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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하경 칼럼] 문재인 대통령만 모르는 경제위기 가능성

중앙일보 2018.11.05 00:10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하경 주필

이하경 주필

1997년 8월 이스라엘의 네타냐후 총리가 한국을 방문했다. 고(故) 정세영 현대자동차 명예회장이 물었다. “이스라엘을 하이테크 나라로 발전시켰는데 정부가 기업에 지원해 준 것은 무엇인가.” 네타냐후가 웃으면서 “절대 비밀인데 ‘불간섭’이다”라고 대답했다. 정 회장은 불현듯이 우스갯소리가 생각났다고 한다. 누가 “한국에서 반도체가 왜 잘되지”라고 물으니 “한국 정부에 반도체과가 없기 때문에 몰라서 간섭을 못하는 것”이라는 답이 돌아왔다는 것이다. 규제만 하는 정부에 대한 기업인의 일갈이다.
 

경제 기둥 반도체·자동차도 흔들
노동개혁·규제 철폐 누가 말할까
‘포니정’ IMF 전 경고 마음에 걸려
대통령은 현장 아우성이 안 들리나

한국 경제의 두 기둥인 반도체와 자동차의 앞길에 빨간불이 켜졌다. 현대·기아차는 2015년 800만 대 넘게 팔았지만 글로벌 트렌드를 따라가지 못해 고전하고 있다. 영업이익률과 최대 시장인 미국·중국의 공장 가동률이 곤두박질치고 있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끌어가는 반도체는 버티고 있지만 기술격차를 좁혀 오는 중국의 추격세가 만만치 않다.
 
현대자동차를 창업하고 글로벌 기업으로 키운 ‘포니정’ 정세영은 IMF 외환위기가 터지기 전에 한국 경제의 추락을 공개적으로 경고했다. 1997년 3월 24일 언론 인터뷰에서 네 가지 방안이 강구되지 않으면 한국 경제는 3년 안에 침몰할 것이라는 ‘시한부 생명론’을 펼쳤다. 첫째는 정부가 모든 경제 관련 규제를 철폐해야 하고, 둘째는 근로자의 해이해진 근로정신을 바로잡아야 하며, 셋째는 금리 인하 등 금융 관련 대비책을 마련해야 하고, 넷째는 환율을 현실화해야 한다고 했다.
 
그는 ‘귀 막고 눈 가린 채 버티는 김영삼정부가 하도 답답해서’ 대통령 측근을 만나 “경제가 크게 잘못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 인사는 “뭔가 복안이 있겠지요”라며 말끝을 흐렸는데 자신의 직언이 먹혀들지 않는다는 듯 답답한 표정이었다. 결국 한국은 그해 12월 3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다.
 
이하경칼럼

이하경칼럼

지금 한국 경제의 분위기가 그때와 비슷하다. 올해 설비투자가 6개월 연속 감소한 것은 외환위기 전후와 판박이다. 과도한 최저임금 인상은 일자리를 더 쪼그라들게 하고 소비 위축과 경기 침체로 이어질 것이다. 미국 금리인상, 중국 성장률 하락, 국내 주력산업 불황의 쓰나미도 다가오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의 1일 국회 시정연설은 이런 상황을 타개할 수 있다는 확신을 주지 못했다. “함께 잘살자”는 포용성장의 방향은 맞지만 규제 철폐 의지는 강력하지 않았고, 노동개혁은 언급되지 않았다.
 
현직 정부 고위 인사는 “대통령을 직접 만나 건의해야 하는데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고 했다. 국무회의가 끝나고 얼른 대통령을 뒤따라가 몇 마디 나눌 수도 있겠지만 청와대 참모들에게 찍힐까 봐 포기했다고 한다. 대통령은 현장의 아우성을 듣지 못하고 있다. 포니정이 목도한 외환위기 전야와 흡사하다.
 
문재인 정부에 노동개혁은 성역인가. 정권 탄생의 산파역이라는 민주노총은 대통령 만찬에도 불참할 정도로 어깨에 힘이 들어가 있다. 사회적 대화 기구인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 불참을 선언했고 21일 총파업에 돌입한다. 적폐의 낙인이 두려운 기업인들은 목소리를 못 내고 있다. 20년 전의 포니정은 달랐다. 1988년 6월 1일 노조 총파업에 맞서 6개월 공장폐쇄를 선언했다. 보름이 지나자 강경했던 노동자들이 동요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노태우 대통령이 “사회가 불안해져서 공산화될 염려가 있다”며 문을 열라고 했다.
 
포니정은 이 결정이 노조에 ‘밀어붙이면 된다’는 사고방식만 심어주었다고 비판했다. 그는 1987년 이후 10년간 임금이 무려 4~5배 올라 선진국인 영국보다 높아졌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는 1992년 노조가 공장을 불법 점거하자 공장에 달려갔다. 쇠파이프로 중무장한 노조원들에게 바리케이드를 치우라고 호통치고, 가로막은 조합원의 복면을 벗겼다. 거칠게 나올 줄 알았던 노조원들의 기세가 꺾였다. 일단 성공이었다. 그러나 노동부 차관이 노조 간부들을 만나 회사 측 의사와 무관하게 일방적으로 협상을 타결지었다. 노사 자율의 원칙을 무너뜨린 것은 정부였다.
 
포니정은 창업 1세대다. 이들은 정부에 할 말은 했다. 그러면서도 부품회사엔 깍듯하게 대했다. 포니정은 하청기업이라는 하대(下待)의 용어를 폐기하고 협력업체로 부른 최초의 기업인이다. 이젠 그런 상생의 포용력과 결기를 동시에 가진 기업인이 눈에 띄지 않는다.
 
한국 경제의 규모는 커졌지만 정부의 역량과 책임감은 나아지지 않았다. 강성 귀족노조는 연봉 4000만원짜리 일자리 1만 개를 만들자는 ‘광주형 일자리’를 거부하고 있다. 자동차가 흔들리고, 성장과 고용이 무너지며, 신산업의 동력이 고갈되면서 이 나라의 경제에는 외환위기의 망령이 어른거리고 있다. 포니정의 용기를 소환해서 위기의 징후를 경고해야 하는 현실이 두렵고 서글프다.
 
이하경 주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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