은 자신의 모습이 연상되었으리라. 그렇게 퇴직한 지 2년이 지나서야 조금씩 알게 되었다. 애당초 길 같은 건 존재하지 않은, 낙엽 덮인 숲속이었다는 것을. 어디로 가든 발밑만 조심하며 자유롭게 가면 된다는 것을.
 
슬로베니아는 EU 가입국으로 발칸반도나 舊유고슬라비아연방 가운데 가장 선진국이다. 그런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가 이렇게 한적한 2차로라면 진작에 의심을 했어야 한다. [사진 박헌정]

슬로베니아는 EU 가입국으로 발칸반도나 舊유고슬라비아연방 가운데 가장 선진국이다. 그런 나라의 수도로 들어가는 주요 도로가 이렇게 한적한 2차로라면 진작에 의심을 했어야 한다. [사진 박헌정]

 
많은 사람이 퇴직 이후를 불안해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직장 스트레스 없는 자유의 삶을 부러워한다. 그렇게 무릉도원을 꿈 꾼들 뭐하겠나. 막상 들어오면 좋은 줄도 모르고 세상의 습관대로 쩔쩔매고 끙끙 앓다 끝난다면. 나는 지금까지 길을 너무 열심히 찾아다녔다. 길로만 다니려다 보니 극심한 경쟁을 치렀고 결국 죽지 않고 여기까지 왔다. 고맙다기보다 다행스러운 일이다. 그런데 이제는 걱정 않고 아무 데로나 좀 헤매보고 싶다.
 
나는 마을의 아름다운 풍경을 남기지 못했다. 앞으로 며칠 묵어갈 일상의 장소가 될 테니 사진 찍을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이다. 어쩌면 그게 궁극적인 평온의 상태 아닐까. 앞으로의 삶은 가시적인 것을 만들어 보여주고 평가받던 지금까지 삶처럼 뭔가를 남겨야겠다는 압박감으로 살지 않으련다. 겨우 사진? 까짓것, 몸으로 느끼자. 달뜨거나 예민하지 않은 무덤덤한 일상으로 말이다.
 
그나저나 마을 사람들이 나중에 집주인한테 "동양인 두 명이 너희 집 찾아왔었어." 말해주면 영문도 모른 채 얼마나 궁금해할까. 귀여운 민폐 정도로 봐주시길. 참, 잘못 찾아간 집도, 제대로 찾아간 집도 전부 그 마을 유일의 분홍색 건물이었다.
 
박헌정 수필가 portugal4@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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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헌정 박헌정 수필가 필진

[박헌정의 원초적 놀기 본능] 25년간의 회사생활을 정리하고 50세에 명퇴금 챙겨 조기 은퇴해서 책 읽고, 글 쓰고, 여행하는 건달이자 선비의 삶을 현실화했다. 은퇴 후 도시에 뿌리 박혀버린 중년의 반복적이고 무기력한 삶에 저항하기로 했다. 20대는 돈이 없어 못하고, 30-40대는 시간이 없어 못하고, 60대는 힘과 정보가 없어 못하던 일들, 꿈만 같지만 결코 꿈이 아닌 현실이 되어야 할 일들, 50대의 전성기인 그가 그 실험에 도전하고 그 과정과 결과를 인생 환승을 앞둔 선후배들과 공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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