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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인택 중앙일보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100년 전 강대국 중심의 1차대전 종전, 동아시아 100년 갈등 불렀다

중앙일보 2018.11.12 01:45
11월 11일로 100주년을 맞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은 한국은 물론 동아시아와는 별 인연이 없는 사건으로 취급당하기 일쑤다. 정부는커녕 학계에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다. 하지만 글로벌 시대에 이뤄진 1차대전 종전은 한국을 비롯한 전 세계와 관련이 있을 수밖에 없다. 
 

[1차대전의 기억 여행] 시리즈 3회
유럽 100년 갈등 풀고 화해로
한중일 동아시아 끝없이 갈등
1차대전 종전 뒤 파리강화회담
민족자결주의 약소민족에 희망
실제론 강대국 중심으로 진행
대힌민국 임정 설립 계기 돼도
독립청원서 김규식 문전박대
산둥반도 독일 식민지 일본으로
중국 항일운동 민족주의 자극해
동아시아 100년 갈등 뿌리로
베트남 호찌민 회담장 접근 못해
국력 기르는 게 민족생존법 자각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불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센 강변의 러시아 원정대 추념비에 헌화한 뒤 현지 주민들과 당시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행사 참석을 위해 프랑스 파리를 방문한 불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센 강변의 러시아 원정대 추념비에 헌화한 뒤 현지 주민들과 당시 사진을 보며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러시아의 푸틴 대통령이 파리에 온 까닭은  
11일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에 러시아의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참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사실 러시아는 1차대전 초기에 연합국으로 참전했으나 1917년 러시아 10월혁명으로 종전 을 맞은 1918년 11월 11일에는 이미 전쟁에서 이탈한 상태였다. 그런 러시아의 국가원수가 1차대전 개전 100주년 행사라면 모를까 종전 100주년에 참석한 것은 아무래도 어색하다. 그런데도 푸틴은 자리를 함께했다. 국익과 외교를 위해서만은 아닐 것이다. 1차대전 종전은 전 세계에 국제질서에 대한 자각과 도전을 동시에 가져온 거대한 사건이기 때문에 결코 몇몇 참전국만 관심을 가질 일이 아니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캐나다 등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의 국가원수나 정부수반들이 11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앞에서 열린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전쟁에서 당시 싸웠던 연합국과 동맹군의 구분 없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EPA=연합뉴스]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캐나다 등 제1차 세계대전 참전국의 국가원수나 정부수반들이 11일 프랑스 파리의 개선문 앞에서 열린 종전 100주년 기념행사에 참석하고 있다. 전쟁에서 당시 싸웠던 연합국과 동맹군의 구분 없이 모두 한자리에 모였다. [EPA=연합뉴스]

 
1차대전 종전은 한국 독립운동 기폭제
1차대전 종전 당시 한국은 주권 상실 상태였기 때문에 1차대전에서 아무런 역할도 할 수가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1차대전은 아시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특히 한국의 독립운동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1918년 11월 11일 11시를 기해 1차대전이 종전됨에 따라 이듬해 1월 18일 개회한 파리강화회의는 아시아 각국에 민족주의적인 각성을 불러온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당시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1856~1924년, 재임 1913~21년)이 제창한 민족자결주의는 제국주의에 침탈당한 아시아·아프리카 각 민족의 자각을 이끌었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11일 파리 개선문 앞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무명용사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11일 파리 개선문 앞에서 열린 제1차 세계대전 종전 100주년 기념 행사에서 무명용사 묘지에 헌화하고 있다. [타스=연합뉴스]

 

조선에선 독립 선언하며 3·1운동 
특히 한국에서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과 함께 전국에서 봉기한 독립 만세운동인 3·1운동이 벌어지는 기폭제가 됐다. 한민족은 일찍이 국제사회의 흐름을 신속하게 접하고 민족자결주의에 가장 적극적으로 호응하면서 행동에 옮긴 깨인 민족이었다. 윌슨은 대통령이 되기 전인  1902~1910년 프린스턴대 총장을 지냈다. 그 기간 중 이 대학에서 한국의 독립운동가 김규식 선생(1881~1950년)이 1904년 영문학 석사를, 나중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대한민국의 초대대통령이 각각 된 이승만(1875~1965년)이 1910년 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이 과정에서 윌슨이 상당한 배려를 한 것으로 알려졌다.  
 
1차대전 종전 뒤 열린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해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려고 한 김규식 선생.[위키피디아]

1차대전 종전 뒤 열린 파리강화회담에 참석해 독립 청원서를 전달하려고 한 김규식 선생.[위키피디아]

김규식 선생, 파리강화회담장에서 문전박대 
김규식 선생은 조선인 청년 독립운동 단체인 신한청년당 대표 자격으로 강대국에 독립청원서를 제출할 목적으로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했다. 신한청년당은 1918년 8월 중국 상하이(上海)에서 창당했는데, 당원들이 여비를 모금해 전달하면서 김규식 선생의 파리 행을 가능하게 했다. 김 선생은 1919년 1월 18일 파리강화회의가 개회된 지 13일 만인 2월 1일 선박편으로 상하이에서 출발해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했다. 1919년 4월 11일 상하이에서 설립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파리강화회의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전보로 보냈다. 독립운동 단체의 성원을 한몸에 받은 김 선생은 독립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 회의장에 전달하려고 했지만, 문전박대를 당했다. 하지만 1차대전 종전에 따른 파리강화회의를 계기로 한국의 독립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됐으며 강대국과의 외교와 함께 무장투쟁 등 다양한 방법이 논의되고 실천되기에 이르렀다. 1차대전 종전에 따른 파리강화회의는 한국 독립운동 강화의 증폭제라고 할 수 있다.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파리위원부에서 김규식 선생이 발행한 리뷰 '라 코레 리브레(해방된 한국)'의 표지. [위키피디아]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외교대표부인 파리위원부에서 김규식 선생이 발행한 리뷰 '라 코레 리브레(해방된 한국)'의 표지. [위키피디아]

