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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스런 변화, 그 궤적을 주목하라

중앙선데이 2018.11.03 02:00 608호 6면 지면보기
내한 공연 10주년 맞은 피아니스트 안드라스 쉬프
‘굴드 아니면 쉬프.’  
 
한 세대 전, 피아노로 연주한 바흐 음악의 선택지는 대개 이 둘 중 하나였다. 글렌 굴드(소니)는 고독을 연료로 리드미컬한 파동을 음반에 담아냈다. 안드라스 쉬프(데카)는 하프시코드를 방불케 하는 장식음으로 예쁘고 반듯한 음악의 정원을 선보였다. 파격의 굴드와 균형의 쉬프. 대조적이면서 상보적인 두 존재였다. 영성이 건반에 비치는 로잘린 투렉의 바흐(DG)가 일반 애호가들에게 거론되기 이전의 얘기다.  
 
안드라스 쉬프(Andras Schiff)는 헝가리 피아니스트 전통의 계보를 잇는다. 비조(鼻祖)인 요한 네포무크 훔멜(1788~1837)은 슈베르트, 멘델스존, 쇼팽에게 영향을 끼쳤다. 프란츠 리스트는 극강의 기교를 자랑했다. 리스트의 제자에게 배운 벨러 버르토크는 릴리 크라우스, 죄르지 샨도르 등을 배출했다. 명교수 페렌츠 라도시가 키운 세 명의 제자 안드라스 쉬프, 졸탄 코치슈, 데죄 란키에게 ‘헝가리 삼총사’란 별명이 붙었다. 파울 바두라 스코다, 외르크 데무스, 프리드리히 굴다를 ‘빈 삼총사’라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다. 부다페스트와 빈은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수도였다.  
 
안드라스 쉬프는 1953년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났다. 다섯 살 때 피아노를 배우기 시작했다. 런던에서 조지 맬컴에게 하프시코드를 익히고 리스트 음악원에서 헝가리 현대 작곡가 죄르지 쿠르탁에게 배움으로써 클래식 음악의 과거와 현재를 그릴 수 있는 붓과 팔레트를 갖췄다. 오랜 시간 연마한 그의 터치는 둥글고 명징하다. 차가운 지성의 깊은 정신세계 위에 희열이 넘치는 표현이 붉은 물감 떨어지듯 생생하다. 이렇게 쉬프는 피아노로 재현 가능한 아름다운 색채와 따스한 온도를 거시적인 드라마의 틀에서 구현한다.  
 
연주와 연구 양면에서 쉬프는 교과서와 같은 존재다. 2007년 권위 있는 악보 출판사인 독일의 ‘헨레’는 2007년에 모차르트와 바흐 악보의 스페셜 에디션 편집을 안드라스 쉬프에게 부탁했다. 쉬프는 모차르트의 피아노 협주곡들에 그만의 독특한 핑거링을 표기했고, 카덴차가 유실된 곳에 직접 카덴차를 지어 써넣었다.  
 
쉬프는 바흐에만 머물지 않았다. 스카를라티, 하이든, 모차르트, 베토벤, 슈베르트, 쇼팽, 슈만, 버르토크 등 피아노가 주역인 대부분의 주요 레퍼토리들을 섭렵했다.  
 
쉬프의 바흐에서도 변화가 엿보였다. 데카 녹음 이후 20년 뒤 ECM에서 발매한 바흐 골드베르크 변주곡이 그 예다. 리듬감과 장식적 광채는 잦아든 대신 후반부로 갈수록 흥미로워지는 스토리텔링은 오랜 경험 축적의 산물이라 할 만하다.  
 
쉬프는 우리나라에 2008년 처음 왔다. ‘첼로의 성자’ 미클로슈 페레니와의 듀오 리사이틀은 30년간 우정을 가꾼 두 대가의 만남이 시너지를 이뤘다. 베토벤에서 조화와 기품이 느껴졌다. 바흐 슈만, 베토벤을 연주한 쉬프의 첫 리사이틀은 멋지게 포장한 완숙한 피아니즘으로 기억된다.  
 
쉬프는 2011년 베토벤 소나타를 연주했고, 2013년에는 ECM 페스티벌에서 정명훈이 지휘하는 서울시향과 브람스 피아노 협주곡 1번을 협연했다. 2014년에는 슈만, 멘델스존 등 낭만시대 레퍼토리를 선보였고, 가장 최근인 2016년에는 이탈리아 협주곡, 프랑스 서곡BWV831, 골드베르크 변주곡 등 본령인 바흐 작품들을 연주했다.  
 
11월 쉬프는 협주와 독주를 하루 간격으로 펼친다. 3일 롯데콘서트홀에서 샤를 뒤투아가 지휘하는 상트페테르부르크 필하모닉과 베토벤 피아노 협주곡 5번 ‘황제’를 협연한다. 4일에는 같은 장소에서 독일 작곡가들의 작품으로 리사이틀을 연다. 멘델스존 환상곡 F#단조, 베토벤 소나타 24번, 브람스 8개의 피아노소품 Op.76, 7개의 환상곡 Op.116을 들을 수 있다. 쉬프의 장기인 바흐 영국 모음곡 6번 BWV811이 대미를 장식한다. 지난 10년간과 마찬가지로 전속 조율사가 동행해 연주 준비에 만전을 기할 예정이다.  
 
지난 내한 공연들을 반추할 때 쉬프 연주에서 변화의 궤적이 그려진다. 외면의 반짝임에서 내면을 응시하는 진실로의 이행이다. 마치 형식을 중시한 고전주의에서 자아의 확장인 낭만주의로 향한 음악의 역사를 연상시키는 변화다. 2년 만이자 첫 내한 10주년을 맞아 대면할 쉬프의 연주는 청중 각자의 감상 연대기에 어떤 자취를 남기게 될지 궁금해진다.  
 
글 류태형 대원문화재단 전문위원  사진 마스트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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