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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스터 션샤인’ 효과 … 121년 만에 햇살 받는 격동의 대한제국

중앙선데이 2018.11.03 00:20 608호 12면 지면보기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부터 덕수궁 후문 쪽에 이르는 ‘고종의 길’을 조망해 보았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120m의 길이다.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김경빈 기자]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부터 덕수궁 후문 쪽에 이르는 ‘고종의 길’을 조망해 보았다. 사진 중앙에 보이는 120m의 길이다. 대한제국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보게 한다. [김경빈 기자]

대한제국은 어떤 나라일까. 우리 민족 최초의 근대 국가였음에도 제대로 된 평가는 고사하고 눈길조차 잘 받지 못하던 대한제국에 대한 관심이 확산되고 있다. 이해의 깊이를 더해가면서 고종과 의병에 대한 재평가로까지 이어진다. 드라마의 영향이 크다. ‘미스터 션샤인’(tvN)은 각종 추문에 오르내리던 배우 이병헌의 이미지까지 바꿔놓았다.
 

인기 드라마 후광
구한말 고종과 의병 재조명 바람
일제에 맞선 거센 저항의지 보여줘

‘고종의 길’ 개방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던 고종
구국이 제1 급선무, 의병운동 지휘

대한제국 재평가
‘친일 개화 대 친청 척사’ 이분법 극복
나라를 지키고 근대화 추진 병행

드라마만 그런 것이 아니다. 10월은 대한제국의 달이다. 10월 12일은 대한제국이 창건된 날. 올해가 121주년이다. 10월 30일 ‘고종의 길’이 일반에 개방되었다. 지난 8월 잠시 시범 공개했다가 이번에 본격 공개한 것이다. 당초 10월 30일엔 또 다른 행사도 예정돼 있었다. ‘덕수궁 돌담길’을 완전 개방하는 일이다. 덕수궁을 돌담길을 한 바퀴 돌며 산책할 수 있게 됐다. 공사 일정이 더 늘어나 12월 초 일반에 개방된다.
 
대한제국 시기 고종과 의병을 소재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이병헌(오른쪽)과 김태리. [중앙포토]

대한제국 시기 고종과 의병을 소재로 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주인공 이병헌(오른쪽)과 김태리. [중앙포토]

지난 9월엔 탑골공원에서 ‘대한제국 군악대(양악대)’ 창설 117주년 기념 음악축제가 특별 사진전과 함께 열렸다. 불과 몇 해 전까지 생각도 못 해봤을 일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지난 5월엔 워싱턴 주미대한제국공사관 환수 복원 기념 태극기 게양식도 거행됐다. 대한제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책들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대한제국 창건과 독립의 길=이번에 개방되는 ‘고종의 길’은 서울 중구 정동에 위치한 옛 러시아 공사관 터에서 덕수궁 후문(구세군 서울제일교회 방면)에 이르는 120m의 길이다. 고종이 1896년 2월 11일 경복궁을 탈출해 옛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했을 때 사용했던 도로다. 러시아 공사관에 1년간 머물던 고종이 덕수궁(당시 이름은 경운궁)으로 환궁할 때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다.
 
10월 30일 개방된 덕수궁 후문 쪽 ‘고종의 길’. [김경빈 기자]

10월 30일 개방된 덕수궁 후문 쪽 ‘고종의 길’. [김경빈 기자]

이번 개방이 ‘고종의 길’을 모두 복원한 것은 아니다. 경복궁에 포로로 유폐돼 있던 고종이 경복궁을 빠져나와 지금의 서울지방경찰청 앞과 새문고갯길(강북삼성병원과 경향신문사 사이)을 거쳐 옛 러시아 공사관에 도착하게 되는데, 그 ‘고종의 길’ 전 구간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하지만 비록 짧더라도 고종과 대한제국의 역사적 궤적을 새롭게 드러내는 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에서 작게만 보이지는 않는다.
 
