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조선보다 일본을 부수기 쉬웠다 … 그래서 메이지유신 성공”

중앙일보 2018.10.28 06:00 종합 18면 지면보기
서승욱의 나우 인 재팬
 메이지유신 150년을 맞은 올해 1년 내내 일본에선 논쟁이 이어졌다. 메이지유신은 조슈번(長州ㆍ지금의 야마구치)과 사쓰마번(薩摩ㆍ가고시마) 등이 중심이 돼 도쿠가와(德川) 막부를 무너뜨리고 일왕(일본에선 천황) 중심의 근대국가 개혁을 했던 일련의 과정을 일컫는다.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도쿄=서승욱 특파원

 

조선은 체제 정합성 높아 변화 둔감
유신, 군국주의의 조건 아니었지만
1890년대 경제·군사력 쌓이며 돌변
조선 개혁 성공땐 침략 없었을 것

야마구치 출신의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는 ‘열강의 식민지가 될 뻔한 위기에서 독립을 지키고 근대화를 성취한 빛나는 역사’로서의 메이지유신만 강조했다. 하지만 ‘군국주의의 토양이 됐고, 각종 사회문제의 시발점이 된 역사의 그늘’을 함께 봐야 한다는 반론도 있다.  
 
중앙일보는 일본 내에서 손꼽히는 메이지유신 권위자인 미타니 히로시(三谷博·68)도쿄대 명예교수(현 아토미가쿠엔여대 교수)를 인터뷰했다.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4월의 대면 인터뷰 이후 세 차례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내용을 보충했다. 일본 내 논쟁 포인트뿐 아니라 당시 동아시아의 국가들 중 왜 일본에서만 유신이 성공했는지, 일본과 한반도의 차이는 무엇이었는지도 조명했다. 
 
미타니 교수는 "당시의 일본은 한국(조선)에 비해 국가를 뒤집고 부수기가 훨씬 쉬운 구조였다. 그래서 가능했다"고 말문을 열었다.      
 
일본인에게 메이지유신의 가장 큰 이미지는 무엇인가.
근대화의 시작이다. 메이지유신이 제1혁명, 그리고 전후 (연합국군총사령부 주도의) 제2혁명, 두 가지가 있었기 때문에 지금의 일본이 있었다.
 
메이지유신의 혁명사적 특징은.
프랑스혁명 등에 비해 희생이 적었다. 특히 혁명의 중심 세력인 무사(사무라이) 계급이 혁명 뒤 사라졌다는 게 불가사의하다. 무사들이 퇴직금(국채와 돈, 평소 수입의 10분의 1쯤에 해당)만 받고 다른 직장을 찾게 됐다. 메이지유신으로 인한 가장 큰 변화는 신분제 폐지다.
 
왜 일본에서만 가능했나. 한국(당시 조선)과의 차이는.
260개 번으로 쪼개진 연방제적 특징, 천황과 쇼군으로 천하의 권력이 나뉘어 있는 쌍두제 때문에 가능했다. 한마디로 (국가의 체제를) 부수기가 쉬웠다. 조선의 지배계급 '양반'은 땅주인들이었지만 다이묘와 사무라이는 대부분 자기 토지를 갖고 있지 않았다. 땅이 없는 관료들이라 그들의 권익이나 수입을 국가가 빼앗기 쉬웠다.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조선이 더 안정적이라 변화에 불리했다는 뜻인가.
그렇다. 조선은 왕이 한 명이지만 여기는 둘(천황과 쇼군)이었다. 조선은 과거제도와 성리학의 전통이 강했다. 당시 조선 사람들은 자신의 (정치)제도를 바꿔야 한다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과거제가 있어 원칙적으로는 누구나 시험을 치면 관료가 될 수 있었다. 현실이 어땠는지와 무관하게 일단 '기회의 평등'이 있었다. 조선은 일본보다 정치제도의 정합성이 높았다. (부수기 어렵게)잘 짜여 있어서 결과적으로 개혁이 늦어졌다고 본다.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일본도 조선도 모두 '양이(攘夷)'를 했는데.
조선은 진짜로 '양이'를 했는데, 일본의 미토번에서 불을 붙인 ‘존왕양이(尊王攘夷·왕을 숭상하고 오랑캐를 물리침)’의 '양이'는 진짜 '양이'가 아니었다. '서양과 한번은 전쟁을 해야 한다. 전쟁을 안하면 200년 이상 평화가 이어져온 현재의 일본이 얼마나 위험한지 모른다. 전쟁으로 현실에 눈을 떠야 한다. 그래야 개혁이 가능하다'는 의미의 '양이'였다. 서양을 배제하는 게 아니라 국내 개혁을 위해, 도화선에 불을 붙이기 위해 폭탄을 떨어뜨리자는 것이었다. 리더들이 아주 속이 엉큼했다. 반면 조선은 성실하게 '양이'를 했다. 
 
