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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정탑길·안반데기, 평창올림픽이 남긴 가을 비경

중앙일보 2018.11.02 01:00 종합 20면 지면보기
안반데기. 국내 최대 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으로 올림픽 아리바우길 4코스에 있다. 지난해 10월 하순 드론으로 촬영한 장면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안반데기. 국내 최대 규모의 고랭지 배추밭으로 올림픽 아리바우길 4코스에 있다. 지난해 10월 하순 드론으로 촬영한 장면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림픽 아리바우길 로고

올림픽 아리바우길 로고

평창 겨울올림픽 개막 100일을 앞둔 지난해 10월 14일. 올림픽이 열리는 강원도의 세 고장(정선·평창·강릉)을 잇는 트레일이 탄생했다. 이름하여 올림픽 아리바우길. 9개 코스 131.7㎞의 장거리 트레일이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가을 풍경
알록달록 낙엽 깔린 계곡 끝
어머니가 쌓은 돌탑 3000개

해발 1000m 산 위의 배추밭
텅 빈 평원 발치에 구름바다

길은 좋았다. 강원도 구석구석을 헤집는 길이어서 강원도의 자연은 물론이고 역사와 문화도 온몸으로 경험할 수 있었다. 그러나 길은 이내 잊혔다. 올림픽이 끝나자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33억원이나 들인 올림픽 유산이었으나, 중앙 정부나 자치단체나 서로 자기 길이 아니라고 밀어냈다.
 
아쉬운 마음이 크다. 지난해 문화체육관광부와 공동으로 올림픽 아리바우길 가이드북을 제작한 기억이 있어서다. 그러고 보니 1년 전 이맘때였다. 이름에 ‘올림픽’을 앞세운 단 하나의 트레일을 걸었던 나날이 여태 생생하다. 평창 올림픽이 낳은 가을 비경을 1년 만에 내놓는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체 코스 지도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체 코스 지도

 
 꿈속 같은 세상 - 모정탑길
노추산 자락의 모정탑길은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찾아낸 비경 중의 비경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노추산 자락의 모정탑길은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찾아낸 비경 중의 비경이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올림픽 아리바우길은 정선·평창·강릉의 오랜 명소를 두루 짚는다. 정선 아리랑시장(정선오일장)·아우라지·백두대간·대관령옛길·오죽헌·경포호수·강문해변 등 세 고장의 이름난 산과 강, 바다와 호수, 시장과 유적을 두루 아우른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지역 명소만 이어 붙인 것은 아니다. 모정탑길이 있어서다. 노추산(1322m) 북쪽 자락에 들어선 모정탑길은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찾아낸 비경 중의 비경이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3코스 끄트머리에 있다. 
 
모정탑길은 약 500m 길이의 계곡 길이다. 어귀 주차장에서 양쪽으로 돌탑이 세워진 소나무 숲길을 1㎞ 정도 들어가면 나무다리 앞에 모정탑길 안내판이 나온다. 숲길의 돌탑은 최근에 강릉시 왕산면 대기리 주민이 세운 것이다. 다리 건너 돌탑이 진짜 모정탑이다.  
모정탑길. 계곡 오솔길을 따라 어른 키보다 더 높은 돌탑이 서 있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길. 계곡 오솔길을 따라 어른 키보다 더 높은 돌탑이 서 있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길. 고 차순옥 여사가 26년간 머물렀다는 움막 근처에는 돌탑이 담장을 이루고 있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길. 고 차순옥 여사가 26년간 머물렀다는 움막 근처에는 돌탑이 담장을 이루고 있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길. 노추산 깊은 숲 곳곳에 돌탑 무더기가 서 있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 많은 돌탑을 쌓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길. 노추산 깊은 숲 곳곳에 돌탑 무더기가 서 있다. 여자 혼자의 힘으로 이 많은 돌탑을 쌓았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는다. 손민호 기자

모정탑(母情塔). 이름처럼 어머니가 쌓아 올린 돌탑이다. 사연이 곡진하다. 고(故) 차순옥(1943∼2011) 여사의 한 맺힌 삶이 돌 하나하나에 새겨져 있다. 아니, 지독히 가혹했던 한 여자의 생애가 고스란히 돌탑이 되어 서 있는 것인지 모른다. 
 