덕수궁은 우리 근대사의 영욕을 모두 담고 있다. 러시아 공사관에 1년간 체류하던 고종은 경복궁이 아니라 덕수궁으로 환궁해 대한제국을 창건한다. 그때의 이름은 덕수궁이 아닌 경운궁이었다. 조선의 정궁이었던 경복궁은 일본군에 포위돼 있었다. 고종이 경복궁으로 환궁하지 않은 이유다. 사실상 조선이 패망했음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경운궁은 옛 러시아 공사관을 비롯한 재외 공관이 주변에 많이 위치해 비교적 안전했다. 무엇보다 경복궁 내부에는 친일파 관료들이 들끓었기에 그리로 돌아갈 수가 없었다.
 
‘고종의 길’은 어떤 길일까. 이번에 개방된 길 말고 또 하나의 길이 있다. 고종이 추구한 자유와 독립의 길이다. 고종이 경운궁에서 대한제국을 창건한 비밀이 거기에 담겨 있다. 그 잊혀진 의미를 다시 찾아내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고종의 길’을 복원하는 일이 될 것이다. 고종은 1897년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일제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보존하고 근대화를 추진하는 전략을 병행해 나갔다. 구국은 제1의 급선무였다. 대한제국 선포는 구국을 위한 비상조치였다.
 
1906년 무렵 영국 출신 언론인 매킨지가 찍은 대한제국 의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회에 이 사진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왔다.

1906년 무렵 영국 출신 언론인 매킨지가 찍은 대한제국 의병.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마지막 회에 이 사진을 오마주한 장면이 나왔다.

일제는 온갖 개혁의 구실을 내세워 침략의 사실을 가리려고 했다. 고종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 일은 흔히 ‘아관파천’으로 불린다. 아관은 러시아 공사관의 한문 표기다. ‘파천’이란 용어는 도망간다는 뜻인데, 당시 일본 정부와 일본 언론만 ‘파천’이라고 깎아내렸다. 구미 해외 언론은 ‘망명’(asylum)으로 표기했다. 우리 실록에는 왕이 거처를 옮긴다는 뜻의 ‘이어(移御)’라고 썼다. 120년 전 당시 해외언론이 이미 사용한 망명이란 말을 지금 다시 쓰는 일도 ‘고종의 길’을 복원하는 방식이 될 것이다.
 
“독립된 조국에서 시유 어게인(See you again·다시 만나요)!”
 
‘미스터 션샤인’은 이렇게 막을 내린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의병 동지들을 향한 뭉클한 인사다. 나라를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이 죽어 나갔지만 단순한 비극적 드라마는 아니다. 국가의 존재 자체가 위태로운 시대에 가장 앞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새삼 환기시켰다. 조선과 대한제국이 무기력하게 망한 것이 아니라 거세게 저항하다 망했음을 보여줬다.
 
조선 최고 갑부집 도련님 김희성 역을 맡았던 배우 변요한은 의젓한 종영 소감을 밝혔다. “‘미스터 션샤인’을 통해 잊지 말아야 할 분들이 계셨다는 것을 기억해주셨으면 좋겠다.”
 
드라마에서 호텔 글로리 사장으로 나온 배우 김민정이 맡은 또 하나의 역할은 제국익문사 요원이었다. 제국익문사는 낯선 용어인데, 대한제국 시기 고종의 밀명을 받고 움직이던 일종의 정보기관이다. 국내는 물론 동경, 상해 등 해외에도 지부를 두고 있었다. 『고종시대의 재조명』(2000년)을 펴내며 대한제국 재평가의 물꼬를 튼 이태진 서울대 명예교수는 “실제 존재했던 제국익문사의 총지휘자가 국가 원수 황제인데, 황제의 묘사가 비교적 잘 되어서 과거의 부정적 이미지를 벗기는데 상당한 기여를 한 것 같다”고 평가했다.
 
『갑진왜란과 국민전쟁』을 비롯해 최근 3년간 6권의 관련서를 출간하며 대한제국 재평가에 앞장서고 있는 황태연(동국대 정외과) 교수는 “조선이 어떻게 망해갔는지를 대중적 차원에서 드라마로 펼쳐 보였다. 대한제국 군대가 해산된 후 전개된 ‘서소문 전투’ 같은 것은 처음 드라마에 묘사된 것 같다. 일제에 대한 거센 저항과 독립운동의 정신이 3·1운동을 거쳐 대한민국임시정부 수립과 광복군 창설로 이어진 것”이라고 말했다.
 
