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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북을 열며] 공정 채용, 핵심은 행운의 제거

중앙일보 2018.11.12 00:38 종합 30면 지면보기
염태정 내셔널 팀장

염태정 내셔널 팀장

“공정성의 핵심은 ‘운의 중립화’이다. 어디에서 태어났는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부자인지 가난한지 등 우연하게 나타날 수 있는 사회적·자연적 조건을 없애야 한다. 그래야만 공정한 사회를 만들 수 있다.”
 
인사혁신처가 지난 8월 펴낸 『공정채용 가이드북』의 첫 장은 이렇게 시작한다. 하버드대 교수를 역임한 미국의 대표적인 정치철학자 존 롤스(1921~2002)의 말이다. 가이드북은 공정하고 투명하며 편견과 부정이 개입될 여지가 없는 채용과정 설계가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물론 운(運)적인 요소가 강한 가족 관련 사항은 요구해서도 알아서도 안 된다.
 
우리의 채용 현실은 어떤가. 롤스가 말한 운의 중립화(neutralizing luck)는 지켜지고 있는가. 채용에 있어 ‘운의 중립화’는 지원자에 대해 몰라야 하는 것인데, 최근 국정감사와 법원 판결을 보면 한참 먼 이야기다. 공공기관 재직자의 친인척이 상대적으로 채용이 쉬운 계약직으로 들어와 정규직으로 전환되는 신고용세습 의혹이 대표적이다.
 
서울교통공사에서 시작된 신고용세습 의혹은 한국마사회, 한전KPS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전북 남원시, 경북 상주시를 비롯해 전국 지자체에서도 비슷한 의혹이 줄을 잇는다. 한 지자체 간부의 아들은 정부의 공공기관 정규직 전환 가이드라인 발표 이후 비정규직으로 들어온 뒤 정규직이 됐다. 채용 특혜 의혹에 휩싸인 시의원이 의회 보직을 내려놓기도 했다. 신한은행을 비롯한 금융권의 채용 비리도 사실로 나타났다. 이런 채용 비리는 올해뿐이 아니다. 지난해 정부가 실시한 지방 공공기업 대상 채용 비리 특별점검에서만 489개 기관, 1488건의 위반사항이 적발됐다.
 
채용 비리는 구직자, 특히 미래를 꿈꾸는 젊은이들을 절망케 한다. 부모 탓을 하게 만들기도 한다. 취업포털 잡코리아가 올해 2월 성인 남녀 721명에게 ‘우리 사회가 공정하다고 생각하느냐’고 물었는데, 75%가 ‘불공정하다’고 답했다. 채용 공정성에 대한 신뢰는 바닥이다. 미국의 정치학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신뢰를 ‘번영의 요건’으로 꼽았다. 신뢰가 높은 나라는 잘살고 그렇지 않은 나라는 잘살기 힘들다는 거다. 미국과 일본은 신뢰가 높은 나라, 중국과 한국은 신뢰가 낮은 나라로 꼽혔다.
 
채용 비리는 특성상 은밀히 진행되고, 증거가 남지 않는 경우가 많아 적발·처벌이 쉽지 않다. 대통령이 전수조사 후 단호히 대처하겠다고 했다. 다만 과거 정부의 것만 골라 뒤지는 건 곤란하다. 초점은 ‘정의’를 외쳐온 현 정부에서의 채용세습 비리에 우선적으로 맞춰져야 한다. 차별 없는 공정한 사회, 신뢰할 수 있는 사회는 공정한 채용에서 출발한다.
 
염태정 내셔널 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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