스물두 살 나이에 서울에서 강릉으로 시집을 온 어머니는 슬하에 4남매를 두었다. 그러나 남편은 병에 걸렸고, 자녀가 둘이나 먼저 세상을 떠났다. 시름이 깊었던 시절, 어머니는 꿈을 꿨다. 깊은 산에 들어가 돌탑 3000개를 쌓으면 집안의 우환이 사라질 것이라는 계시였다. 이튿날부터 어머니는 꿈에서 봤던 산을 찾아 나섰다. 그렇게 해서 찾아낸 자리가 여기, 노추산 자락의 깊은 골이었다. 
 
어머니는 계곡에 움막을 짓고 혼자 살았다. 그리고 하나씩 돌을 날라 탑을 쌓았다. 1986년이었으니 마흔세 살 때다. 세월이 흘러 2011년. 어머니는 계곡에서 돌아갔다. 다짐했던 돌탑 3000개는 진즉에 완성한 뒤였다. 안내판에는 돌탑 3000개라고 적혀 있으나, 계곡 곳곳의 돌탑은 못해도 4000개가 넘어 보인다. 어머니가 계곡에 들어와서 산 세월은 26년에 이른다. 
 
도무지 믿기 어려운 이야기다. 여자 혼자 이 깊은 계곡에서 26년을 살았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고, 여자의 힘으로 이 많은 돌을 옮겼다는 것도 믿어지지 않는다. 돌탑은 대부분 어른 키만 하며, 어머니가 쌓았다는 돌 중에는 장정도 버거워 보이는 바위가 허다하다. 
 
강릉에 산다는 자녀는 연락이 닿지 않았다. 대신 대기리 마을회 오과현 사무국장과 강릉시 최규선 주무관에게 사연을 확인했다. 아버지가 돌아가기 전까지 이따금 들렀고, 마을 주민도 가끔 먹을 것을 챙겨줬다는 일화 정도만 더해졌을 뿐이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들어도 돌탑들은 여전히 믿어지지 않는다. 
 
계곡 단풍은 유난히 색깔이 짙다. 물기를 머금어서다. 여기 모정탑길의 단풍도 채도가 높다. 햇빛이 잘 안 들어오는 모정탑길에 들면, 졸졸졸 물 흐르는 소리와 바스락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산사의 독경 소리처럼 은은히 울려 퍼진다. 꿈속 세상 같다. 아니 어머니의 꿈에서 비롯된 세상이니 꿈속 세상이 맞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내가 긴 꿈을 꾸는 중일 수도.
 
 빈 것으로 꽉 차다 - 안반데기
지난해 10월 하순 드론으로 촬영한 안반데기. 배추를 수확한 뒤여서 휑할 줄 알았으나 곡선의 밭고랑이 기하학적 장면을 빚어냈다. 멀리 산 아래로 구름바다가 내다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지난해 10월 하순 드론으로 촬영한 안반데기. 배추를 수확한 뒤여서 휑할 줄 알았으나 곡선의 밭고랑이 기하학적 장면을 빚어냈다. 멀리 산 아래로 구름바다가 내다보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모정탑길 어귀 주차장에서 도로를 건너면 3코스 종점 배나드리 마을이 나타난다. 한자 이름은 선도리(船渡里). 배가 드나드는 마을이라는 뜻이다. 강원도 심심산골의 배 내리는 마을이라. 언뜻 어색한 조합처럼 보인다. 하나 내력을 알고 나면 이만큼 적확한 이름도 없다. 
 
마을 앞을 흐르는 개천이 송천이다. 송천이 골지천을 만나 조양강이 되고, 조양강이 동대천을 받아들여 동강을 이루고, 동강은 서강과 합쳐져 남한강이라 불리며, 남한강이 북한강과 섞여 마침내 한강을 완성한다. 그러니까 송천은 한강의 고조할아버지뻘인 물길이다. 70년대까지만 해도 이 물길을 따라 강원도 소나무가 서울로 올라갔다. 옛날 떼꾼이 뗏목을 띄웠던 제일 북쪽의 나루터가 배나드리 마을이다. 
 