1906년 탑골공원에서 연주회를 마친 ‘대한제국 군악대(양악대)’. [중앙포토]

1906년 탑골공원에서 연주회를 마친 ‘대한제국 군악대(양악대)’. [중앙포토]

◆고종과 의병 ‘연합 작전’=‘미스터 션샤인’의 주요 배경은 의병 전쟁이다. 고종과 의병이 연계된 듯한 모습도 나온다. 전혀 없는 얘기를 꾸며 하는 것이 아니다. 새롭게 재조명되는 고종과 의병의 관계가 반영됐다.
 
대개 의병이라고 하면 재야의 평민들이 주축이 된 자발적 민군(民軍)으로 간주하곤 한다. 이런 의병 개념은 이제 수정되어야 할 것 같다. 적어도 1894년 동학농민군 2차 항일봉기 이후의 의병은 대체로 고종의 거의(擧義) 밀지를 받고 움직였다. 『고종황제와 한말의병』(2007)의 저자 오영섭(연세대 이승만연구원) 교수는 “고종은 한말 의병운동을 이면에서 실질적으로 지도하고 후원한 인물”이라고 밝혔다.
 
고종과 의병의 ‘연합 작전’이 있었기에 아관망명도 성공할 수 있었다. 경복궁에 유폐돼 있던 고종은 1896년 1월 27일부터 전국 팔도에 의병을 일으키라는 밀지를 발령했다. 경복궁을 포위하고 있던 친일 ‘친위대’ 병사들이 전국의 의병을 진압하기위해 2월 초부터 급파됐다. 서울의 궁궐 수비는 허술해질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이 수비 공백을 뚫고 탈출할 수 있었다.
 
대한제국 시기를 평가하는 기존의 시각은 이분법적이다. 수구 대 개화, 친청파 대 친일파의 진영 논리가 지배하고 있다. ‘고종의 길’은 그 이분법을 벗어난 지점에서 찾을 수 있을 듯하다. 친일 개화파와 친청 척사파를 둘 다 극복한 길, 근대 민족국가를 향한 ‘구국 근대화’의 길이다. ‘고종의 길’을 제대로 복원하기 위해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금척』『근대의 경계를 …』 대한제국 관련 책 출간 잇따라
대한제국 관련 책

대한제국 관련 책

대한제국 시기를 재조명하는 책도 잇따라 출간되고 있다. 김종록 작가의 소설 『금척』, 민명기 작가의 소설 『죽지 않는 혼』을 비롯해 김종욱 동국대 교수의 『근대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 김태웅 서울대 교수의 『어윤중과 그의 시대』, 김건태 서울대 교수의 『대한제국의 양전』 등이 올 하반기에 나왔다. 올 상반기에는 황태연 교수의 『한국 근대화의 정치사상』, 나정원 강원대 교수의 『한국 종교와 근대화의 정치사상』, 이영재 한양대 교수의 『근대와 민』 등이 출판됐다.
 
김종록의 『금척』은 고종의 비밀 특명 ‘금척 프로젝트’를 소재로 한 팩션이다. 이토 히로부미를 척살한 안중근은 심문 과정에서 특파독립대 26인의 총대장이 김두성(金斗星)이라고 했다. 김두성이 누구일까. 역사적 사실을 토대로 작가는 작전의 총 지휘자가 고종이었음을 밝혀낸다. 나정원의 『한국 종교와 근대화의 정치사상』은 한국 근대화의 사상적 동력을 토속신앙·민간신앙·무속 등 종교를 통해 새롭게 살펴보고 있다. 김종욱의 『근대의 경계를 넘은 사람들』은 조선 후기에서 대한제국기를 거치며 여성과 어린이에 대한 존중이 싹텄음을 보여준다.
 
김태웅의 『어윤중과 그의 시대』는 우리 국사학계가 소위 ‘급진 개화파’를 중심으로 근대사를 서술해온 경향을 되돌아보면서 상대적으로 저평가된 ‘온건 개화파’의 목소리에 주목했다. 김건태의 『대한제국의 양전』은 대한제국기의 토지조사사업을 분석하며 ‘서구중심주의 사관’에 입각한 근대성 담론에서 벗어날 것을 제안한다. 대한제국에 대한 기존의 이해 틀을 벗어나려는 시도는 다양한 방식으로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배영대 문화선임기자 balanc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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