그래서 쇄국정책이 적극적인 개국으로 바뀌었나.
양이론자들은 언젠가는 개국을 하리라 이미 마음먹고 있었다. 그것이 한국과는 달랐다. 조선보다 많은 서양인들이 먼저 일본을 찾으면서 위기의식이 높았고, 그래서 일본은 서양의 기술에 큰 관심을 갖게됐다.
 
메이지유신에 대해 ‘겉으로는 존왕을 내세웠지만 결국 조슈번과 사쓰마번이 패권을 쥐기위한 권력투쟁’이란 비판도 있다.
권력과 패권만을 위해서라면 폐번치현(廃藩置県·번을 폐지하고 전국을 부·현으로 일원화한 1871년의 중앙집권 개혁)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폐번치현으로 조슈도 사쓰마도 모두 없어졌고, 무사계급 자체가 없어졌다.자기 다리를 자기가 잘랐다.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팽창 정책, 군국주의의 씨앗이 잉태된 것도 메이지유신때 아닌가.
메이지유신이 향후 팽창정책의 필요조건인 건 맞지만 충분조건이라고 말하긴 어렵다. 유신의 목표가 전쟁이나 침략은 아니었다. 물론 일찍이 침략을 주장한 사람이 없지 않았고, 정한론(征韓論·1870년대에 대두된 조선정벌론)도 있었지만 1890년까지 정부를 실제로 이끈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 분위기가 청일전쟁(1894년)까지 4년 만에 확 바뀌었다. 처음엔 ‘우리 경제력이나 군사력으로는 무리’라고 생각했다가 힘이 쌓이면서 군인들을 중심으로 ‘할 수 있겠다’고 판단이 바뀐 것 같다."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메이지유신 전문가 미타니 히로시 교수가 중앙일보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서승욱 특파원

메이지유신과 태평양 전쟁은 무관한가.
두 사건 사이에 70년의 세월이 있다. 근대화가 성공했기 때문에 옆 나라를 침략하고, 미국과 전쟁을 하는 게 필연은 아니지 않을까. 중간에 다른 선택지가 계속 있었다. 메이지유신에만 모든 책임을 뒤집어 씌워선 안된다.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대원군의 개혁 등 조선의 내부 개혁이 성공했다면 양국 관계는 어땠을까.
양국 간 전쟁은 있었을지 몰라도 일방적인 침략은 없었을 것이다.
 
만약 메이지유신이 없었다면 일본과 동북아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일본인들이 열도에만 틀어박혀 있었다면, 서양과 훨씬 더 불리한 조약을 체결하고 영토 일부를 빼앗겼을 것이다. 물론 조선이나 중국에 대한 침략도 없었을 것이다.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에도 막부시대 말기인 1841년 미토번의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가 설립한 교육기관 고도칸의 전경. 미토학은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기반이 된 존왕양이론을 낳았다. 서승욱 특파원

존왕양이의 모태, 역설의 땅 미토
 지난 20일 찾은 이바라키(茨城)현 미토(水戸)시의 고도칸(弘道館)주변은 한적한 분위기였지만, 관광객의 발길은 꾸준했다. 에도 막부 시대 미토는 '미토학'이라는 학풍의 본산지였다. 메이지유신의 캐치프레이즈였던 '존왕양이론'의 모태다. 그리고 고도칸은 미토번의 9대 번주 도쿠가와 나리아키(德川齊昭)가 세운 교육시설이었다. 이 곳을 중심으로 각종 개혁·양이 정책이 추진됐다. 
 
메이지유신 연구가인 성희엽은 저서『조용한 혁명, 메이지유신과 일본의 건국』에서 나리아키 시대의 후기 미토학에 대해 "미토를 중심에 두지 않고 '전체 일본'이란 전혀 다른 지평에서 당시의 대외적 위기 상황을 바라봤다"며 "그 전까지 일본의 사무라이들이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으니 사고의 대전환이었다"고 평가했다.  
  
미토번은 도쿠가와 쇼군 가문의 일족으로, 쇼군직을 승계할 수 있는 이른바 고산케(御三家)였다. 실제로 나리아키의 7남 도쿠가와 요시노부(德川慶喜)는 에도의 마지막 쇼군이었다. 도쿠가와 가문이면서도, 막부가 아닌 일왕 중심의 존왕론을 태동시킨 역설적 지위였다. 또 미토학의 '천황숭배론'은 훗날의 황국사관으로 연결됐다는 비판도 받았다.
  
도쿄·미토(이바라키현)=서승욱 특파원 sswook@joongang.co.kr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