배나드리 마을에서 도암댐까지 송천 물길을 따라 임도가 나 있다. 약 8㎞ 길이의 천변 임도가 올림픽 아리바우길 4코스의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라지만, 워낙 인적이 드물어 걷는 데 전혀 불편함이 없다. 봄에는 꽃잎 흩날리고, 여름엔 그늘 드리우고, 가을엔 단풍 물들고, 겨울엔 흰 눈 소복한 오솔길이다. 도암댐 어귀만 경사가 있을 뿐, 나머지 구간은 평탄하다. 올림픽 아리바우길이 찾아낸 또 하나의 비경이라 할 수 있다. 
배나드리 마을에서 도암댐 가는 길. 송천을 따라 그윽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손민호 기자

배나드리 마을에서 도암댐 가는 길. 송천을 따라 그윽한 오솔길이 이어진다. 손민호 기자

단풍 내린 도암댐. 지난해 10월 하순 촬영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4코스가 지난다. 손민호 기자

단풍 내린 도암댐. 지난해 10월 하순 촬영했다. 올림픽 아리바우길 4코스가 지난다. 손민호 기자

길 양쪽으로 산이 벽처럼 서 있는데, 오른쪽 산 정상부 해발 1000m 언저리에 고산 평원이 숨어 있다. 안반데기.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고랭지 배추밭의 이름이기도 하다. 안반데기는 떡메로 쌀을 내리칠 때 쓰는 ‘안반’처럼 생긴 ‘덕(산 위의 평평한 구릉 지대)’이라는 뜻이다. 현재 28가구가 안반데기에서 배추 농사를 한다.
 
안반데기는 65년부터 배추밭으로 조성되었다. 당시 박정희 정부는 강원도 산자락에 흩어져 살던 화전민들을 안반데기로 올려보냈다. 땅을 직접 가꾸면 가꾼 사람에게 주겠다는 나라의 제안은 땅 한 평이 없어 이 산 저 산을 떠돌던 화전민에게 구원 같은 소식이었다. 그러나 자갈투성이 비탈을 일구는 건 쉽지 않았다. 식량은커녕 식수도 구하기 어려운 오지에서 화전민은 땅을 파고 자갈을 캐고 배추를 심었다. 그렇게 1.95㎢ 면적의 배추밭이 꼭대기에 만들어졌다. 
 
안반데기는 올림픽 아리바우길 5코스의 전반부를 이룬다. 안반데기에서 시작한 5코스는 고루포기산(1238m)에서 백두대간에 올라탄 뒤 대관령(835m)에서 6코스와 만난다. 5코스는 올림픽 아리바우길 전체 코스 중에서 가장 고도가 높다. 5코스 전체가 비경이다.
만추의 안반데기. 알프스의 어느 자락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만추의 안반데기. 알프스의 어느 자락처럼 이국적인 풍경을 자아낸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8월의 안반데기. 기슭을 따라 이어진 배추밭이 언뜻 거대한 꽃밭 같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8월의 안반데기. 기슭을 따라 이어진 배추밭이 언뜻 거대한 꽃밭 같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1월의 안반데기. 안반데기는 기록적이 폭설로 악명이 자자한 지역이다. 이 엄청난 눈을 즐기려고 겨울에 일부러 안반데기에 오르는 사람도 있다. 손민호 기자

1월의 안반데기. 안반데기는 기록적이 폭설로 악명이 자자한 지역이다. 이 엄청난 눈을 즐기려고 겨울에 일부러 안반데기에 오르는 사람도 있다. 손민호 기자

안반데기는 여름 풍경, 특히 수확 앞둔 배추가 비탈을 따라 빽빽이 차 있는 8월의 모습이 가장 알려져 있다. 배추 대부분이 추석 이전에 팔려 나가기 때문이다. 그래서 안반데기의 가을은 좀처럼 드러나지 않았다. 배추 뽑힌 밭처럼 허전한 풍경도 없을 터였다.
 
그러나 아니었다. 막상 올라가 보니 뜻밖의 장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른 아침 안반데기에 오르니 발아래로 구름바다가 펼쳐졌다. 지저분할 것 같았던 배추밭도 곡선의 밭고랑이 기하학적 장면을 빚어냈다. 아무것도 없지만, 꽉 찬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 아쉬워 자꾸 뒤돌아보게 되는 이 계절과 꽤 어울리는 풍경이었다. 
 
 손민호 기자 ploves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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