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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명의 남자들과 함께 한 일장춘몽

중앙선데이 2018.11.10 02:00 609호 30면 지면보기
국립발레단 신작 ‘마타 하리’
마타 하리 역을 맡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

마타 하리 역을 맡은 국립발레단 수석무용수 김지영

마타 하리(Mata Hari·1876~1917)는 미스터리한 여자다. 20세기 초 파리 물랭루즈에서 벨리 댄스를 추던 댄서인데, 섹시한 여성 스파이의 원조이자 팜므파탈의 대명사다. 1차 세계대전 당시 프랑스와 독일의 이중스파이 혐의로 프랑스 정보당국에 총살당했지만, 오랜 세월 그녀에 관한 진실은 가려져 왔다.  
 
국립발레단이 그녀의 베일을 벗겼다. 올해 유일하게 선보인 신작 전막발레다. 강수진 단장 취임 이후 다양한 장르를 시도해온 국립발레단이 ‘말괄량이 길들이기’ ‘안나 카레니나’ 이후 선보인 정통 드라마발레라는 점에서도 주목할 만 하다. 고전 반열에 오른 존 크랑코의 ‘말괄량이 길들이기’와 최근 유럽에서 각광받았던 크리스티안 슈푹의 ‘안나 카레니나’에 비해 ‘마타 하리’는 국립발레단을 위해 새롭게 안무된 초연작이라 더욱 이목이 쏠렸다. 한국 발레가 아직은 ‘믿고 보는’ 클래식 대작 레퍼토리에 크게 의존하고 있는 현실에서 새로운 레퍼토리를 개발했다는 것은 국립발레단의 진일보한 도전이다.  
안무가는 빈 국립오페라발레단, 그리스 국립오페라발레단 등에서 예술감독으로 활약했던 레나토 자넬라. 그는 25년 전인 1993년 슈투트가르트발레단에서 강수진 주연의 ‘마타 하리’를 안무했던 인연으로 이번에 강 단장에게 ‘마타 하리’를 제안받았고, 때마침 지난해 마타 하리 100주기를 맞아 비공개 문서들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완전히 새로운 해석에 입각한 신작을 만들었다.  
 
시놉시스는 심플하다. 1막은 불행한 결혼생활을 하던 마타 하리가 인도네시아 자바섬에서 맛본 동양춤을 통해 댄서로 거듭나 파리에서 신비로운 ‘베일의 춤’을 선보이며 사교계의 꽃으로 군림하기까지를 그렸다. 2막에서는 댄서로서 수명이 다한 마타 하리가 전쟁이라는 시대적 소용돌이에 휘말려 프랑스와 독일에 이중으로 이용당하다 연인에게까지 배신당하고 비극적 최후를 맞는 이야기다.  
 
마슬로프 역의 이재우(왼쪽)와 김지영

마슬로프 역의 이재우(왼쪽)와 김지영

드라마발레로 이상적인 시놉시스다. 무용수의 삶을 소재 삼았기에 자연스럽게 춤의 킬링파트를 만들 수 있고, 전쟁이라는 시대상은 박진감 넘치는 군무를 표현하기에도 더할 나위 없다. 팜므파탈 캐릭터의 비극적 최후라는 컨셉트도 흡인력이 강하다.  
 
그런데 무대는 다소 혼란스럽다. “스토리를 따라가기 힘들다”는 반응이 많은데, 이는 처형 전야 감옥에서 과거를 회상하는 마타 하리의 파편적 기억 속에 그녀를 평생 따라다닌 남성편력의 주박(呪縛)이 되살아나는 구조이기 때문이다. 연대기적 흐름을 논리적으로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꿈과 현실, 환상까지 버무려지는 감성적인 무대이기에 마타 하리의 인생을 꿰고 있어야 몰입이 가능하다.  
 
마타 하리에 대한 지식이 별로 없다면 무려 10명이나 되는 남성 캐릭터의 등장에 ‘저 남자는 또 누군가’ 쓸데없이 집착하게 되니 춤이  가려진다. 그런데 캐릭터를 파악하고 보니 세련된 안무가 보였다. 전체적으로 네오클래식 스타일의 우아하면서도 절도 있는 동작에 기반하지만 클래식 팬을 위해 푸에테, 그랑주떼 같은 고전 테크닉도 깨알처럼 박혀 있었다. 자바섬 무용수들의 동양춤이나 발레뤼스의 니진스키와 카르사바나의 ‘세헤라자데’ 삽입은 디베르티스망과도 같은 효과로 무대에 무늬를 만들어 줬다. 상징적으로 표현한 전쟁 씬도 쇼스타코비치의 음악과 맞춤한 듯 맞아떨어졌고, 마타 하리의 시그니처인 ‘베일의 춤’ 솔로에는 공들인 흔적이 뚜렷했다.
 
2막에서는 1막이 마치 2막을 위한 전주곡에 불과했다는 듯 춤의 총공세가 펼쳐진다. 특히 마슬로프와의 애틋한 마지막 파드되부터 프랑스 라두 장군과 독일 칼레 장군의 대립을 그린 두 남자 무용수의 강렬한 듀엣, 이어지는 남성 군무, 마타 하리와 라두, 칼레의 3인무까지, 속도감 넘치는 베리에이션으로 쉴새없이 휘몰아치는 춤의 향연이 압권이었다. 강수진 단장이 출연했던 93년 버전을 오마주해 유일하게 그대로 살렸다는 피날레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마타 하리가 군모가 걸린 수많은 옷걸이를 쓰러뜨리며 남자들에 대한 원망을 다 쏟아내고 처형 당하는 비탄의 엔딩은 드라마발레의 교과서라 할 만 했다.  
 
“무용수로서의 꿈을 간직하고 있던 ‘무희’의 삶에 주목했다”는 강 단장의 말처럼, 미스터리의 여성 스파이의 정체가 아니라 나비처럼 자유롭게 춤추며 살고팠던 여인의 일장춘몽 같은 인생을 보여준 무대였다. 하지만 함정은 분명히 있다. 10명의 남성 캐릭터를 반드시 파악하고 봐야 춤이 보이고 음악이 들린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국립발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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