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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평] 우리는 지금 혁명 중인가

중앙일보 2018.10.26 01:16 종합 35면 지면보기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촛불’은 프랑스 혁명과 대등한 반열에 올라섰다. 적어도 문재인 대통령의 역사관은 그렇다. 그는 지난주 프랑스 국빈 방문 중 혁명예찬론을 폈다. “프랑스 혁명의 정신은 대한민국 국민들이 들었던 촛불 하나하나에서 혁명의 빛으로 되살아났다”(파리시청 환영 리셉션), “우리의 촛불 혁명은 가장 아름답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한국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프랑스 교민 간담회), “프랑스 혁명과 광화문 촛불이 시공간을 뛰어넘어 깊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꼈다”(페이스북 글 ‘파리를 떠나면서’). 그러면서 “이제껏 받아보지 못한 환대를 받았다”고 소회를 전했다. ‘혁명의 나라’ 프랑스가 문 대통령을 ‘혁명 지도자’라고 보고 극진히 대접했다는 의미로 들렸다.
 

문 대통령의 ‘촛불혁명’ 역사관
프랑스혁명과 같은 반열로 인식
자유·평등·박애의 지향성 없이
적폐 청산만 매달리는 촛불세력
오만과 증오 대신 포용과 화합이
촛불에 혁명의 생명 불어넣을 것

촛불과 1789년의 프랑스 대혁명은 닮았다. 시민이 앞장서 기존 체제를 타도했다. 파리 바스티유감옥 습격으로 촉발된 프랑스 대혁명은 절대군주제·봉건제도·신분사회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즉, 낡은 체제를 붕괴시켰다. 2016~2017년 무능과 부정부패에 분노한 촛불은 박근혜 정권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다.
 
구세력 제거와 과거와의 단절도 흡사하다. 프랑스 대혁명은 공포정치였다. 루이 16세를 비롯해 1만 명 넘게 숙청당했다. 공포정치를 주도한 극좌파의 로베스피에르는 “신이 존재하지 않으면 신을 만들 필요가 있다”며 혁명 독재를 정당화했다(앙드레 모로와 『프랑스사』). 촛불혁명의 슬로건은 적폐 청산이다. 기득권 세력과 그 부역자에게 자의적 적폐 딱지를 붙이고, 청산이란 도덕적 심판을 들이민다.
 
고대훈칼럼

고대훈칼럼

‘촛불의 명령’이란 신성불가침의 상징도 끌어들여 법치와 정상을 우회한다. 청와대는 평양선언과 군사합의서의 국회 비준을 건너뛰기 위해 “북한은 국가가 아니다”라는 해괴한 논리를 동원한다. 건국 직후 1948년 구성됐던 ‘반민특위’ 이후 70년 만에 처음으로 ‘특별재판부’가 꿈틀거린다. 조국 민정수석은 현직 부장판사의 과거 행적을 거론하며 공개 망신을 주고, 김의겸 대변인은 비우호적 언론에 "우국충정은 이해하겠는데, 이제 그만 걱정 내려놓으시라”고 꾸짖는다.  때로 군림하려 드는 것도 혁명의 속성이다.
 
문 대통령의 바람대로 촛불이 프랑스 혁명에 버금가려면 보편타당한 혁명정신을 갖춰야 한다. 자유·평등·박애가 프랑스의 혁명정신이다. 파괴와 폭력, 무질서, 반동이라는 퇴행과 굴곡이 있었지만 혁명정신은 1830년의 7월혁명(부르주아 혁명과 새 왕조), 1848년의 2월혁명(제2공화국 출범)을 거쳐 1968년의 68혁명(청년의 문화혁명)으로 계승됐고, 오늘날에도 인류의 소중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촛불은 아직 한참 모자란다.
 
자유는 권력을 거부하고 비판할 자유를 포함한다. 그런데 현 정부는 ‘무균(無菌) 사회’를 꿈꾼다. ‘허위 조작’이라고 간판을 바꾼 가짜뉴스 척결의 본질은 불온한 반대와 다름을 잠재우겠다는 것이다. 언론 자유를 입에 달던 사람들이 ‘유언비어’ ‘카더라 통신’을 단속하겠다는 과거 권위주의를 흉내내고 있다. 반대가 없는 사회는 죽은 사회다. 왜 가짜뉴스에 자발적으로 속고 싶은 사람들이 이리 많은지, 그 고민과 반성이 정부가 할 일이다.
 
평등은 차별당하지 않을 권리와 법 앞에서의 같음이다. 서울교통공사를 비롯한 공기업들의 고용세습 비리, 제 식구 챙기기의 내로남불식 인사는 ‘기회의 평등, 과정의 공정, 결과의 정의’가 공허한 구호였음을 일깨워준다. 우애·박애 등으로 번역되는 프랑스어 ‘Fraternité’는 영어  
 
‘Brotherhood’에 해당하며 ‘형제애’ ‘동지애’에 가깝다. 견해가 다를지라도 자유와 평등을 위해 함께하는 모든 시민들에 대한 끌어안음이다. 촛불은 특정 이념 집단이나 세력에 대한 절대적 지지가 아니다. 그런데도 ‘우리끼리의 세상’을 만들고, 반대하는 이들을 철저히 배척하는 게 요즘의 풍경이다.
 
사회주의적 경제, 권력을 움직이는 ‘청와대 정부’, 과감한 대북 평화 공세를 하는 외교·안보 등 분명 무늬는 혁명적이다. 하지만 그 속을 채울 정신과 가치가 빈약하면 진정한 혁명으로 승화되기 어렵다. 문 대통령은 엘리제궁 만찬에서 “프랑스의 위대함을 포용과 화합에서 느낀다”고 했다. 그렇다. 오만과 증오로는 혁명 정신을 창조할 수 없다. 촛불에 자유·평등·박애의 정신을 불어넣어야 혁명의 생명을 얻을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혁명은 광기로 끝날 수 있다. 카뮈는 『반항인』에서 “혁명은 아직 존재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라고 했다. 미래를 알 수 없는 막연한 사랑이 혁명이다. 혁명을 지향하는 촛불이 제대로 가는지 영 불안하다. 우리의 혁명은 어디쯤 가고 있는가.
 
고대훈 수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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