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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식의 레츠 고 9988] 동네주민처럼 맥주 즐기고 쇼핑…네덜란드 치매 환자 천국
신성식 기자 사진
신성식 중앙일보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동네주민처럼 맥주 즐기고 쇼핑…네덜란드 치매 환자 천국

중앙일보 2018.11.02 06:00 종합 14면 지면보기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치매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사진 호흐벡]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치매노인이 자전거를 타고 있다. [사진 호흐벡]

세계 치매인구는 4670만명(2015년)이며 2050년 1억3150명으로 늘어난다(중앙치매센터). 수명 연장과 더불어 치매의 고통도 늘어난다. 세계는 치매와 전쟁에서 아직 지고 있다. 치료약이 아직 없다. 한국의 치매 환자는 병원·요양시설 등지에서 말년을 보낸다. 삶의 질이 매우 낮다. 가족의 수발 부담 경감에 무게중심이 쏠려있다. 관리의 대상일뿐 당사자의 삶의 질 개선은 뒷전에 밀려 있다. 한국언론진흥재단의 사회보장 연수 프로그램에 참여해 네덜란드·독일·스웨덴의 치매 현장을 다녀왔다.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모습. [사진 호흐벡]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모습. [사진 호흐벡]

옛 동네처럼 예전 집처럼  
지난달 24일 오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북쪽 외곽의 호흐벡 마을에 들어섰다. 그리 넓지 않은 로비에서 누군가가 피아노로 프랭크 시나트라의 '마이 웨이'를 연주하고 있다. 인근 공장 근로자가 점심시간에 짬을 냈다고 했다. 일종의 봉사다.
 
 좀 지나자 혼란스러울 정도로 여기저기서 노인들이 왔다갔다 했다. 건물을 돌며 산책하거나 카트를 끌고 장보러 가고, 카페에서 차를 마신다. 옥상 정원 길을 오가거나 휠체어를 타고 산책을 한다. 어떤 할머니는 한국 기자 두 명의 팔짱을 낀 채 1시간 가량 따라다녔다. 
 
인터뷰 도중에 한 할아버지가 불쑥 들어와서 혼잣말을 했다. 그러더니 한국 기자단임을 알고는 "내가 해양전문가다. 한국을 방문한 적이 있다"고 말한다. 인터뷰를 방해할 정도였으나 제지하지 않는다. 한 노인은 "살 게 있다"며 카트를 끌고 수퍼마켓으로 들어갔다.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치매 노인(왼쪽)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호흐벡]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치매 노인(왼쪽)이 그림을 그리고 있다. [사진 호흐벡]

 호흐벡은 2009년 1만2000㎡(약 3636평)에 조성된 치매 마을이다. 비영리단체 비비움이 운영한다. 기본 형태는 너싱홈(가정형 요양시설). 창시자 이본느 판 아메롱헨은 "원래 전형적인 요양시설을 관리하다 적절한 서비스를 제공하지 않고 있다는 반성에서 호흐벡을 구상했다"며 "치매 노인은 뇌가 매우 혼란스럽기 때문에 환경이 혼란스러우면 더 어려움을 겪는다. 갑자기 요양원에 살라고 하면 혼란을 느낀다. 병원에 살고 싶은 사람은 없을테니까"라고 말한다.  
 
23개 가정집에 169명 거주 
호흐벡은 치매 천국이다. 평생 살던 동네에서, 늘 살던 집에서 살다 죽음을 맞이하는 것을 표방한다.  23개 가정집(1,2층)에 169명의 노인이 산다. 중등도 이상의 중증 치매 노인들이다. 환자라고 부르지 않고 거주자라고 한다. 의사·간호사·심리치료사·물리치료사·사회복지사·운동치료사 등을 포함한 170명의 직원과 140명의 자원봉사자가 있는데, 어느 누구도 가운·유니폼을 입지 않는다. 한 가정에 5~7명이 산다.
 
