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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수부지가 얼마나 상쾌한지, 리스본 강변 가면 알게 된다

중앙일보 2018.10.24 11:01
[더,오래]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4)
리스본 시내와 공항을 벗어나 비로소 강변이 나타나고 순례길을 알리는 표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난다. [사진 박재희]

리스본 시내와 공항을 벗어나 비로소 강변이 나타나고 순례길을 알리는 표지가 일정한 간격으로 나타난다. [사진 박재희]

 
‘세상에…. 뭐 이래?’
산티아고 순례길의 여러 루트 중에 리스본 출발 루트를 선택하는 사람이 거의 없는 이유를 깨닫는 데는 채 몇 시간도 필요하지 않았다. 걸어보면 누구든 바로 알게 된다. 내가 상상한 까미노가 아니었다.
 
도시의 보도블럭, 시멘트 길을 지겹도록 걸어 나오며 언제 마음을 준 적이 있었나 싶을만큼, 믿기지 않을 정도로 리스본이 끔찍해졌다. 관광객이 바글거리는 시가에서 딱 반 블럭을 벗어났을 뿐인데 도시는 지저분하고 무책임하게 버려진 상태로 보였다. 서글픈 실망이 이어졌다.
 
‘순례길이라고 할 수 없어!’
바스쿠다가마 다리(Ponte Vasco da Gama)를 바라보는 타구스 강변이 나타나기 전까지 대성당에서부터 8km는 한마디로 엉망진창이다. 긴급보수가 필요한 보드워크는 걷다가 나무를 부러트리게 되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도시의 생활 쓰레기 냄새에 어질어질했고 무표정하고 어딘가 화가 나 있는듯한 사람들의 표정을 마주하기도 생경했다.
 
16세기 슈퍼파워 포르투갈을 가능하게 했던 대항해 시대의 인물 바스쿠다가마의 이름을 붙인 다리. 총 길이 17.2km. [사진 박재희]

16세기 슈퍼파워 포르투갈을 가능하게 했던 대항해 시대의 인물 바스쿠다가마의 이름을 붙인 다리. 총 길이 17.2km. [사진 박재희]

 
바삭바삭한 햇볕에도 도무지 유쾌한 기분이 되기 힘들었다. 바다처럼 펼쳐진 타구스강변에 설치된 케이블카는 이용객이 없이 처량했다. 유럽에서 제일 긴 다리, 총 길이 17.2km 바스쿠다가마 다리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볼만한 풍광도, 쉴 곳도, 물을 살만한 자판기도 하나 없는 길이었다.
 
서울의 고수부지가 얼마나 깨끗하며 상쾌한 곳인지 깨닫고 그리워하게 되고 싶다면 이 코스를 걸으면 된다. ‘여행은 영혼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따라가는 것’이라면서 콧노래를 불렀던 게 불과 몇 시간 전이다. 톡톡히 벌을 받는 심정이었다. ‘집 떠나면 개고생이지’를 절감하며 걸었다. 차도를 따라 이어진 노란색 순례 화살표는 중고차 혹은 폐차가 꽉 차게 들어선 단지로 들어서도록 했다. 기필코 첫날 삭막함의 최고 정점을 찍고자 하는 모양이었다.
 
그나마 포르투갈 특유의 그라피티로 가득한 벽을 보는 즐거움은 있었다. 정부가 아예 스트리트 아트(street art)로 명명하고 권장한다더니 그래서인지 비어있는 벽이 없었다. 혹자는 낙서와 예술의 경계에 있다고 하던데 내 눈에는 미술관과 박물관에 박제될 위험을 벗어난 완벽한 공개예술이었다. 
 
공장지대와 삭막한 리스본 근교를 벗어날 때 그나마 눈을 즐겁게 해준 것은 포르투갈 그라피티이다. 거리의 예술이라고 부르며 장려하는 덕분에 비어있는 벽이 없을 정도이고 작품성이 뛰어나다. [사진 박재희]

공장지대와 삭막한 리스본 근교를 벗어날 때 그나마 눈을 즐겁게 해준 것은 포르투갈 그라피티이다. 거리의 예술이라고 부르며 장려하는 덕분에 비어있는 벽이 없을 정도이고 작품성이 뛰어나다. [사진 박재희]

 
쓰레기와 온갖 생물체의 배설물이 뒹구는 순례길을 걸었다. 말이 나왔으니 말이지만 산티아고 가는 길 프랑스 루트는 어떤가? 생장피에드포에서 출발해서 론세스바예스까지 가는 프랑스 루트의 첫날이란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목숨을 걸어야 한다는 점을 빼면(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이 과연 뺄 수 있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여튼) 아찔한 풍광으로 한 걸음 한 걸음이 평생 잊지 못할 감격과 설렘 그 자체가 아니었던가. (눈과 비, 천둥과 우박, 번개가 치던 날 토마스라는 천사가 피레네에서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사연이 궁금한 분들은 책 ‘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를 참고하시길.)
 
