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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2차 북·미 정상회담 지연 … 한·미관계에 적신호

중앙선데이 2018.10.27 00:20 607호 35면 지면보기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대사

북·미 정상회담을 하면 하는 대로 의미가 있지만, 하자고 해놓고 안 열리면 거기에도 중요한 의미가 숨어있다. 먼저, 외교관의 시각에서 볼 때 날짜가 늦어지기 시작하면 지연은 반복되고 결국 계속 늦어지는 경향이 있다는 점이다. 2019년 초보다 더 늦어질 수 있단 얘기다. 둘째, 안 열린다는 건 북·미 협상에 적신호가 켜졌다는 것이다. 싱가포르 회담 이후 북한은 몇 가지 상징적 조치를 취해왔다. 핵실험장 입구 폭파나 미사일 실험장 해체 약속이 그것이다. 하지만 이런 조치는 북한의 핵 능력 제거를 위한 핵심 이슈로까지 나아가지 못했다. 회담 이후 넉 달 동안 비핵화 프로세스의 핵심인 핵 리스트 제출을 북한이 하겠다는 신호는 여전히 없다. 북한은 미국이 ‘상응한 조치’를 취하면 비핵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계속 주장해왔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정상회담 개최는 쉽지 않고 준비에 분명히 생각했던 것 이상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비핵화 진전 없자 회담도 지연
북·미와 남북 협상 격차 벌어지며
한·미 관계에 심각한 위험 될 소지
경제 지원, 최우선 순위 둔 김정은
북·일, 북·러, 교황 방북에 미온적

셋째, 회담이 늦어질수록 북·미 협상과 남북 협상 사이에 차이가 점점 더 벌어진다는 것이다. 올 상반기엔 두 협상을 조율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서울과 워싱턴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두 협상 간의 속도 차이는 심각한 문제를 만들고 있다. 한·미는 긴밀히 ‘협의’한다지만 ‘협의’가 ‘의견일치’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사적 자리에서 미국 정부관리들은 남북관계 개선에 대한 열망 때문에 문재인 대통령이 북한 비핵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단호한 의지를 잠시 제쳐둘 수도 있지 않을까 우려하고 있다. 이런 우려 자체가 북·미와 남북 프로세스를 분리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이런 우려는 문 대통령의 최근 유럽 방문 기간 커졌다. 방문 이후 공동성명을 내지 않은 것은 깜짝 놀랄 일이다. EU 측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돌이킬 수 없는 비핵화(CVID)’ 또는 그와 유사한 단어를 성명에 넣자고 했는데 문 대통령 외교팀이 이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이런 사실은 워싱턴을 더 걱정하게 하고 있는데 바짝 곤두선 워싱턴의 신경은 “남북관계 개선은 한반도의 ‘완전한 비핵화’(북한이 선호하는 표현)를 촉진한다”는 문 대통령의 10월 23일 발언에도 좀처럼 진정되지 않을 것이다. 남북 프로세스와 북·미 프로세스가 분리될 경우 향후 한·미 관계에 손상을 일으킬 위험이 있다. 하필 이런 때에 주한미군 방위비 분담금 협상이라는 양국이 양보하기 쉽지 않은 협상을 하고 있다는 점은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다.
 
북·미 정상회담 말고도 아직 열리지 않은 세 개의 정상회담이 있다. 북·일 및 북·러 정상회담, 교황의 방북이 그것이다. 몇달 동안 일본은 조총련 본부를 통해 정상회담을 추진해왔는데 아직 날짜조차 잡지 못하고 있다. 납치자 문제와 일본의 안보를 직접 위협하는 단거리미사일 문제 때문인데 둘 다 해결이 곤란한 난제 중 난제다.
 
김 위원장은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서둘러서 만나려고도 하지 않을 것 같다. 러시아는 한 달 반 전부터 북한과 정상회담 개최를 협의 중이다. 하지만 러시아는 한국이나 중국처럼 대북 경제지원을 할 만한 거리가 별로 없다. 유엔 안보리 상임이사국인 러시아가 총대를 메고 대북 제재를 해제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 정도다. 최근 러시아 언론은 한국 외교소식통을 인용, 김 위원장이 2주 안에 방러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보도했다. 아마 그런 일은 김 위원장이 푸틴 대통령을 설득해 러시아가 화끈하게 힘을 써 제재를 없앨 수 있다는 판단이 들 때 일어날 텐데 그런 일이 일어날지 두고 보자.
 
정상회담 웨이팅 리스트에 최근 교황이 추가됐다. 하지만 여기에도 역사는 살아있다. 태영호 전 영국주재 북한공사는 저서에서 김일성 주석이 교황을 초청하려고 했는데 북한사람들이 가톨릭 신자가 될까 봐 접었다고 썼다. 김정일 국방위원장도 2000년 이 아이디어를 살려냈는데 교황청 측이 북한 가톨릭 성직자를 만나고 싶다고 요구해서 깨졌다고 한다. 이번에 김 위원장이 교황을 공식 초청하면 교황청 측은 똑같은 요구를 할 것이다. 더욱이 교황으로선 북한까지 갔으면서 인권문제를 얘기하지 않기는 어려울 것이다. 북한이 (만에 하나) 교황을 초청한다면 이후 협상은 길고도 뻑뻑할 것이다.
 
북한의 잇따른 정상회담 추진을 외교적 고립에서 벗어나려는 시도라고 보는 것은 잘못 짚은 것일 수 있다. 회담 개최를 강하게 희망하는 건 북한이 아니라 일본과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대신 정상회담 웨이팅 리스트는 두 가지를 시사한다. 북한의 관심은 여전히 북한 경제 발전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나라에 집중돼 있다는 점이다. 한국·미국·중국이다. 북한은 현재로썬 일본을 무시할 요량이고 아마 러시아도 그럴 것이고, 같은 이유로 교황이 방북할 것이라고 쉽게 판단해선 안 된다. 북한이 원하는 것은 교황 방문의 상징성(도덕적 승인 등)이기 때문에 실질적인 것(인권 개선, 성직자 면담 등)을 요구하지 않을 것이라는 확신이 들 때만 초청할 것이다. 그리고 북한은 다른 민주주의 국가 지도자와는 달리 교황은 임기에 제한이 없고 북한 지도자만큼이나 긴 게임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종종 이 게임은 진짜 길다. 1688년 외교관계를 단절한 영국과 바티칸이 하는 둥 마는 둥 협상을 하다가 1982년 상대국에 대사관을 개설할 때까지 무려 294년이 걸렸다. 개인적으로 북한과 바티칸이 서로의 차이를 해결하는 데 영국과 바티칸만큼 오래 걸릴지 궁금하다.
 
존 에버라드 전 평양 주재 영국 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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