 노인의 삶을 분석해 7개 유형으로 나눠 한 식구를 이룬다. 네덜란드 전통형, 문화 친화형, 수공·목공 애호형, 고급스런 클래식형, 인도네시아(옛 네덜란드 식민지)형 등으로 나뉜다. 유형별로 대기자를 받는데, 문화 친화형이 가장 많다. 가정마다 1~2명의 직원이 같이 살면서 요리 등을 돕는다.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가정 내부 모습. 23개 가정에 169명이 산다. [사진 호흐벡]

네덜란드 치매마을 호흐벡의 가정 내부 모습. 23개 가정에 169명이 산다. [사진 호흐벡]

맥주집·미용실 등 동네시설 갖춰 
호흐벡에는 수퍼마켓·미용실·호프집·식당·극장·음악실 등의 '동네 인프라'가 있다. 또 음악·목공·요리 등의 취미 클럽이 있다. 음악실(일명 모짜르트실)에는 오래된 축음기·엠프·피아노 등이, 요리실은 기억을 돕기 위해 전통 프라이펜 등의 요리기구와 양념통이 있다. 이날 들른 요리실에는 아침에 구운 빵이 남아 있었다. 
 치매 노인들이 행복할까. 아메롱헨에게 물었다.
네덜란드 치매천국 호흐벡 창립자 이본느 판 아메롱헨. 암스테르담=신성식 기자

네덜란드 치매천국 호흐벡 창립자 이본느 판 아메롱헨. 암스테르담=신성식 기자

거주자가 만족하나.
"2년마다 만족도를 조사하는데, 매우 높다. 치매를 낫게 하지는 못하지만 정상적 생활을 하면서 삶의 질이 더 나빠지지 않게 하는 게 중요하다. 직원들이 다른 방식으로 사고해야 한다. 부모처럼 대하는 것이 중요하다. 공격성 있는 거주자는 치료한다."
공짜인가.
"법에 따라 소득에 맞게 최소 500(약 64만원)~2500유로(322만원)를 거주자가 낸다. 나머지는 정부(장기요양보험을 지칭)가 부담한다."(네덜란드의 1인당 월 수가는 6000유로(774만원)이다)
대기자가 많나.
"그렇다. 중증도에 따라 우선순위를 정해 받는다. 개인이 주치의(홈닥터)를 통해 정부기관(CIS)에 신청하면 등급을 판정한다."
적자가 나지 않나.
"다른 너싱홈과 비슷하게 지출한다."
 
 호흐벡에는 와상환자도 거주한다. 아메롱헨은 "특별한 기구나 휠체어를 이용하면 거동할 수 있다. 죽는 순간에만 침대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날 자원봉사자인 듯한 사람이 담요를 둘러싼 중증 노인의 휠체어를 밀면서 산책하고 있었다. 
네덜란드 '치매 천국' 호흐벡의 맥주집. 암스테르담=신성식 기자

네덜란드 '치매 천국' 호흐벡의 맥주집. 암스테르담=신성식 기자

"치매 남편에게 최고의 선택" 
3년 반 거주한 남편(75)을 만나러 온 아내는 호흐벡에 대해 "원더풀"이라고 말했다. 그의 남편은 전통적 유형의 가정에 산다. 클래식 음악이 나오고, 생화가 항상 꽂혀있고, 이탈리아식 생선요리와 프랑스 요리가 나온다고 한다. 그녀는 "남편이 전에는 밤낮 없이 실종돼 경찰이나 이웃이 발견한 경우가 많았다. 마을 밖으로 나가지 못하는 게 흠이지만 실종 걱정하지 않게 됐고 일상적인 삶을 유지할 수 있게 돼 최고의 대처를 한 것이라 생각한다"고 말했다.
 
 호흐벡의 힘은 자원봉사자에게서 나온다. 부부 봉사자 잉흐리트 드 흐르트(63)는 "이벤트 팀에서 거주자를 데리고 외부 나들이를 하거나 기획한다"며 "거주자들이 자유롭게 움직이고, 클럽활동을 하는 모습을 볼 때 행복하다"고 말했다. 그는 "집이 근처라서 봉사에 나섰다"고 덧붙였다.
 복지전문기자 sssh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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