까미노  프랑스 길은 찾는 사람이 점점 많아져 하루 500명에 육박하는 사람이 루트의 시작 지점인 생장으로 몰려간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 불평을 하면서도 그 길로 가는 것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고 포르투갈 리스본 루트가 비인기 종목, 비인기 루트인 것도 역시 이유가 있는 것이었다. 세상에 이유 없는 무덤이 없다고 옛말 그른 거 별로 없다며 걷는 내내 듣는 사람도 없는 불평을 했던 것 같다.
 
투덜투덜하며 엉금엉금 걸어 초주검이 되었을 때 알프리아테(Alpriate)에 도착했다. 리스본에서 알프리아테까지 11kg 배낭을 메고 22km를 걸었다.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순례길에서 만나는 소박하고 작은 첫 마을 알프리아테. [사진 박재희]

리스본에서 시작하는 포르투갈 순례길에서 만나는 소박하고 작은 첫 마을 알프리아테. [사진 박재희]

 
‘보아 타르데’(포르투갈의 오후 인사. 영어로 굿 애프터눈이라고 보면 된다.)
첫날이 끔찍하기만 했기에 뭔가 근본적으로 계획을 점검해야겠다고 생각한 참이었다. 극기훈련도 아니고 이건 순례길이라기엔 뭔가 대단히 잘못된 것이라고 생각하며 숙소 앞 벤치에 앉아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나 내게 다가온 마을 할머니가 쓱 내 손을 잡더니 당신 앞치마로 끌어갔다. 주름 많은 입술로 다정한 인사를 건네더니 복숭아 한알을 쥐여주셨다. 할머니 눈빛과 손은 따스했고 그 순간, 어디선가 더없이 시원한 바람이 불었던 것 같다.
 
납작 복숭아. 먹어본 사람은 모두 잊지 못하는 맛. 세배쯤 달고 향미도 풍부하다. 와일드 피치(wild peach)라고 부르며 남유럽, 터키, 그리스 모로코에서 많이 먹는다. 원래 복숭아는 둥글지 않고 이렇게 납작했는데 과육을 늘리는 종자 개량으로 흔히 보는 둥근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 박재희]

납작 복숭아. 먹어본 사람은 모두 잊지 못하는 맛. 세배쯤 달고 향미도 풍부하다. 와일드 피치(wild peach)라고 부르며 남유럽, 터키, 그리스 모로코에서 많이 먹는다. 원래 복숭아는 둥글지 않고 이렇게 납작했는데 과육을 늘리는 종자 개량으로 흔히 보는 둥근 모양이 되었다고 한다. [사진 박재희]

 
무화과나무 아래 벤치로 알 수 없는 바람이 불어온 순간 난 급기야 이런 험지 걷기야말로 진짜 순례일 거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볼 것도 별로 없고, 쉴 곳도 없으며, 하다못해 제대로 된 인도도 없는 길을 걷는 것 말이다.
 
인생이란, 순례란, 상큼하고 발랄한 걷기 여행은 아니지 않은가? 지난하고 어려운 날과 힘겨운 시간이 이어지는 것이 인생이고 순례가 아니던가! 그러다가 문득 불어온 한 줄기 바람, 건네오는 따스한 한마디 그리고 모양이 일그러진 복숭아 하나에 기대어 일어서고 힘을 내고 걷는 것이 인생이고 길이니까 말이다.
 
볼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는 이 동네, 한가하고 가을바람이 좋은 이 시골 동네가 갑자기 꽤 맘에 들었다. 아~ 바람 좋은 포르투갈이다. 오늘 나의 포르투갈 걷기가 시작되었다.
 
박재희 모모인컴퍼니 대표·『산티아고 40일간의 위로』저자 jaeheecall@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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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재희 박재희 기업인·여행 작가 필진

[박재희의 발로 쓰는 여행기] 한량으로 태어나 28년을 기업인으로 지냈다. 여행가, 여행작가로 인생2막을 살고 있다. ‘호모 비아토르(Homo Viator)', 여행하는 인간으로 삶의 의미를 찾아 길을 떠나는 여행자다. 길에서 직접 건져올린 이야기, 색다른 시각으로 비틀어 본 여행기를 공유하고자 한다. 여정을 따라 함께 걸으며 때로는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이야기, 생생한 도보 여행의 경험을 나누며 세상을 깊이 여행하는 길로 여러분을 초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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