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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란문화재단을 주목하는 이유

중앙선데이 2018.11.03 02:00 608호 29면 지면보기
뮤지컬 ‘베르나르다 알바’는 희한한 작품이다. 20세기 초 프랑코 정부군에 총살당한 스페인의 ‘낭만과 혁명의 시인’ 로르카의 희곡이 원작인데, 억압받는 사람들의 터질 듯한 욕망을 여자 10명만 나오는 그로테스크한 무대로 표현했다. 스페인의 열정을 담은 강렬한 음악과 안무도 흔히 보는 상업뮤지컬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티켓 파워도 별로다. 잠깐 등장하는 황석정 정도가 알려진 얼굴이다. 그럼에도 예매 개시 2분 만에 전석매진될 정도로 ‘핫하다’. 창작진과 배우들의 자부심도 예사롭지 않다. 정영주 배우는 “작품 내용이 뭔지도 모른 채 사명감과 자부심만으로 뭉쳤다”고 했다. 무슨 소릴까. 혁신적인 무대 언어로 ‘미국 뮤지컬의 미래’로 평가받는 마이클 존 라키우사가 대본·작사·작곡을 도맡은 작품으로, 그의 전작 ‘씨 왓 아이 워너 씨’가 워낙 강렬하기도 했다. 하지만 이번 공연의 방점은 제작사인 ‘우란문화재단’에 찍힌다.  
 
우란문화재단은 SK그룹 일가인 최기원 이사장이 2014년 사재를 털어 만든 민간 비영리재단으로, 무용극 ‘클럽살로메’, 연극 ‘비(BEA)’, 피지컬씨어터 ‘그, 것’ 등 상업 논리에서 벗어난 기획으로 공연예술계 최전선에 섰다. 뿐만 아니다. 요즘 주목받는 젊은 창작자들을 만나보면 “이게 사실 우란에서 시작된 작품”이라는 얘기를 곧잘 듣는다. ‘나와 나타샤와 흰 당나귀’ ‘어쩌면 해피엔딩’ 등 최근 뛰어난 작품성으로 각종 상을 휩쓴 소극장 뮤지컬들이 여기서 개발된 것이라니 말 다했다.  
 
지난주 성수동에 신사옥을 개관한 우란문화재단의 개관기념축제 첫 무대가 ‘베르나르다 알바’다. 번역을 맡은 작곡가 박천휘는 “라키우사 작품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실험극”이라면서 “라키우사가 브로드웨이에서 흥행에 참패했지만 오프브로드웨이 비영리 극장을 통해 좋은 공연을 만들 듯이, 상업적으로 흘러가는 공연계에서 이런 작품이 제작될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준 우란문화재단에 감사한다”고 했다.  
 
요컨대 우란이 창작자 인큐베이팅을 통해 예술가들이 자생할 수 있는 생태계 조성에 톡톡히 기여하고 있다는 얘기다. 신사옥엔 공연장을 포함해 전시장, 레지던시 스튜디오와 녹음실 등 다양한 공간을 확충했다. 강정모 사무국장은 “그동안 창작지원을 하며 필요하다고 생각한 공간들을 이번에 마련했다”고 했다. 성수동이라는 공연예술 불모지에 아름다운 창작의 둥지를 튼 것도 주목할 만하다.  
 
사실 정부의 예술지원 방식은 블랙리스트 사태에서 보듯 예술가를 지원금으로 통제하는 역할을 해온 측면이 크다. 예술인들이 관련자 엄중 징계를 요구하며 시위를 이어가고 있는 것도 ‘베르나르다 알바’에서 통제받던 여인들의 분노가 폭발하는 것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지원하되 간섭하지 말라”는 외침인 것이다.  
 
브로드웨이가 상업 뮤지컬의 메카로 번성할 수 있는 건 오프브로드웨이나 비영리 지역 극장들이 젊은 창작자들에게 ‘마음껏 실패할 자유’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 연극계 현황을 담은 신간 『브로드웨이를 넘어』를 낸 김미혜 교수는 민간 재단의 기금과 개인 기부자들의 도움을 받는 비영리 지역 극장이 지역민들의 삶의 질 향상에 봉사하게 되는 선순환 구조를 지적하며 “포드 재단이 없었다면 미국의 지역 극장 운동이 불가능했을 것이다. 한국에서도 다양한 재단과 개인이 문화 예술에 기부를 많이 하는 날을 희망한다”고 했다. 공연이 창작자와 관객의 삶 모두를 윤택하게 하려면, 국가가 아닌 개인이 움직여야 할 것 같다. 우란문화재단의 행보가 주목되는 이유다.  
 
 글 유주현 기자 yjjoo@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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