 
승전국 일본 기고만장해 중국 침략 노골화 
1차대전을 최종 마무리하기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는 동아시아 전체에 영향을 미쳤다. 중국의 항일운동과 중화 민족주의의 탄생에도 한몫했다는 평가를 받는다. 발단은 일본의 중국 침략 야욕이었다. 영국의 동맹국으로서 연합군 측에 참전한 일본은 중국 산둥(山東)반도의 옛 독일 식민지인 칭다오(자오저우만 조차지)를 공격했다. 일본은 1914년 8월 23일 독일에 선전포고한 뒤 10월 31일 칭다오를 공격했다. 전투는 11월 7일 끝났다. 1차대전 중 유일하게 동아시아에서 벌어진 전투다.  
문제는 일본이 1차대전이 끝난 뒤 칭다오를 같은 승전국인 중국에 돌려주는 대신 자국이 차지하려고 획책했다는 점이다. 일본은 이미 1차대전이 한창이던 1915년 중국에 남만주와 내몽골을 조차지로 내달라고 하는 등 21개 조의 특혜를 요구해 중국민의 반발을 샀다. 일본은 전후 산둥반도의 옛 독일 식민지를 내달라고 요구하면서 제국주의의 마각을 드러냈다.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베이징 대학생들이 반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국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5.4 운동이다.[위키피디아]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베이징 대학생들이 반일 시위를 벌이고 있다. 중국 항일운동의 시발점이 된 5.4 운동이다.[위키피디아]

 
중국선 5·4운동으로 항일 운동 시발    
전후 열린 파리 강화회의에서 윌슨이 민족자결주의를 주장한 미국을 제외한 영국·프랑스 등 강대국들은 일본 손을 들었다. 중국도 연합군의 일원으로 승전국이었지만 소용없었다. 국력이 곧 발언권이 되는 냉혹한 국제정치의 현장이다. 1918년 4월 30일 전보를 통해 이 소식을 들은 중국인들은 5월 4일 베이징대 학생을 중심으로 대규모 시위를 벌였으며 일제 야욕에 항거했다. 5·4운동으로 불리는 이 시위는 중국 항일 운동의 시발이라고 할 수 있다.  
한때 쑨원(孫文)을 비롯한 중국 선각자들이 선진문물을 배우던 일본은 1차대전에서 파생된 이 사건으로 중화 민족주의의 최대 적이 됐다. 양국 간 갈등은 100년이 지난 지금도 변함이 없다. 중국과 일본의 갈등은 동아시아 불안의 최대 원인이 돼왔다. 원칙도 없고, 민족 문제에 무지한 강대국 중심의 1차대전 전후 처리는 동아시아에서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 야욕을 부르는 화근이 됐다.  

 
3.1운동 당시 서울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 모인 군중.[위키피디아]

3.1운동 당시 서울 광화문 기념비각 앞에 모인 군중.[위키피디아]

중국 지식인 마르크스주의 경도 계기
5·4운동은 중국 지식인들이 제국주의에 대한 분노를 일으키고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울어지게 한 사건이기도 하다. 당시 베이징대 문과학장이던 천두슈(陳獨秀, 1879~1942년)와 교수이자 도서관 주임이던 리다자오(李大釗, 1888~1927년)는 이를 계기로 마르크스 레닌주의에 기울게 됐으며 1921년 함께 중국공산당을 창당했다. 이렇게 탄생한 중국 공산당은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을 거쳐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을 건국했다.  
 
호찌민의 청년 시절 모습.[위키피디아]

호찌민의 청년 시절 모습.[위키피디아]

베트남 호찌민, 독립운동 불붙여 
베트남의 독립운동가 호찌민(胡志明·1890~1969년)도 1차대전 종전 뒤 정치적 마무리를 위해 열린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해 베트남인의 참정권·평등권 등 8개 항의 요구서를 전달하려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의 독립 운동과 민족주의 운동에서 한 획을 긋는 사건이 됐다. 호찌민은 2차대전이 끝난 직후 베트남 민주공화국을 수립하고 주석이 됐다. 동아시아 최초의 공산주의 국가인 이 나라는 1975년 4월 30일 남베트남을 무력 점령해 통일을 이뤘으며 1976년 7월 2일 베트남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통합했다.  
 
한국, 글로벌 큰 그림 그리는 계기로  
100년 전인 1918년 11월 11일 오전 11시에 이뤄진 1차대전 종전은 한국인의 운명에는 물론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에까지 실질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당시 한국과 중국·베트남 등 아시아의 피압박 국가가 당한 수모와 고통은 실력이 있어야 남이 얕보거나 넘보지 않는다는 자각을 가져왔다. 당시의 교훈을 되씹으며 다시는 강대국의 입김에 좌우되는 일이 없도록 경제력과 국방력을 키우고 외교력 강화와 안정된 사회 건설에 박차를 가할 때다. 정부도 한반도만 보지 말고 매의 눈으로 글로벌 사회 전체를 조망하며 국민 전체의 미래를 위해 보다 큰 그림을 그려야 한다. 글로벌 사회에서 우리 공동체가 생존하는 지혜는 100년이 지난 지금도 다르지 않다.  
채인택 국제전문기자 ciimccp@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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